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은, 박제된 공동체의 박물관 [마을학 各論]

정기석 2023. 9. 4.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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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공동체] 마을공동체의 생존동력은 사회적 자본

[정기석 기자]

▲ 제주공항  제주도에서는 여당도 아니고 야당도 아니고 ‘괸당’이라야...
ⓒ 정기석
제주도에는 육지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공동체 사회적 자본이 있다. '괸당'이라고 부른다. 화산점인 제주도는 농경지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경작 중심이 아닌 노동력 중심의 농업경제 구조가 형성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노동력 교환과 동원을 보다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지연(地緣)이 유난히 강조되었다. 또 한정된 범주의 친족집단으로 토지이용을 제한하지 않았다. 보다 광범위하게 개방된 범주로서 공동체 구성원(괸당, 궨당)의 노동력 교환이 가능하게끔 공동체가 함께 노력했다.
이로써 제주 공동체가 척박한 자연환경을 극복하며 생활공동체를 유지, 발전할 수 있었던 기본적인 동력을 확보했다. 이처럼 제주도 특유의 사회적 자본의 한 형태로서 '괸당'은 그 사회적 관계성과 집단의 강한 사적(私的) 신뢰에 바탕을 둔 '우리성'(weness)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괸당'은 육지의 부계 혈연 중심의 친족체계와 달리 한 개인을 중심으로 형성된 인간관계의 망을 이루었다.
 
▲ 성산 어촌계  제주도 성산읍 어촌계의 상호부조·친목·통합·공동이익을 위한 ‘해녀탈의장’
ⓒ 정기석
 
계, 두레, 품앗이는 마을공동체의 동력

우리 마을공동체는 계(契)라는 사회적 자본을 토대로 발달하고 전승되었다. '계'는 전통적으로 농촌주민의 관혼상제 관련 의례를 수행하기 위해 자생적으로 발생하고 유지된 협동집단을 말한다. 계원의 상호부조·친목·통합·공동이익 등을 목적으로 일정한 규약을 만들고, 그에 따라 운영되었다.

어쩌면, 우리 농촌마을의 계는 공동체라기보다는 이익집단 내지 기능집단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촌락이나 도시와 같은 지역사회 자체가 아니라, 지역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특정한 이해 또는 여러 가지 이해를 공동으로 추구하기 위하여 조직된 하나의 기능집단의 일종으로 규정할 수 있다.

계는 경제·정치·복지·종교·교육·오락의 6개 범주로 분류할 수 있다. 생산·식리·공동구매 등을 목적으로 하는 경제적 집단은 농계(農契)·보계(洑契)·식리계·구우계(購牛契), 동리의 공공비용의 마련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적 집단은 동계(洞契)·보안계(保安契), 계원의 복리 및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하는 복지적 집단은 혼상계(婚喪契)·혼구계(婚具契) 등이다.

조상의 제사 혹은 동제를 목적으로 하는 종교적 집단은 종계(宗契)·문중계·동제계, 계원 자제의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적 집단은 학계(學契)·서당계, 계원의 친목과 오락 등을 목적으로 하는 친목·오락 집단:시계(詩契)·문우계(文友契)·동갑계·유산계(遊山契) 등이다.

'두레'는 주로 중남부지방 논농사 지대에서 한 마을의 성인남자들이 의무적으로 협력하며 농사를 짓거나, 부녀자들이 서로 협력하여 길쌈을 하던 공동노동조직이다. 주로 남자들이 모내기·김매기처럼 단기간에 대규모의 노동력을 집약적으로 투입해야 할 때 두레는 관행화되었다. 특히 토지가 촌락공동체에 속했으므로 공동경작·공동분배를 했다.

두레의 종류는 성별에 따라 남자두레와 여자두레로 나뉘었다. 발생의 선후와 세력의 우열에 따라서는 두레와 제자두레, 또는 형두레와 아우두레, 세대별로는 청년두레·장년두레·노인두레, 농악의 유무에 따라 농악 있는 두레와 농악 없는 두레, 크기에 따라 작은 두레(6~10명 구성)와 큰 두레로 구분했다. 두레라는 명칭으로 공동노동을 하더라도 아무런 강제성을 띠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을 주민 전체가 참여하는 것도 아니다.

두레의 임원 구성은 대개 전체 통솔자인 행수(行首) 또는 황수(皇首)라고도 하는 지휘자 1명, 행수의 보좌인 도감(都監) 1명, 작업의 진행을 지휘하는 수총각(首總角) 1명, 규약에 따라 두레꾼의 행동을 감시하는 조사총각(調査總角) 1명, 기록과 회계를 맡은 유사서기(有司書記) 1명, 방목지(放牧地)의 가축을 돌보며 가축으로부터 논밭을 보호하는 방목감(放牧監) 1명으로 구성했다.

