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전범 재판이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이유 [가자, 서쪽으로]

김찬호 2023. 9. 4.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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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뉘른베르크는 나치 성장의 상징

[김찬호 기자]

뮌헨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 뉘른베르크에 들러 보았습니다. 작은 도시들에 머물러 보고 싶어서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이름이 눈에 익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뉘른베르크라는 도시의 이름이 말이죠.

물론 뉘른베르크라는 지명을 들어본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뉘른베르크 재판'이었죠. 2차대전이 끝나고 나치 전범을 심판하기 위해 치러진 재판이었습니다. 뮌헨에서 나치가 탄생하는 현장을 보았다면, 뉘른베르크에서 그 마지막을 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뉘른베르크 재판 기념관
ⓒ Widerstand
사실 뉘른베르크는 꼭 나치의 마지막 순간만을 담고 있는 공간은 아니었습니다. 뮌헨만큼이나 나치 집권의 발판이 되었던 도시이기도 했죠. 뉘른베르크 역시 바이에른 주에 속해 있습니다. 바이에른에서는 뮌헨 다음으로 큰 도시죠. 
특히 뉘른베르크는 1927년부터 나치당의 전당대회가 열린 도시이기도 합니다. 뉘른베르크는 큰 도시이면서, 당시 독일 영토의 중앙부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당시 독일은 지금과는 다르게 동쪽으로 더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거든요. 지금은 폴란드의 서부 지방이 된 땅이, 그 당시에는 독일의 영토였습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중세 신성로마제국에서 영주들이 모여 황제를 선출하던 장소가 바로 뉘른베르크였다는 것입니다. 고대와 중세의 상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던 나치의 선전 당국이 이러한 점을 놓칠 리 없었겠죠.
 
 뉘른베르크 구시가
ⓒ Widerstand
나치당은 매년 뉘른베르크에서 대규모의 전당대회를 열었습니다. 이 전당대회는 나치당의 거대한 규모를 보여주는 선전의 장으로 활용되었습니다. 뉘른베르크도 나치당의 지지세가 강한 바이에른 지역이었으니, 방해를 받을 우려도 없었겠죠. 
특히 나치당이 집권한 뒤, 1933년에 벌어진 당대회는 나치의 성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장이었습니다. 전당대회에는 50만 명이 운집했습니다. 나치당이 독일 남부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고, 이제는 전국 단위 정당이 되었다는 상징이었죠. 사람들은 미디어로 전해지는 나치당의 규모에 압도되기 시작했습니다. 나치의 권력은 점차 공고해져 갑니다.
 
 완공되지 못한 채 버려진 나치 전당대회장
ⓒ Widerstand
결국 뮌헨이 나치 탄생의 상징이라면, 뉘른베르크는 나치 성장의 상징이었습니다. 나치당은 뉘른베르크를 정치적 중심지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수도였던 베를린이 아니라, 뉘른베르크에 나치당의 중심을 두고자 한 것이죠. 
물론 이런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전당대회장을 중심으로 설계한 거대한 건물군은 곧 시작된 전쟁과 패전으로 인해 대부분 완공되지 못했죠 지금도 뉘른베르크에는 나치의 전당대회장이 폐허가 되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전쟁의 상처가 쌓인 뉘른베르크는, 곧 나치 전범을 처벌하는 재판의 현장이 됩니다.
 
 전범재판이 열린 재판장
ⓒ Widerstand
나치 전범을 처벌하는 재판이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나치당의 전당대회가 열리던 선전의 도시라는 점이 가장 큰 상징성이겠죠. 하지만 한편으로는 4개 연합국 가운데 미국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에서 재판을 열고자 하는 의도도 컸을 것입니다. 실질적으로는 이곳에 큰 재판소와 감옥 시설이 있다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고요. 
전쟁범죄를 처벌하기 위한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기소된 피고는 모두 24명이었습니다. 이 가운데 12명이 사형 판결을 받았죠. 인류사 최대의 전쟁을 정리하는 재판 치고는 작은 규모였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았죠.

뉘른베르크 재판은 전쟁범죄를 재판의 형태로 처리하고 정리한 역사적인 재판이었습니다. 배상금을 지급하고, 상대방의 포로를 죽이거나 석방하는 정도로 끝나던 과거의 전쟁 사후 처리와는 달랐습니다. 오히려 그런 절차는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법률과 그 적용의 합리성을 따져야 하는 재판은 쉬운 절차가 아니었죠.

명령에 복종해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을 처벌할 수 있을까요? 피고인은 나치의 법에 따라 처벌받아야 할까요, 아니면 연합국의 법에 따라 처벌받아야 할까요? 전장에서 사람을 죽인 것에 살인죄가 적용될 수 있을까요? 전장에서의 살인과 특정 집단에 대한 학살은 어떻게 구분되어야 할까요?

당장 수많은 쟁점이 떠오릅니다. 이런 복잡한 문제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 것인지, 인류가 함께 지성을 모아 나온 결과가 바로 뉘른베르크 재판이었습니다. 전쟁과 전쟁범죄를 합리적으로 구분해 처리하고, 다시 이와 같은 비극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이었습니다.
 
 뉘른베르크 법원
ⓒ Widerstand
뉘른베르크 재판 이후에도 수 차례 나치의 전쟁범죄자에 대한 재판은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국제형사재판소를 비롯해, 세계적인 과거사 정리의 기초를 이루게 되었죠. 
뉘른베르크 재판이 열렸던 재판소에는 작은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전시의 마지막은 2차대전 이후 세계의 과거사 정리 문제를 다루고 있었죠. 르완다의 인종청소를 비롯해, 익히 접했던 사건들과 그 사후처리 문제가 여럿 적혀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한국의 사례도 적혀 있었습니다. 군사독재 시절에 이어졌던 학살과 이에 대한 처리 문제가 짧게 언급되어 있더군요. 국민의정부 시절 만들어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참여정부 시절 만들어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과거사 정리 기구로 이름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한국에 대한 안내판. 한국전쟁과 북한의 기아, 1979년 ‘서울의 봄’도 다루고 있다.
ⓒ Widerstand
의외의 곳에서 한국의 이야기를 보자니 기분이 묘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도 어떻게든 역사의 기록으로 남을 것이라는 사실을 정면으로 마주한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심판하고 정리한 과거사 역시 기록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때로는 이렇게 심판대에 서 정리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그런 무거움을 체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뉘른베르크 재판이 열렸던 재판장은 여전히 독일의 법원에서 재판장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이 재판대에 올라 죄를 판별하고 때로 심판받을 것입니다. 뉘른베르크 시 외곽에는 여전히 나치의 전당대회장이 폐허가 되어 남아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폐허 안에서 전시회를 열고, 음악회를 열고 있습니다.

역사는 이어지고 있습니다. 때로는 심판의 주체가 되었다가, 또 때로는 심판의 대상이 되어 재판정에 섭니다. 역사는 그렇게 조용하게, 하지만 무거운 흔적을 곳곳에 남기며 흐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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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CHwiderstand.com)>에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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