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르네상스]아무도 모르던 모래섬…정치금융 1번지까지

김동표 2023. 9. 4.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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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한강엔 백사장이 있었다. 북쪽엔 현재의 용산구 동부이촌동에서 시작해 마포구 당인리에 이르기까지, 남쪽에는 노량진에서 양화대교 인근까지 넓게 퍼져있었다. 한강의 백사장 면적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880년 일본 육군측량부의 것으로, 약 250만평에서 300만평에 달할 것으로 추정됐다. 이들 백사장은 평상시에는 모습을 드러내다가 홍수만 오면 수면 아래로 모습을 감췄다. 그런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모습을 감추지 않는 단 두 곳의 백사장 섬이 있었다. 하나는 밤섬, 그리고 하나는 여의섬이었다. 모두 오늘까지도 존재하는 그 섬들이다. 그러나 그때의 모습은 지금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사람보다 동물이 많던 모래섬…비행장으로 이름을 알리다

1945년 미 공군이 촬영한 여의도 전경 [사진출처=서울역사아카이브]

여의도는 조선 전기 이래 주로 국가가 관리하는 짐승을 기르는 목축의 공간으로 이용됐다. 조선 세조 때 한명회가 지은 정자 압구정(狎鷗亭)이 현재와는 달리 처음에는 여의도에 있었다가 나중에 동호로로 옮겨갔다. 여의도엔 대를 이어 정착해 사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폐쇄적인 섬의 극소수 공동체에 불과했다.

존재했으나 누구도 기억하지 않던 섬, 여의섬이 한반도에서 본격적으로 호명된 것은 나라가 일제에 넘어간 이후부터였다. 1920년 5월, 이탈리아 로마에서 출발해 도쿄로 향하던 2대의 이탈리아 공군 비행기가 여의도 간이비행장에 임시로 착륙했다. 하늘을 나는 물체가 서울에 닿는다는 소식은 당시에도 화제였는데, 착륙 시간이 알려지자 10만여 서울시민이 여의도로 몰려들었다. 여의도에 이렇게 많은 사람의 발길이 닿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일제가 간이비행장으로 건설한 여의도 비행장은 세계 2차대전을 거치면서 본격적인 비행장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일제가 물러간 후, 미군은 비교적 잘 갖춰진 여의도 비행장을 미 공군기지의 하나로 쓰기로 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여의도는 사실상 비행장으로서 기능했다. 1967년 대한기술공단 작성한 ‘침수지구(여의도) 토지이용기본계획 및 예비설계보고서’에 따르면, 여의도의 65만평가량을 공군이 사용하고 있었다.

◆여의도 새역사의 시작 ‘윤중제’ 건설

비만 오면 범람하던 한강은 서울의 골칫거리였다. 1966년 수해는 특히 심했다. 어떻게든 한강을 다스려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다. 근본적인 방법은 한강에 제방을 쌓는 일이었다. 1966년 하반기에 서울시는 2개의 용역보고서를 발주한다. 두 보고서는 한강변에 제방을 쌓는 것은 물론, 여의도에도 제방을 쌓아 택지로 활용해야 한다고 공통으로 짚고 있었다. 이후 서울시와 건설부의 논의 속에서 3개 사항이 합의된다. ▲여의도는 샛강을 그대로 두고 윤중제를 쌓는다. ▲한강본류의 넓이는 1300m를 유지한다. ▲윤중제의 높이는 강바닥에서 15.5m, 제방의 너비는 21m로 한다. 제방 안에 조성되는 택지의 높이는 강바닥에서 13m로 한다.

홍수를 막기 위한 고민에서 시작된 사업이니만큼, 여의도에 둑을 쌓아도 강물의 흐름엔 지장이 없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려면 밤섬을 제거해야 했다. 밤섬이 끼어 있는 구간은 한강 너비 1300m 규정을 지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둑을 쌓으려면 엄청난 양의 석재도 필요했다. 밤섬 폭파는 강 너비를 보장하고, 석재도 코앞에서 구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1968년 2월 10일, 밤섬이 폭파됐다. 11만4000㎡ 분량의 잡석이 채취됐다. 트럭으로 4만대 분량이었다. 윤중제 건설은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연 5만8400대의 중장비, 연인원 52만명이 동원됐다. 모래와 잡석을 실어 나르는 트럭은 24시간 쉬지 않고 움직였다. 트럭의 먼지 때문에 대낮에도 라이트를 켜고 다녀야 했다. 트럭 기사가 밤샘 운전 끝에 교통사고를 내는 일도 있었다. 1968년 6월 1일, 보슬비가 내리는 날 윤중제가 완성됐다.