두레의 조직과 임원이 동계(洞契)와 중복되는 경우에는 범공동체적 조직인 동계가 행정·사법의 기능 외에 노동조직적인 기능도 수행했다. 예로부터 두레에 의한 공동노동은 모내기·물대기·김매기·벼베기·타작 등 경작 전 과정에 해당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원형적인 두레는 없어지고 변형적인 형태로 부분적으로 존재하는 실정이다. 이와 같은 두레의 소멸은 토지사유화의 발달과 화폐경제가 지배하는 자본주의사회의 발전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일 것이다.
 
▲ 남해 독일마을  남해 독일마을 공동체의 구심점, <독일마을행복공동체 영농조합법인>
ⓒ 정기석
 
공동체 사회적 자본은 화폐경제, 임금노동으로 대체

'품앗이'는 일을 서로 거들어 주어 품(노동력)을 지고 갚는 교환노동을 말한다. 인간의 노동력은 남녀노소 공히 원칙적으로 모두 대등하다는 가정 하에 품앗이를 짜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가정이 품앗이를 성립시키는 근본적인 가치관념이다.

두레가 촌락공동체 단위의 집단적 공동노동이라면, 품앗이는 개인적 교분으로 맺어진 촌락 내의 소집단 성원 사이에 이루어지는 공동노동으로 친지 간에 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품앗이를 짜는 개인이나 소집단 상호간에는 그 선행조건으로 상호부조의식 또는 의리라고 할 수 있는 정신적인 자세와 때로는 처지가 서로 비슷해야 품앗이를 짤 수 있다는 믿음과 관념들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품앗이는 시기와 계절을 가리지 않고, 또 작업의 종류에도 관계없이 농가에서 자가의 힘만으로는 노동력이 부족한 작업을 할 때 수시로 조직되었다. 오늘날의 품앗이는 근대화되는 농촌사회에서 환금의식의 발달로 인해 필요성과 존재가치를 잃고 있다. 품앗이의 바탕에 깔린 인력에 대한 평등의식은 보다 합리적인 타산성이 작용함으로써 임금노동으로 대체되고 있는 것이다.

정리해보면, 우리 농촌마을공동체의 자생적 지연집단으로서 '대동계'는 공동자산 관리, 공동시설 관리, 공동제사 집전에 필요한 경비 염출, 마을 노임 수준 결정 등 생활공동체적 기능, 마을 공유 공동자산 사용권 허용, 기금 대출 등 사회복지 차원 구제기능 등의 생산적 자원 제공 기능, 마을 공동제례 행사 집전이라는 제사공동체 기능을 감당했다.

1890년대 이후 전통적인 대동계 조직은 면 행정과 연계된 이정(里正)을 설치, 이정이 마을의 대동계장 겸직했다. 일제는 1917년에 이정제를 폐지하고 구장(區長) 제도를 도입하고 1948년에는 각 자연부락 행정리 제도를 도입, 마을단위로 이장(里長)을 배치했다.
 
▲ 전의사회적협동조합  세종시 전의면 마을공동체사업의 주민직영 책임주체 <전의사회적협동조합>
ⓒ 정기석
 
자생적·경제적 이익집단으로서 '수리계'는 농업용수의 원활한 공급을 위해 보(洑) 유지 및 관리, 용수로 정비 등 협동체제를 구축하는 기반이었다. 자생적·사회적 이익집단은 상사 공동 대처를 위한 물적, 정신적 지원 및 공동체성 함양 목적의 상사계, 자녀 결혼 공동 대처를 위한 물적, 정신적 지원 및 친목 도모 목적의 혼인계, 또래, 지연, 학연, 혈연, 사회적 지위 등 중심 친목 도모 목적의 친목계가 대표적이다.

비자생적·사회적 이익집단은 새마을부녀회, 새마을청소년회, 노인회 등을 들 수 있다. 새마을부녀회는 1977년 생활개선회, 부녀교실, 가족계획 어머니회, 새마을부녀회 등을 통합한 20~60세의 부녀 조직이다. 새마을청소년회는 1977년 4-H 구락부를 개칭한 것이다. 노인회는 65세 이상 노인들의 여가시간 활용 및 친목 도모 목적이다.

그러나, 오늘날 마을에는 공동체 조직과 간판은 있으되 공동체를 이루는 구성원, 사람은 없다. 마을은, 박제된 공동체의 박물관으로 전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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