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퇴진' 넘어 새로운 전망이 필요하다

최민 2023. 9. 4.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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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에 선 시민단체②] 질 수도 이길 수도 있겠지만 다시는 여기로 돌아오진 않을 거야

[최민]

저는 1997년 대학에 들어가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때가 김영삼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였으니, 제가 "정권 규탄" 혹은 "정권 퇴진"을 외치면서 이름을 부른 정부가 이제 7번째나 되네요. 그런 저에게 '윤석열 퇴진'의 구호는 시민사회운동의 전망이나 대중의 열망을 담을 수 없는 낡은 틀로 느껴집니다.

물론 시민사회단체가 정권에 대해서 습관적으로 반대만 하기 때문에 그동안 매번 규탄과 퇴진을 외친 것은 아닙니다. 정권 퇴진 요구는 단순히 대통령만 바꾸자는 요구가 아니라 사회 변혁의 열망을 반영하는 구호였습니다.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에 대해 퇴진을 외칠 때 그 구호의 뜻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분쇄'였습니다. 박근혜 퇴진 촛불이 타오른 이유 역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분노만은 아니었습니다. 부패 재벌로 대표되는 불평등한 경제 체제를 바꾸고 사람들이 처한 위험에 무기력한 국가 체제를 바꿔야 한다는 열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윤석열퇴진운동본부가 제안되었을 때 저는 더 많은 시민을 운동에 참여하게 만들자는 마음이 들지않았습니다. 반노동 정책, 한반도 전쟁위기, 민생 외면, 여성·성평등·젠더 지우기 등 윤석열정부가 퇴진할 이유는 차고 넘치는데도 말입니다. 윤석열 퇴진 촛불집회에 매주 수천수만 명이 모이는데도 '다른 세상을 만들자'는 열망이 집회 장소를 넘어 한국 사회 곳곳에 확산된다고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2016~17년의 촛불 집회 때와는 달리 지금 사회의 주된 정서는 변화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냉소입니다. 이렇게 냉소가 퍼진 것은 '대통령을 끌어내려도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경험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촛불로 정권을 바꿨는데도 소득과 자산의 격차는 더 커지고 재난의 위험은 낮은 곳으로 흘렀습니다. 국가의 책임 있는 인사들은 투기와 입시 비리, 권력형 성폭력을 일으켰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 속에서 사람들은 '정권을 퇴진시켜도 결국 두 개의 기득권 정당 중 다른 한쪽이 집권했을 뿐 우리의 삶과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는 환멸감을 느낀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민사회단체는 '정권 퇴진' 구호만으로 과연 변화를 바라는 대중을 설득할 수 있을까요? 좋은 세상을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 세상을 바꾸어 나가는 것이 운동의 목표라고 할 때, 지금의 상황은 시민사회운동의 실패를 보여주는 것 아닐까요?

'정권 퇴진' 이후 더 커진 냉소… 시민사회운동 역시 무기력했습니다

지난 20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렇게 갑갑한 현실이 드러났습니다. 사람들은 '정권 교체'와 '정권 재창출' 중 선택을 강요받았습니다. 국민의힘과 윤석열 후보가 이끄는 정부가 지난 5년을 이끈 문재인정부보다 나을 리 없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과 이재명 후보 역시 차악의 후보로 고려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현실을 지켜보면서 시민사회운동에 몸담은 사람으로서 저에게는 우리의 한계를 뼈아프게 돌아보는 평가가 필요했습니다. 박근혜 정권 퇴진 이후 사람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은 것이 단지 정부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시민사회단체와 시민사회운동 역시 무기력했습니다.

경제정책으로만 예를 들자면, 기존의 정권이나 기득권 정당은 어느 쪽이든 대기업 지원에 힘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소득과 자산 격차가 심해졌고, 사람들의 불안이 커지고 경쟁이 심화하면서 사회적 신뢰가 붕괴되었습니다.