◆김수근이 그린 ‘꿈의 여의도’

1969년 김수근 등이 입안한 여의도 도시계획도 [이미지출처=서울역사아카이브]

윤중제 건설로 만들어진 87만평의 드넓은 땅을 채우는 것은 또 다른 난제였다. 당시 김현옥 시장이 호출한 사람은 건축가 김수근이었다. 고(故)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김수근의 여의도 설계에 대해 "엄청난 것이었다. 이상적이라는 표현을 넘어서 오히려 환상적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라고 했다. 그 꿈을 요약하자면 ▲서울-여의도-영등포-인천을 연결하는 선형계획의 완성을 위한 여의도 ▲행정·입법·사법이 한자리에 모이는 여의도 ▲높이 7m의 보행자 전용 인공 데크를 갖춘 여의도 ▲고속-저속-보행으로 층위화된 도로체계의 여의도였다. 지금 봐도 과감한 생각들은 당대에도 실현 가능성, 재원의 측면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김수근의 설계는 첫발을 제대로 내딛기도 전에 든든한 후원자를 잃고 만다. 1970년 4월 8일, 마포구 와우산에 들어섰던 시민아파트 한 동이 무너져내린 것이다. 33명이 콘크리트 잔해에 깔려 죽었다. 김 시장은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게다가 박정희 대통령의 여의도 광장건설 지시 또한 김수근의 설계 원안을 파괴했다. 김수근의 구상은 여의도 한복판에 광장을 조성해 블록 간 유기적으로 연결하자는 것이었으나, 박정희의 지시는 ‘아무것도 없는 드넓은 광장’이었다. 김신조 등 무장 공비가 서울을 기습하고,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원산 앞바다에서 피랍되던 시기였다. 여의도 광장은 전시에 전투기가 뜨고 내릴 수 있는 군사시설이어야 했다.

김수근의 여의도 입체계획은 1971년에 들어서며 평면계획으로 변경된다. ▲주거지역 확대·상업지구 축소 ▲광장 서쪽을 시청사 부지로 정하고 서측은 모두 상업지구화 ▲주거지역은 모두 고밀도·고층화 ▲서울에서 유일한 통행금지 해제지역 등이다. 다층위로 구성된 교통망, 동서 지역 간의 유기적 연결은 한낮 꿈으로 끝났다.

◆허허벌판, 파산 위기의 여의도…시범아파트·증권거래소가 이룬 반전

여의도

새로운 계획이 나왔지만, 여의도의 장래는 어두웠다. 1970년 9월 15일 착공해 이듬해 10월 30일 완공한 24개동 시범아파트에는 누구도 입주하려고 하지 않았다. 버스도 들어오지 않았고, 주변은 모래가 날리는 사막과도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최대 규모에 최고시설’을 내세운 시범아파트는 이내 입소문을 탔다. 중앙공급식 난방이 국내 최초로 도입됐고, 엘리베이터가 있는 고층아파트도 국내 최초였다. 특수학군 설정은 여의도 아파트단지 형성에 결정적 계기였다. 아파트가 건설되고 주민들이 늘어나자 구매력을 노린 상점들이 잇따라 들어섰고 시가지가 형성됐다. 1975년 8월 15일 국회의사당이 준공됐고, 이듬해 한국방송공사(KBS)가 준공됐다. 동양방송, 문화방송, 서울방송도 여의도에 둥지를 틀면서 모래벌판은 어느새 방송의 메카가 됐다.

여의도 비상의 결정적 계기는 증권거래소와 증권협회의 여의도 입성이었다. 1979년 6월 말 15층의 증권거래소 건물이 준공됐고, 7월 2일부터 새 증권거래소가 문을 열었다. 여의도가 금융·증권업의 중심으로 선 역사적인 날이었다. 이어 1979년 11월 16일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 건물 준공식이 거행됐다. 여의도는 1990년대 명실상부 ‘한국의 맨해튼’으로 거듭난다. 1993년 한국투자신탁(현 한국투자증권)을 시작으로 대한투자신탁(하나금융투자), 유화, 동양(유안타), 서울(유진투자), 보람(하나금융투자), 제일(한화투자), 선경(SK), 쌍용증권(신한금융투자) 등이 여의도광장 인근 제2증권타운에 모여들었다. 5000년간 척박했던 모래섬이 한국 정치·경제·금융의 중심지로 다시 태어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30여년이었다.

김동표 기자 letmei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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