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전범 재판이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이유 [가자, 서쪽으로]
[김찬호 기자]
뮌헨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 뉘른베르크에 들러 보았습니다. 작은 도시들에 머물러 보고 싶어서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이름이 눈에 익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뉘른베르크라는 도시의 이름이 말이죠.
▲ 뉘른베르크 재판 기념관 |
ⓒ Widerstand |
특히 뉘른베르크는 1927년부터 나치당의 전당대회가 열린 도시이기도 합니다. 뉘른베르크는 큰 도시이면서, 당시 독일 영토의 중앙부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당시 독일은 지금과는 다르게 동쪽으로 더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거든요. 지금은 폴란드의 서부 지방이 된 땅이, 그 당시에는 독일의 영토였습니다.
▲ 뉘른베르크 구시가 |
ⓒ Widerstand |
특히 나치당이 집권한 뒤, 1933년에 벌어진 당대회는 나치의 성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장이었습니다. 전당대회에는 50만 명이 운집했습니다. 나치당이 독일 남부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고, 이제는 전국 단위 정당이 되었다는 상징이었죠. 사람들은 미디어로 전해지는 나치당의 규모에 압도되기 시작했습니다. 나치의 권력은 점차 공고해져 갑니다.
▲ 완공되지 못한 채 버려진 나치 전당대회장 |
ⓒ Widerstand |
물론 이런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전당대회장을 중심으로 설계한 거대한 건물군은 곧 시작된 전쟁과 패전으로 인해 대부분 완공되지 못했죠 지금도 뉘른베르크에는 나치의 전당대회장이 폐허가 되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전쟁의 상처가 쌓인 뉘른베르크는, 곧 나치 전범을 처벌하는 재판의 현장이 됩니다.
▲ 전범재판이 열린 재판장 |
ⓒ Widerstand |
전쟁범죄를 처벌하기 위한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기소된 피고는 모두 24명이었습니다. 이 가운데 12명이 사형 판결을 받았죠. 인류사 최대의 전쟁을 정리하는 재판 치고는 작은 규모였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았죠.
뉘른베르크 재판은 전쟁범죄를 재판의 형태로 처리하고 정리한 역사적인 재판이었습니다. 배상금을 지급하고, 상대방의 포로를 죽이거나 석방하는 정도로 끝나던 과거의 전쟁 사후 처리와는 달랐습니다. 오히려 그런 절차는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법률과 그 적용의 합리성을 따져야 하는 재판은 쉬운 절차가 아니었죠.
명령에 복종해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을 처벌할 수 있을까요? 피고인은 나치의 법에 따라 처벌받아야 할까요, 아니면 연합국의 법에 따라 처벌받아야 할까요? 전장에서 사람을 죽인 것에 살인죄가 적용될 수 있을까요? 전장에서의 살인과 특정 집단에 대한 학살은 어떻게 구분되어야 할까요?
▲ 뉘른베르크 법원 |
ⓒ Widerstand |
뉘른베르크 재판이 열렸던 재판소에는 작은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전시의 마지막은 2차대전 이후 세계의 과거사 정리 문제를 다루고 있었죠. 르완다의 인종청소를 비롯해, 익히 접했던 사건들과 그 사후처리 문제가 여럿 적혀 있었습니다.
▲ 한국에 대한 안내판. 한국전쟁과 북한의 기아, 1979년 ‘서울의 봄’도 다루고 있다. |
ⓒ Widerstand |
우리가 심판하고 정리한 과거사 역시 기록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때로는 이렇게 심판대에 서 정리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그런 무거움을 체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뉘른베르크 재판이 열렸던 재판장은 여전히 독일의 법원에서 재판장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이 재판대에 올라 죄를 판별하고 때로 심판받을 것입니다. 뉘른베르크 시 외곽에는 여전히 나치의 전당대회장이 폐허가 되어 남아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폐허 안에서 전시회를 열고, 음악회를 열고 있습니다.
역사는 이어지고 있습니다. 때로는 심판의 주체가 되었다가, 또 때로는 심판의 대상이 되어 재판정에 섭니다. 역사는 그렇게 조용하게, 하지만 무거운 흔적을 곳곳에 남기며 흐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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