이에 맞서 시민사회단체는 재벌기업을 감시하고 부동산 정책을 비판했습니다. 당면한 현안에 대응하면서 부지런히 정책을 제안하고 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각각의 의제와 현안에 대응하는 것으로는 더 나은 사회의 대안과 전망을 만들 수 없었습니다. 단체들은 촛불을 들었던 시민에게 '우리가 바랐던 세상으로 함께 가고 있다'는 전망을 주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지금 시민사회단체의 진짜 위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느낀 활동가들이 다른세계로길을내는활동가모임(이하 길내는모임)을 만들었습니다. 길내는모임은 20대 대선에서 '같은 현실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다른 미래를 만들어갑시다'라는 성명을 제안했고, 저를 포함한 활동가 763명이 참여했습니다. 우리는 "기득권 정당과 공동 전선을 만드는 대신 제도 개혁을 넘어선 체제 전환을 정치적 목표로 삼아 대안을 만들고 세력화해 나가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물론 체제 전환을 만드는 과정에 매끄러운 로드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선거 이후 꾸준히 토론회를 열고 다양한 활동가들을 만나왔습니다. 그렇게 1년이 지난 지금, 조금 부족해도 지금 여기에서 체제 전환 운동의 세력화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윤석열정부 1년을 맞은 지난 5월 여러 시민사회단체가 내린 평가의 공통점은 '퇴행'과 '후퇴'였습니다. 물론 윤석열정부의 정책은 문재인정부와 차이가 큽니다. 하지만 '퇴행'이라는 진단만 내려서는 마치 그전까지 사회가 크게 진보한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전에 나아갔던 만큼이라도 되돌리는 것이 우리의 목표인 것처럼 여기게 하고 결국 우리의 상상을 가둘 위험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저는 시민사회단체와 시민사회운동은 계속 침체할 것이고, 다음 선거에서도 지난번 선거와 같은 상황이 반복될 것 같은 위기의식을 느낍니다.
 
 2022년 9월 열린 기후정의행진에서 참가자들이 손피켓을 들고 있다.
ⓒ 전쟁없는세상
 

열심히 싸웠는데 허무한 우리, 이제 새로운 길을 찾자

그래서 저는 지금 여기서 체제 전환 운동의 세력을 키우자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단지 퇴행을 바로잡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와 다른 길을 가자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기후위기로 그 한계가 명백히 드러난 탄소 자본주의로부터의 전환, 신자유주의가 유효 기간을 다했으나 뚜렷한 위기 타개책은 보이지 않는 세계 금융자본주의로부터의 전환, 미국과 중국의 신자유주의적 공생 관계가 한계에 다다르면서 형성된 국제적 긴장과 대립 구도로부터의 전환이 매우 절실한 시기입니다. 노동위기, 기후위기, 전쟁/평화위기, 민주주의 위기 등은 서로 연결되어 복합적으로 작동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총체적인 삶의 위기를 많은 사람이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이 복잡한 위기와 모순에 문제제기하고 대안을 내놓는 활동은 개별 단체나 각 영역의 운동이 각자의 힘만으로 해낼 수 없습니다. 공동의 전망을 갖고 공동의 실천을 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다른 전망, 새로운 전망을 가진 사람들이 드러나야 합니다.

물론 누군가 앞장서서 '체제 전환'의 깃발을 흔들어도 함께 모이기 어려운 것이 현재 한국 시민사회단체와 시민사회운동의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단지 깃발만 드는 것이 아니라 함께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 계기를 만들면 어떨까요?

예를 들어 기후정의는 공공성과 에너지 전환의 과제만이 아닙니다. 기후재난에 취약한 주거와 도시를 바꾸는 과제입니다. 또한 노동자의 몸과 마음을 갉아먹는 과로사회를 바꾸는 과제입니다. 더 나아가 이런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인간을 장애인·여성·노인·이주민 등 여러 등급의 노동력으로 구분해 차별하는 사회를 바꾸는 과제입니다.

그래서 오는 9.23 기후정의행진에서는 단순히 '지구의 온도' 문제가 아닌 다양한 공동과제를 선언하려 합니다. 하루의 공동행진으로 끝내지 않고, 공공성 강화를 요구하는 노동자의 파업 투쟁에서, 성차별과 성폭력을 종식시키자는 여성 투쟁에서, 반차별과 인권의 이름을 건 투쟁에서 지속적인 공동활동으로 만들어가려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개별 운동의 연대를 넘어 체제 전환 운동의 공동 실천을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의제만 들고 싸우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기존 체제를 조금 낫게 유지하기 위한 '정책 제안 파트너'에 머물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서로의 의제를 엮어 함께 나서면 새로운 대안을 만들고 전망을 세워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이를 통해서 시민사회운동의 위기를 넘어서는 새로운 실천이 시작되지 않을까요?

얼마 전 길내는모임 토론회 '반-윤석열전선을 넘어서는 시민사회운동의 다른 전선은 어떻게 가능한가'에서 발제를 맡았던 인권운동사랑방의 미류 활동가는 "우리는 질 수도 이길 수도 있겠지만 다시는 여기로 돌아오진 않을 거야"1)라는 노래 가사로 발제를 마무리했습니다. 여전히 모호하고 부족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우리가 떼는 첫걸음은 우리를 다른 자리로 데려갈 것입니다.

1) 영어 원문은 "We may lose and we may win. but we will never be here again." 이글스(eagles)의 노래 'Take It Easy'의 가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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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 최민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 다른세계로길을내는활동가모임 구성원. 이 글은 참여연대 소식지 <월간참여사회> 2023년 9월호에 실립니다. 참여연대 회원가입 02-723-4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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