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화·구금·검열의 수난 겪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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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문명개화와 외세로부터의 국권수호를 위해서는 국민이 깨어 있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그 전위로서 공정한 신문의 역할을 들었다.
3일 정간을 시키는 고로 그동안 신문을 발간치 못하였다가 작일에 그 기간이 다한 고로 금일부터 발간하오니 첨위는 조량하시려니와 우리가 한 마디 경고할 것은 어서 학문 힘쓰고 일들 하여 국력이 부강하여 이런 검열을 받지 않고 신문 발간하도록 하시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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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 기자]
▲ 묵암 이종일 선생 |
ⓒ 묵암 이종일 선생 기념사업회 |
그는 문명개화와 외세로부터의 국권수호를 위해서는 국민이 깨어 있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그 전위로서 공정한 신문의 역할을 들었다. 그래서 <제국신문>을 내려 놓을 수 없는 당위였다. 시련이 따랐다. 가진 것 모두를 쏟아 부었으나 재정난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시련은 안팎에서 닥쳤다. 1899년 12월 19일 원인모를 화재가 발생하여 인쇄기와 집기류를 모두 잿더미로 만들었다. 8일 동안 신문을 발행하지 못하고, 12월 27일 자로 속간할 수 있었다. 그는 경영자·사원·기자·주필로서 1인 4역의 고된 일을 하면서 다시 신문을 발행하였다.
독립협회의 일로 피신해야 했고 필화사건도 잦았다. 고종황제의 탄신절을 맞아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기사 중 '만세(萬歲)'가 '망세(亡歲)'로 오식되어 구금되었다. 1904년 3월 22일에는 '사형실황(死刑實況)'이란 기사 관계로 경무청에 구금되었다. 장인근·김상인 등 기자들과 함께 구금되었다가 두 기자는 3일 만에 석방되고, 이종일은 4개월 후 석방되었다.
일제의 대한제국 침탈이 가속화되면서 <제국신문>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었다. 아직 대한제국의 정부가 숨쉬고 있을 때부터 일제의 탄압이 자행되었다. 1904년 10월 9일 <제국신문>은 일본 헌병사령부에 의해 정간 명령을 받았다. 정간 이유는 일본군사상 방해가 되며 한·일 국교와 치안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었다.
이종일은 <제국신문>이 정간된 지 1개월이 되는 날을 택하여 '본 신문 정지하였던 사정'이란 제목의 논설을 썼다.
▲ 이종일 선생이 창간한 <제국신문> |
ⓒ 묵암 이종일 선생 기념사업회 |
<제국신문>에 대한 탄압은 정부나 일제뿐만이 아니었다. '동업관계'인 <한성신보>와 <조선신보>가 가세했다. 일본인들에 의해 서울과 인천에서 발행되는 신문들이다. 이 신문들은 언론 본연의 임무보다 일제의 국익을 위한 선전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종일은 왜곡을 일삼고 심지어 우리 황제까지도 무례하게 함부로 거론하는 '놀랍고 괘씸'한 <한성신보>와 <조선신보> 등 일본인이 발행하는 신문과 일전을 불사하였다. 그는 수차에 걸쳐 <제국신문>의 논조에 대해 시비를 건 <한성신보>에 그 부당을 지적하여 대응한 바 있다.
그러나 <한성신보>가 계속 악의적으로 '무례한 욕설과 비방', '당치 않은 욕설과 시비'를 일삼자 그는 일제의 침략적 의도를 정확히 간파하는 강경하고 준엄한 논설로써 일본기자의 '무지함'과 '교만함', '침략의 음흉한 흉계'를 반박하였다. (주석 43)
이종일은 '조선신보의 거듭 망언'을 반박한다'는 논설에서 "조선신보의 논설은(……) 사건 경위를 잘 알면서도 논란하기를 좋아해서 사실과 동떨어진 글을 썼다면 한낱 글재주에 도취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진상을 모르고 그런 글을 썼다면 어리석은 자라고 밖에 말할 길이 없다. 아마도 조선신보 기자는 진상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무슨 의도를 품고 일부러 왜곡해서 쓴 글이 아닌지."(주석 44)라고 팩트가 아닌 의도성을 비판했다.
일제가 득세하면서 총독부가 세워지기 전부터 그들의 조선인 발행 신문의 탄압이 심했다.
1904년 7월 20일 한국주차군사령부는 이른바 〈군사경찰훈령〉을 발표하여 "집회나 신문이 치안을 방해한다고 인정할 때는 그 정지를 명하고 관계자를 처벌" 하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신문을 발행 전에 미리 군사령부의 검열을 받게 함은 요(要)"(제2항)하도록 했다.
당시 신문 제작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이에 관한 기록이다.
신문을 매일 편집하여 박을 때에 경무 고문실에 가서 검열을 거친 후에야 인쇄하는데, 만일 검열하는 일인이 그대로 인가하면 그대로 박이고 무슨 구절이든지 내지 말라고 살을 쳐 주면 부득이하여 그 구절은 글자를 뒤집어 박이는 데 만일 그 자리에 다른 말을 채우려면 또 검열을 받아야 할 터인데,
매양 날은 저물고 채울 말도 없어서 남이 알아볼 수 없이 되는 것인데, 본월 17일 신문 잡보 중 시사촌언이란 구절을 검열에서 내지 말라 하여 글자를 뒤집어 놓는 때에 혹 뒤집어 놓기도 하고 혹 그저 두기도 하여 반박지게 된 까닭에 경무 고문실에서 본 사장을 불러 검열하는 영을 받지 않았다 하고,
3일 정간을 시키는 고로 그동안 신문을 발간치 못하였다가 작일에 그 기간이 다한 고로 금일부터 발간하오니 첨위는 조량하시려니와 우리가 한 마디 경고할 것은 어서 학문 힘쓰고 일들 하여 국력이 부강하여 이런 검열을 받지 않고 신문 발간하도록 하시기 바람. (주석 45)
주석
42> 김용호, 앞의 책, 117쪽.
43> 박걸순, 앞의 책, 52쪽.
44> 『제국신문』, 1900년 6월 21일자.
45> 앞의 신문, 1899년 1월 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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