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검찰의 오만함, 그리고 28년 군 인생 건 박정훈 대령의 약속
[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기자들이 취재 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롭게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김도균 기자]
▲ 호우피해 실종자 수색작전 중에 발생한 해병대 고 채 모 상병 사망사고를 수사하다가 항명 등의 혐의로 군검찰에 입건된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이 1일 오전 서울 용산구 중앙군사법원에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며 응원 나온 해병대 예비역 동기생들에게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
ⓒ 유성호 |
박 대령은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곁에는 임관동기인 해병대 사관(OCS 90차) 81기 예비역을 중심으로 선후배 해병 전우 10여명이 함께 했습니다. 박 대령의 손을 꼭 잡고 군사법원 앞까지 걸어 온 이들은 박 대령과 마주섰습니다.
김태성 해병대 사관 81기 동기회장은 "오늘은 우리 전우 박정훈 대령이 현 시각부로 동기 없이, 전우 없이 혼자 시궁창에 들어가는 날"이라면서 박 대령을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 해병대 군가 '팔각모 사나이'를 부를 것을 제안했습니다. 이윽고 예비역 해병들이 부르는 군가 소리가 국방부 후문 앞에 울려 퍼졌습니다. 마침 '팔각모 얼룩무늬' 해병대 전투복 차림이었던 박 대령의 눈가가 촉촉해졌습니다(관련기사 : 박 대령 손잡은 해병대원들... 군사법원 앞 울려 퍼진 '팔각모 사나이').
힘찬 목소리로 "동기야, 힘내라"고 응원한 해병 전우들은 이날 저녁 군 판사가 국방부 검찰단이 신청한 사전구속영장 청구를 기각하고 박 대령이 다시 군사법원 밖으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하루 종일 그를 기다렸습니다. 초조한 표정으로 박 대령이 나오기를 기다리던 동기회장에게 넌지시 물어봤습니다. '시궁창에 들어가는 날'이란 의미가 무엇이냐고 말이죠.
해병대 수색대 교육 과정 중에는 온갖 오물이 잔뜩 고여 있는 하수구나 시궁창 속에 온몸을 담그고 박박 기어가는 훈련이 있다고 했습니다. "설마 누가 이런 더러운 곳으로 들어오겠느냐"고 생각하는 적의 허점을 찌르는 '시궁창 극복 훈련'은 유사시 적진으로 침투하거나 도피·탈출을 해야 하는 수색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훈련이라는 거죠.
전우들의 눈에는 박 대령이 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는 게 홀로 시궁창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안쓰럽고 안타깝게 보였던 겁니다.
▲ 호우피해 실종자 수색작전 중에 발생한 해병대 고 채 모 상병 사망사고를 수사하다가 항명 등의 혐의로 군검찰에 입건된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이 1일 오전 서울 용산구 중앙군사법원에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이날 박 전 해병대 수사단장은 자신을 응원 나온 해병대 예비역 동기생들의 배웅을 받으며 법원에 출석했다. |
ⓒ 유성호 |
그리고 이날 저녁 군사법원은 '이례적'으로 박 대령에 대해 군 검찰이 신청한 구속영장을 기각했습니다. 제가 이례적이라는 표현을 쓴 건 군사법원이 민간법원에 비해 재판 전 인신 구속 비율이 높을뿐더러, 군사법원이 인사권자(국방부 장관)로부터 독립성이 약하다는 지적을 지속적으로 받아왔기 때문입니다.
군 검찰이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하면서 기존 군형법상 항명 혐의 외에도 박 대령이 이종섭 국방부 장관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군형법상 상관명예훼손 혐의까지 추가로 적용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날 군 판사의 영장기각 결정은 이례적이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이는 또 그만큼 군 검찰이 무리하게 영장청구를 했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국방부 검찰단의 영장청구서를 보면 선뜻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구속영장청구서에는 다른 해병대 수사단 수사관들 역시 박 대령처럼 경찰 이첩 보류 지시를 외압이라고 판단했다는 정황들이 담겨있습니다(관련기사 : [단독] 해병대 수사관들, '이첩 보류' 부당한 외압으로 인식했다).
