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중앙] 과학고 자퇴 후 인문학 섭렵…사회에 보탬 되고 싶어 새 미디어 창업했죠
“수학·과학은 내가 아니더라도 머리가 좋은 사람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IMF를 겪으며 사회 지도층의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가 큰 문제라는 의식을 갖게 됐죠. 이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같은 고민을 하게 됐고 뭔가 사회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돼야겠다는 생각에 인문학과 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죠.”
어린 시절 별 보는 것을 좋아해 NASA 과학자를 꿈꿨던 별샛별(43)씨는 과학고등학교에서 대학 입학을 앞두고 문과로 전향했어요. 현재 그는 외교안보 전문 뉴스레터 ‘델타월딩’ 발행 3년차, 지식 커뮤니티 ‘시에라 소사이어티’ 운영 2년차에 접어든 미디어스타트업 델타월딩의 대표입니다.
나만의 커리큘럼 짜 삶에 더 중요한 공부 매진
경북 경주가 고향인 그는 수학·과학 공부를 원 없이 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으로 경북과고에 진학했어요. 그러나 입시제도가 바뀌면서 고2 때 자퇴하고 서울의 입시학원으로 향했죠. 19세의 샛별씨는 이곳에서 자신의 꿈을 바꿀 만큼 충격적인 사건을 접했습니다. 결국 수능 100일 전 문과로 진로를 바꾸고 이듬해인 1999년 연세대에 입학해 철학·불어불문학을 이중전공했죠.
진로 전환의 계기는 과학고 학생들의 일탈 목격이었어요. 당시는 IMF 외환위기로 금 모으기 운동 등 전 국민이 국가부도 사태를 이겨내 보려는 눈물겨운 시도들이 이어졌죠. 10대들이 많이 이용하는 패스트푸드점에서도 모금함을 비치했고 모범생이었던 샛별씨도 열심히 기부했어요. 그런데 서울의 모 과학고 출신 학생들이 맥도날드의 성금 모금함을 뜯어와선 보란 듯이 좋아라 한 겁니다. 포털사이트에 검색하면 누군지 알 만한 유명인들의 자녀가 그런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하는 모습을 보며 샛별씨는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때 그 친구들을 보면서 IMF 사태가 사회 지도층의 모럴해저드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았어요. 공부도 잘하고 형편도 괜찮은 친구들이 어떻게 저런 짓을 저지를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부모를 보고 배웠을 것이란 결론에 이르렀죠. 그래서 단순히 수학·과학을 잘해서 과학자가 되기보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국가철학은 무엇인지 같은 것들이 삶에서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대학에서는 정치외교학과·사회학과·법학과 같은 다른 학과 전공수업을 교양과목처럼 듣는 등 원하는 공부를 후회 없이 했습니다. 지금 우리 법 체제의 근원이 서구라는 생각에, 서구 사회의 전체적인 맥락을 알기 위해 영문학·불문학·독문학·노문학까지 두루 수강했죠. “막연하게나마 저는 기업에 취업할 것 같지 않다고 예상했어요. 그래서 취업용 학점 따기에 목숨 걸기보다 지금 아니면 들을 수 없는 수업 위주로 공부했습니다. 나만의 커리큘럼을 짜서 매 학기 열심히 수업을 듣고, 도서관에서 책도 많이 읽고, 공부하다 나온 지역에 직접 가보기도 하는 식으로 ‘혼자만의 자유교양대학’을 다녔다고 할까요.”
논술학원·콜센터·국회의원실…파란만장 2030
졸업을 앞둔 샛별씨는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아야 했어요. 마침 대치동 학원에서 일하던 후배가 논술강사를 제안했죠. 수학·과학은 물론 사탐(문과) 과목도 강의가 가능하다 보니 융합형 인재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논술강사가 됐어요. 그러나 5년 만에 그는 대치동을 떠날 결심을 합니다. 상담을 요청한 학생이 울면서 죽고 싶다고 호소하는 일이 있었지만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었거든요. 샛별씨가 아무리 재미있게 가르친다 해도 학생들은 어차피 입시라는 틀 안에서 고통받죠. 입시중심 교육체제 하에서 자신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지 회의가 든 겁니다.
2011년 7월에는 엄청난 시련이 닥쳤어요. 치명적인 사고로 중환자실에서 생사를 오가며 열흘 만에 깨어난 그에게 의사는 평생 불구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했죠. 그렇게 병원에서 고통스러운 8개월을 보냈습니다. 지금은 걸어 다닐 수 있게 됐지만 온몸에 철심이 박힌 채로 살아야 해요.
한창 활동할 30대 초반에 2년 반 사회로부터 단절된 그는 사고 이전 대치동에서 논술을 가르치며 교육에 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기에 사회적인 해결 방안을 고민하다 시민단체에 이력서를 넣었습니다. 그러나 최종 면접에서 번번이 불합격했죠. 논술은 늘 최고점이었지만 전공이나 경력이 단체 성격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였어요.
“그때 경력단절여성에 대한 르포기사를 봤는데 제 처지 같더라고요. 한편으로 ‘시민단체’만 목표로 취업 활동을 하는 게 엘리트주의적 사고의 한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다만 몸이 안 좋으니 마트 같은 곳은 다니기 어렵고, 자리에 앉아서 일하는 콜센터라면 할 만하겠다 싶었어요. 2년 넘게 일을 쉬었기 때문에 무슨 일이라도 빨리 시작해서 사회적 감각을 익혀야 할 필요도 있었죠.”
