[김국애 원장의 미용 에세이] 착순이 아줌마

전병선 2023. 9. 4. 10:0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오래전 아이들이 유아 시절의 일이다.
형제처럼 지내던 고객의 알선으로 내 고민을 덜어줄 착순이 아줌마를 만나게 되었다. 스물다섯 살의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아들딸을 훌륭하게 키워낸 장한 어머니였다. 나는 집에서 일을 도와줄 아줌마를 선택할 때, 반드시 자식을 키워본 사람이라야 한다는 것을 첫째 조건으로 내세웠다.

아줌마는 우리 집에 오던 날부터 큰아이를 큰 총각으로, 딸은 공주, 막내는 작은 왕자로 애칭을 지어 불렀다. 자기의 친자식을 대하듯 사랑과 정성을 쏟아 보살피면서 깍듯이 예의까지 지키는 아줌마를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그녀는 순박하면서도 곧은 성품을 가진 분이었다.

두어 달이 지난 후 어느 날 개구쟁이 막내가 일터에서 돌아온 내게 “엄마 우리 아줌마를 착순이 아줌마라고 부르면 어때요”라고 했다. “어머 그렇게 부르면 참 좋겠다. 아주 멋있는 이름이다.” 나는 당장 동의하였다.

간혹 막내가 아빠에게 꾸중 듣는 일이 생기면 자기가 대신 잘못했다고 울먹이며 말렸고 중학생인 큰아들이 보충수업을 마치고 밤늦게 귀가하면 밤참을 만들어 먹였다. 내가 늦은 시간 지쳐서 집에 오면 맨발로 현관까지 뛰어나와 반기곤 했다. 착순이 아줌마는 내 건강을 친언니처럼 챙겨주었다.

한 지붕 밑에서 지낸다고 해서 다 남남이 가족처럼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솥밥을 먹더라도 끈끈한 정을 오랫동안 나눌 수 있게 되려면 서로가 애정을 가지고 진실과 성심을 다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초여름 어느 날 아침에 아줌마의 두 눈이 심하게 충혈이 되어 몹시 괴로워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하룻밤 사이에 아줌마의 자녀들에게서 어려운 소식이 왔는가 하여 초조한 마음으로 여쭈었다. “무슨 어려움이 생겼느냐”는 내 질문에 아줌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간의 살아온 얘기를 내게 털어놓았다. 청춘에 남편을 여의고 어린 두 자녀를 전문직의 인재들로 키워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열심히 살았으나 자신의 노후에 아이들에게 짐이 되지 않아야겠다는 결단을 하였다는 것이다. 때마침 좋은 기사식당에서 주방장으로 일할 때였다고 말을 이어갔다.

노천 지붕 밑에서 김칫거리를 씻던 중 안쪽 부엌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순식간에 지붕이 무너져 눈 속에 흙이 들어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위기에 눈을 감은 채 더듬더듬 위험한 부엌으로 들어가 이미 뜨거워진 가스통을 찾아 밸브를 잠그고 치마폭으로 가스통을 덮어씌워 끌어안고 울타리 밖으로 굴려 놓고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녀는 온몸에 화상을 입었지만 식당 건물은 큰 화재를 모면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목숨을 건졌다고 하였다. 그 공로로 착순이 아줌마는 그해 소방대상자로 선정되어 소방대상을 받았다고 하였다.

나는 아줌마가 보여주는 허벅지와 다리 사이의 화상 자국을 보며 가슴이 저려왔다. 참으로 거룩한 흔적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침착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결혼을 안 하니까 흉이 크게 있어도 상관없어요. 사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흉이지만 공중목욕탕에 갈 때마다 자유스럽지는 않아요. 그때 그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지금도 아찔해요.” 몇 년을 한 가족으로 함께 지내면서 겪어본 아줌마의 심성으로 이기심이 전혀 없는 헌신적인 착한 아줌마,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그런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가 틀림없었다.

정말 자신에게 닥칠 위험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사람들을 살려야 한다는 순교적 정신, 본능을 따른 것이다. 자기 가족이 아닌 남을 위해 자신의 목숨조차 돌아보지 않는 희생정신은 아무나 모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줌마는 참으로 아름다운 인간애를 타고 난 분이었다.