"수사에 대해서는 지휘관도 관여할 수 없다", "사건 인계는 자신(해병대 수사단)들의 명의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령관의 결심이 없어도 할 수 있는 것", "군사경찰 조사는 초동수사에 불과하므로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혐의사실로 통보해야 한다"는 인식이 해병대 수사단의 공통된 견해였다는 겁니다.
심지어 박 대령의 직속부하인 해병대 수사단 O광역수사대장은 군 검찰에서 "만약 수사단장(박 대령)이 피혐의자(임성근 1해병사단장)를 제외하기 전까지 사건인계를 하지 말라고 지시하였다고 하더라도 저는 부당한 지시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경찰에)인계했을 것입니다"라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군 검찰은 이런 증언들을 "법령 해석에 대한 무지"로 치부하면서 "피의자(박 대령)의 부하인 군사경찰들이 피의자에게 부합하고 유리하게 진술하도록 함으로써 진술을 오염시키고 실체적 진실 발견을 어렵게 하고 있다"고 구속의 필요성을 강변하고 있습니다. 이런 군 검찰의 인식에서는 여러 해 동안 군 수사업무를 해온 베테랑 군사경찰 수사관들을 얕잡아 보는 오만함마저 엿보입니다.
고 채 상병 시신 앞에서 박 대령이 한 약속
박 대령은 해병대 군사경찰 병과장입니다. 해병대 군사경찰 중 최선임 장교인 것이죠. 이 말은 더 이상 그에게 진급 기회가 없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타군에 비해 규모가 훨씬 작은 해병대 안에서, 그것도 해군사관학교도 아닌 OCS 출신인 박 대령은 그저 해병대가 좋아서 지난 28년 동안 군복을 입고 묵묵히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습니다.
이제 2~3년 후면 명예롭게 군 생활을 마무리해야할 이 시점에서 그가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있지도 않은 말을 꾸며냈다는 걸까요? 만약 군사법원에서 유죄가 인정된다면 강제전역과 형사처벌은 물론 퇴직금까지 대폭 삭감될 위험을 감수하고 말입니다.
기자가 만난 박 대령의 전우들은 입을 모아 그를 "원칙에 철두철미한 사람", "뼛속까지 해병"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박 대령의 이런 면모는 그가 군 검찰에 제출했던 진술서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진술서에 따르면, 지난 7월 31일 당초 예정되어 있었던 언론브리핑이 돌연 취소된 이후 김계환 해병대사령관은 "국방부에서 경찰에 인계할 수사서류를 혐의자와 혐의내용을 빼고 수사라는 용어도 사용하지 말고 조사로 정리하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박 대령에게 묻습니다.
박 대령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이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이다. 국민이 알게 되면 정직한 해병대가 비겁하고 불의한 집단으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고 답변했다고 합니다. 박 대령에게 '정직한 해병대'가 외압에 굴복하는 일은 결코 용인하거나 타협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던 겁니다.
안타깝게 숨진 고 채 상병은 이제 갓 스무살이었습니다. 박 대령처럼 채 상병도 남들보다 힘들고 고된 군 복무를 스스로 선택한 자랑스러운 해병이었습니다. 마침 박 대령에게는 채 상병 또래의 아들이 있습니다.
▲ 해병대 조직 전체를 상징하는 해병대기 |
ⓒ 해병대사령부 |
박 대령이 그토록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해병대 상징은 앵카(닻)와 별을 움켜쥔 독수리가 펄럭이는 리본을 부리로 물고 있는 형상입니다. 리본에 쓰여진 "정의와 자유를 위하여"란 문구는 대한민국 해병대의 모토입니다.
채 상병 순직 사건을 놓고 벌어진 수사 외압 의혹을 취재하면서 기자의 머릿속에는 늘 떠나지 않는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이제 그 물음을 박 대령의 법률대리인 김정민 변호사의 말씀을 빌려 독자여러분께도 던지려 합니다.
"박 대령이 있지도 않은 대통령의 수사개입을 지어낼 이유도 없고, 이렇게 지어낸 거짓말을 부하들에게 전할 이유는 더더욱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박 대령이 얻을 이익이 도대체 뭐가 있나요. 하나만 말씀해 보세요."
여러분께서는 지극히 상식적인 이 질문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정훈 대령이 지금 자신의 명예와 군 경력을 모두 걸고 지키고자 하는 정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지켜낼 수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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