하지만 몸은 좀처럼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과학고·명문대를 나온 자신이 ‘아무 일’이나 한다는 게 자존심도 상했죠. 2013년 12월 중순 어느 날, 경주 집에 있던 샛별씨는 짐을 싸서 나왔습니다. 무작정 찜질방에 들어가 숙식을 해결하며 ‘지금부터 바닥에서 시작한다’고 다짐했죠. 마지막으로 면접 봤던 시민단체가 경제 관련이라 경제 쪽 콜센터에 지원하고, 방통대 경제학과에도 편입했죠. 제일 먼저 연락 온 현대캐피탈 콜센터에서 그다음 날부터 일을 시작했어요.
이후 20개월 동안 찜질방에서 살면서 하루의 루틴을 정해 실행했습니다. 오전 6시쯤 사무실에 도착, 3시간 동안 휴게실에서 방통대 공부를 하고,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한 뒤 퇴근하면 대학로에 가서 연극·영화 등을 섭렵한 후 찜질방으로 돌아와 새벽 3시까지 글을 쓴 겁니다. “영혼이 공허해지면 안 되니까 공연을 보면서 채워 넣었어요. 아침엔 지식을 채우고 낮엔 일하고 저녁엔 영혼을 채우고 주말에 등산·수영을 했죠. 제가 생각해도 독했죠.”
콜센터에서 26개월 일하며 하청 노동자에 대한 문제의식이 생긴 그는 서점에서 우연히 강준만 교수의 책 『청년이여 정당으로 쳐들어가라』를 읽고 이전까지 단 한 번도 일해볼 생각 없던 정치권에 관심을 갖게 됐죠. 당시는 2016년 총선을 4~5개월 앞둔 시기라 뭐가 됐든 총선에서 한번 역할을 해보자 마음먹었어요. 모 정당에 자원봉사 신청을 했더니 대선주자급 후보의 캠프에서 연락이 왔죠. 콜센터 경력이 있으니까 전화 선거운동을 맡았고, 콜센터에서 해보고 싶었던 다양한 방법을 적용하며 재미도 느꼈어요. 선거 후 국회에서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당에 피력한 그는 우여곡절 끝에 20대 국회에서 국방위원회 소속 모 의원실의 정책 보좌진으로 일하게 됐죠. 문외한이던 국방에 대해 공부하면서 그의 가치관이나 세계관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한국의 이코노미스트·포린 어페어스가 되겠다”
“당시 미국 대통령에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전 세계가 향후 국제사회 변화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웠어요. 그런데 우리나라의 기성 언론이나 정치인들, 심지어 학계조차도 왜 이런 이야기를 깊이 있게 다루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죠.” 그러면서 문득 창업 아이디어를 떠올렸습니다. 외교안보를 주제로 국제사회의 변화 흐름을 깊이 있게 소개하는 새로운 개념의 미디어 ‘델타월딩(delta.worlding)’, 같은 관심사를 가진 이들이 모여 이야기하는 커뮤니티 ‘시에라 소사이어티(Sierra Society)’가 그것이죠. 2020년 11월, 4명의 동료와 팀빌딩을 시작해 2021년 3월 2일 델타월딩 첫 뉴스레터를 발행했어요.
2022년 1월에는 대학 후배이자 동아리 후배이기도 한 김남윤(30)씨가 합류해 델타월딩의 자문을 맡고, 시에라 소사이어티의 세팅부터 정기 회의, 프로그램 기획·운영 등을 함께했어요. 다른 직업과 병행하던 초기 동료들은 떠나고 지금은 샛별·남윤 두 사람이 이끌어가고 있죠. ‘지식 그 이상’을 추구하는 시에라 소사이어티는 한마디로 국제사회, 정치와 정책, 지속 가능성, 미디어와 빅테크 등 관심 주제별로 원하는 이들이 월 1회 총 4번 모여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온·오프라인 병행 커뮤니티입니다. ‘세계지도 다시 그리기’, ‘중동 카라반’ 등 3개 코스로 시작해 2023년 가을 현재 총 12개의 베이스캠프를 운영 중이죠.
시에라 소사이어티는 유료지만 델타월딩은 무료인데요. 이를 통해 원하는 만큼의 수익을 얻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언뜻 공익적 차원에서 선의의 투자자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 아닐까 해서죠. 이에 대해 샛별씨는 “우리는 사회적 문제를 비즈니스로 풀어내는 사람”이라고 분명하게 답했어요. 델타월딩의 프리미엄 콘텐트 강화를 통해 유료화도 계획 중이죠. 궁극적으로 델타월딩은 ‘한국의 이코노미스트, 한국의 포린 어페어스가 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어요.
수많은 스타트업 대표들이 세상을 바꾸겠다는 신념 하나로 창업에 뛰어듭니다. 샛별씨 역시 세상을 바꾸겠다는 대의명분이 있죠. 문제는 ‘어떤 방향으로’입니다.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더 잘 듣기 위해 투표권이 있는 중산층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델타월딩과 시에라 소사이어티는 중산층이 정확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는 청소년들에게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습니다. “100세시대인데다 AI의 출연으로 노동의 디지털 전환이 더욱 빠르게 진행될 거예요. 극소수의 직업군이 아니고선 평생 직장이라는 개념은 완전히 사라질 테죠. 단 하나의 전문지식으로 평생 직장을 구하겠다는 마음은 유연성을 떨어뜨려요. 10대~20대 초에 ‘지식근육’보다 ‘생활근육’을 발달시킬 수 있는 훈련을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지식은 AI로 대체 가능하지만 변화에 적응하는 생활근육은 누구도 대신 만들어 줄 수 없으니까요.”
글=김은혜 객원기자 sojoong@joongang.co.kr, 사진=별샛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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