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칩톡]'엔비디아 GPU가 촉발한 반도체패키징 전쟁'..파운드리도 '고도화' 채비
대만 TSMC 패키징 기술 선도, 삼성전자 추격
"어려운 상황이지만 인재 양성과 미래 기술 투자에 조금도 흔들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올해 2월 천안·온양캠퍼스 반도체 생산라인을 둘러보면서 한 말이다. 경기도 화성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이 아니라 천안·온양 패키징 공장에서 한 발언이어서 업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이 말에는 패키징에서 밀리면 반도체도 끝장이라는 절박함이 담겨 있다. 이 회장이 연초부터 천안·온양패키징 공장을 들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세계 최고 인공지능(AI)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의 주력제품 H100은 연산 처리용 그래픽처리장치(GPU)와 데이터 저장용 고대역폭메모리(HBM) 반도체를 하나의 칩처럼 연결해서 만든다. H100의 등장으로 반도체 후(後)공정 개념이 바뀌었다.
전통적으로 후공정은 실리콘 웨이퍼에 회로를 인쇄하는 전(前)공정 이후 제품 출하 전 포장 작업을 말한다. 회로를 그린 웨이퍼를 개별 칩으로 자른 뒤(다이싱·Dicing) 전기 신호가 흐르는 통로를 만들고 외형을 가공하는 작업이었다. 이제는 H100처럼 서로 다른 종류의 반도체를 연결해 하나의 시스템(비메모리) 반도체를 만드는 '이종집적' 방식이 널리 활용되고 있다. 이에 따라 웨이퍼 원판을 개별 반도체 칩 사이즈로 자른 뒤 외형을 가공하는 대신 웨이퍼 원판에서 여러 개의 칩을 올려놓고 곧바로 패키징한다. 과거 같은 개념으로 분류됐던 후공정과 칩을 한데 묶는 패키징을 같은 공정으로 간주하지는 않는 것이 요즘 추세란 얘기다.
문제는 메모리 반도체 업체뿐 아니라 파운드리 업체도 패키징 고도화 작업에 모든 역량을 쏟고 있다는 점이다. 애플, 퀄컴 같은 팹리스(반도체 설계기업)는 전공정은 물론 후공정까지 완벽하게 해내는 파운드리 업체에 물량을 맡긴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 메모리 업체끼리 경쟁하는 시장이 아니라는 뜻이다.
패키징 기술을 선도하는 기업은 세계 1위 파운드리 업체 대만 TSMC다. TSMC는 2011년 칩렛 기술을 개발했다. 칩렛은 서로 다른 기능의 반도체 칩을 레고 블록처럼 연결해 고성능 반도체를 만드는 기술이다. 이 기술을 갖춰야 2.5D 패키징을 할 수 있다. 2.5D 패키징은 HBM 반도체를 평평한 기판 위에 얹어서 패키징하는 기술이다. 시스템-메모리 반도체를 수평으로 배열한다. 반대로 수직으로 쌓으면 3D 패키징이 된다. TSMC는 2.5D 패키징을 5세대까지 개발했다.
삼성전자는 2021년부터 '아이큐브(I-Cube)'라는 2.5D 패키징 기술을 선보이며 추격을 시작했다. 아이큐브 양산은 이르면 내년에야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내년 2분기부터 4개 HBM을 GPU 등과 함께 배치한 아이큐브 4를, 3분기에는 8개 HBM을 배치한 아이큐브 8를 양산할 예정이다.
삼성전자는 TSMC와 달리 메모리 반도체 사업도 하는 회사 특징을 반영해 칩 생산 과정에서 패키징까지 해주는 턴키(일괄 진행)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 서비스 영향으로 미국 AMD로부터 HBM과 첨단 패키징 서비스를 수주한 것으로 전해졌다. 패키징 분야 조직 개편과 인재 영입 속도도 높이고 있다. 삼성전자 DS(반도체) 부문은 작년 '어드밴스드 패키지(AVP) 사업팀'을 조직하고 지난 3월과 7월 신입·경력 사원을 채용했다. AVP 사업팀 부사장으로 TSMC에서 3D 패키징 기술을 만든 린징청을 영입했다.
SK하이닉스도 150억달러 규모의 미국 첨단 패키징 및 연구개발(R&D) 센터 건설 작업을 하고 있다. 현재 부지 물색 중이다. 기술 측면에서는 국내 최고 수준의 TSV(Through Silicon Via·실리콘 관통 전극) 공정 역량을 갖췄다. 2013년 TSV 공정을 적용한 HBM 반도체 제품을 국내 최초로 개발했다. TSV 공정은 칩을 얇게 갈아 미세한 구멍 수백개를 뚫은 뒤 상단 칩과 하단 칩 구멍을 수직으로 관통하는 전극을 연결한 첨단 패키징 기술이다.
패키징 시장 성장성은 높다. 시장조사업체 가트너는 세계 패키징 시장이 올해 574억달러(약 76조원)에서 오는 2025년 649억달러(약 86조원) 규모로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한국은 경쟁국보다 패키징 산업 생태계가 약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비(非) 프리미엄 제품 등은 여전히 외주 후공정(OSAT) 업체에 주문을 넣는 경우가 많다.
파운드리, 메모리 업체와 OSAT 기업 간 유기적인 공급망 생태계를 갖춰야 비용을 절감하고 생산 효율을 높일 수 있는데 한국은 공급망 경쟁력이 약하다. 가트너 조사 결과 작년 세계 상위 OSAT 업체 25곳 매출(403억9000만달러·53조4000억원)에서 한국 업체(18억1800만달러·2조4000억원)가 차지하는 비중은 4.5%에 불과했다. 1위 대만 ASE, 2위 미국 앰코, 3위 중국 JCET 3사가 세계 점유율 45.1%를 독식하고 있고 상위 기업 25곳 중 11곳(44%)이 대만 업체다. 한국 업체는 4곳(16%) 뿐이고 모두 10위권 밖이다.
문채석 기자 chaes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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