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감독 며칠 후 사망한 교사, 내 기억은 그때에 멈춰 있다
[김선희 기자]
선생님, 안녕하세요. 공교육 교사로서 한솥밥 먹는 사이라고 생각하여 실례를 무릅쓰고 편지글을 드립니다. 몇 분 시간을 내어 요즘의 제 심경이 담긴 이 글 읽어 주신다면 참 감사하겠습니다.
1999년 저의 교직 4년 차에 한 동료를 하늘나라로 보냈습니다. 그녀도 저와 같은 저연차 교사였는데 학업에 부적응하는 학생들에게 수업으로 환영받지 못하는 걸 괴로워하여 잦은 우울감을 호소했습니다. 당시 저희가 근무하던 곳은 비평준화 지역의 입학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비인기 고등학교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중학교 1학년 수준의 학습력도 갖추지 못한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수업으로 고민하는 그녀에게 아이들 수준에 맞춰 구성하면 어떻겠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내신에서 높은 등급을 받기 위해 학업 수준이 꽤 높은 아이들도 소수 입학하다 보니 그런 학생들의 반발이나 학부모들의 민원이 만만치 않다며 그녀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소위 주요 교과로 불리는 입시 교과의 고충을 제가 다 헤아리지 못했기에 더 해줄 말이 없었습니다.
사실은 학교에 있는 내내 수업에 적응하지 못하고 몸을 비틀거나 엎드려 자던 아이들이 비입시 교과인 음악 시간만 되면 봇물을 터뜨리듯 과하게 활개 치니 저 또한 피로도가 매우 높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사회적으로 정신과 치료에 대해 덮어놓고 터부시하는 분위기라 진단조차 받아보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저와 많은 동료들이 크고 작은 우울에 시달렸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와 제가 타지역으로 수능 감독을 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3년 이하의 교사들은 감독에서 제외되었습니다. 해당 지역의 감독 교사 확보가 불충분했는지 우리 두 사람이 막내라는 이유로 2시간 거리의 타지역으로 차출되었습니다. 수능 당일 새벽 출근이 걱정된 우리는 감독 교사 연수를 받고 숙소를 정해 함께 자기로 했습니다.
일찍 잠자리에 누웠지만 조금의 실수도 용납받을 수 없다는 겁박으로 똘똘 뭉친 감독관 연수로 인해 너무 긴장한 나머지 그녀는 한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뒤척이는 그녀의 옆에서 저도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거의 날밤을 샜습니다. 감독교사가 부족했는지 젊은 교사라는 이유로 저와 그녀는 쉬는 시간도 없이 1교시부터 마지막 교시까지 연달아 배치되었습니다.
저는 녹초가 되어 귀가한 후 호되게 몸살을 앓고 다음 날 다른 학교로(겸임교: 학교간 교과 시수의 불균형으로 인해 일부 다른 학교 수업을 지원하는 제도)로 출근했습니다.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에 학교에 가니 그녀가 연락도 없이 이틀째 출근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불길한 예감이 든 그녀의 직속 부장님과 교직원 두 분이 자취 집에 찾았을 때는 이미 그녀가 몸살 감기 약을 먹으며 홀로 앓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뒤였습니다.
수능 즈음이면 어김없이 트라우마
이후 제 기억의 시계는 수도 없이 수능 당일 쉬는 시간으로 돌아가곤 합니다. 얼굴빛이 창백해질 만큼 힘들어하는 그녀를 보고 놀라서 감독 교체를 권했지만 책임감이 강한 그녀는 누구에게도 민폐 끼치기 싫다며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첫 수능 감독으로 인해 저 또한 너무 긴장한 데다 체력도 부쳐 더 이상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떠오를 때마다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며 스스로를 위로하곤 하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수능 즈음이면 어김없이 트라우마에 시달려 왔습니다. 알고 보니 저뿐 아니라 거의 모든 교직원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괴로워했더라구요.
교직 20년 차에는 자신의 아이가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며 저희 반 교실에 칼을 들고 가서 가해자를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악성 민원인을 몇 주간 상대하다가 번아웃이 되어 몇 개월간 학교를 떠나야 했던 일도 있습니다.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어 다시 아이들 앞에 설 자신이 없었지만 두 아이의 부모기도 했기에 여러 방편으로 치료에 힘써 이전에 비해 형편없이 약해진 몸이나마 교직을 이어올 수 있었습니다. 생사의 기로에 놓였던 큰 고통이 지나가자 삶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더 소중히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 교사 인생의 커다란 트라우마 두 가지가 모두 겹치는 이번 서이초 교사의 순직을 접하며 다시 몸과 마음을 끙끙 앓게 됩니다.
▲ 서울 양천구 A초등학교 교사의 사망(8월 31일) 소식이 1일 오후 알려진 가운데, 다음 날인 2일 오전 해당 학교 앞에 수많은 추모 화환과 추모객의 편지가 쌓여 가고 있다.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온 교사들이 껴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
ⓒ 복건우 |
우리가 가르친 많은 청소년과 청년들이 삶을 비관하며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자포자기나 은둔, 심지어 반사회적 범죄로 사회적 절연을 택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된 반성 없이 지속되는 극심한 경쟁교육 체제로 인해 적지 않은 아이들이 학업을 고통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로 인한 부모들의 불안도도 이미 위험 수위를 넘긴 지 오래입니다.
뿌리부터 병든 학교 체제의 불신으로 인한 온갖 부작용을 온 사회가 함께 고민하기보다 힘없는 교사들에게만 떠넘겨 날로 가중되는 겹겹의 책임으로 학교는 과부하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급하게는 교권 보호를 위한 법규의 개정이 필요하고 나아가 경쟁 체제에서 벗어나려는 공교육 회복이 절실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번 기회에 현장 교사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되찾아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선생님이 반드시 저와 같은 생각이나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마다의 이유로 지금 선 자리에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계심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상처 입은 한 교사가 무력감에 홀로 무너지지 않기 위해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안도감을 얻고자 드리는 글이니 등을 두드리듯 그저 가만히 읽어 주십사 기대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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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본인 계정의 페이스북에 오늘자로 포스팅한 글의 일부를 수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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