착순이 아줌마의 삶을 신중하게 헤아리며 그 누구도 감히 생각할 수 없는 훌륭한 인품을 지닌 아줌마에게 오히려 우리 가족은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 듯 거룩한 부담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 일로 인해 여름마다 눈병이 자꾸 도져서 십 년 넘게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

나는 곧바로 남편과 착순이 아줌마 눈병 치료를 의논하였다. 남편은 탁월한 생각이라고 나를 격려해 주었으며 당장 일주일간의 임시 가정부를 구하기 위해 YWCA에 연락을 해 주었고 내 일터에 지장이 없도록 신경을 써 주었다.

“아줌마는 내게 그냥 참고 살면 될 것 같아요”라며 사양하는 것을 “안돼요!! 아줌마는 참는데 이골이 난 사람입니다. 눈병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질 수 있어요. 제발 우리가 치료해 드리겠다”고 간청을 했다. 착순이 아줌마를 강남 K병원으로 안내하여 눈 수술을 받게 해드렸다. 2주가 지난 뒤 깨끗이 치료가 마무리되어 10여 년 여름마다 아줌마를 괴롭히던 눈병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착순이 아줌마가 우리 집에서 일하는 것이 자랑스럽고 대견스러웠다.

그 후 우리 가족이 캐나다로 이주를 하게 되었을 때 고국을 떠나게 된 아픔보다 착순이 아줌마와 헤어지는 것이 더 슬펐다. 거의 6~7년이 지나서 다시 우리가 타향살이를 정리하고 한국에 다시 돌아왔을 때, 그녀는 신문에 실린 내 기사를 읽고 나를 찾아왔었다. 우리 집에서 일할 때 교회 나가기를 여러 번 권고했었다. 예수님을 소개할 때마다 ‘나중에 믿을게요’ 하더니 “원장님과 헤어진 후에 제가 예수를 믿게 됐습니다. 저더러 꼭 예수 믿으라고 하셨죠? 지금 너무 행복해요. 저는 집사가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우리는 얼싸안고 눈물지며 기도했다. 우리는 늘 조급하여 평정심을 잃고 우리 견해대로 판단할 때가 많지만 만사에 때가 있다.

아줌마는 지금도 외롭고 힘든 고아들과 노인들을 찾아다니며 선행을 직업으로 삼고 살아간다니 얼마나 훌륭한가. 착순이 아줌마는 맡은 자의 할 일은 충성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 아줌마다. 우리 주위에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면 무성한 잡초 속에서도 뿌리가 오염되지 않고, 거짓이 팽배한 사회 속에서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 때문에 이 국가 이 민족이 지탱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치 살아있는 물고기는 결코 바닷물 속에서도 그 몸에 그 살 속에 짠물이 배지 않는 것처럼, 착순이 아줌마는 이 사회에 꼭 필요한 어머니상 아름다운 이웃이며 어두움을 비추는 천사가 분명하였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 15 : 16 상) 지금은 어디에 사시는지,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은 착순이 아줌마, 이 글이 아줌마에게 전달되길 간절히 바란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8)

<감꽃 목걸이>

유년 시절 우리 집 뒷마당에도
감나무가 있었다
탱글탱글 하얀 꽃 열매 맺어
탐스런 감 열리기까지
장대비 얻어맞고 회초리 바람에 흔들려
작은 꽃들 떨어졌다
유격훈련병으로 남겨진 꽃

고통을 모르는 듯
눈물 줄기 밀어 올려 꽃을 빚었을까
국제 마라톤 우승이라도 한 듯
감꽃 월계관 쓰고 감동하던 시간
한나절 내내 시들지 않아
하나 둘 꽃 따먹던 행복한 날

생생한 금빛 추억
시큼 상큼 달달한 맛감
꽃은 봄을 데려왔다
꺾인 자태로 묵화 치신 아버지
감나무 가지 타면 앉은뱅이 된다는데
항아리감 빚느라 약한 속뼈
숭숭 구멍이 났을까

오늘은 작은 감꽃 목걸이가
빛나고 있다

◇김국애 원장은 서울 압구정 헤어포엠 대표로 국제미용기구(BCW) 명예회장이다. 문예지 ‘창조문예’(2009) ‘인간과 문학’(2018)을 통해 수필가, 시인으로 등단했다. 계간 현대수필 운영이사, 수필집 ‘길을 묻는 사람’ 저자. 이메일 gukae8589@daum.net
정리=

전병선 미션영상부장 junbs@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