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토굴욕' 묻고 "친구"라 불렀다…시진핑에 손 내민 푸틴 행보

이유정 2023. 9. 4.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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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이 올해 3월 모스크바 크렘린궁에 도착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안내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1일(현지시간) “시진핑 국가주석은 나의 친구”라고 발언했다. 로이터통신·러시아 스푸트니크 통신 등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이날 러시아 학교들의 개학일에 맞춰 청소년들과 대화하는 자리에서 이 같이 말했다. 푸틴 대통령은 “가까운 미래에 시 주석과 만남을 가질 텐데, 그는 나를 친구라고 부른다”면서 “그는 개인적으로 러시아와 중국의 발전을 위해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도 그를 친구라고 부를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시 주석을 향한 푸틴 대통령의 ‘친구’ 발언은 지난달 29일 중국 정부가 러시아 영토의 일부를 자국 영토로 표기한 지도를 공개한지 사흘 만에 나온 것이다. 중국 천연자원부는 ‘2023 표준 지도’에서 러시아와 중국이 과거 영토 분쟁을 벌였던 동남부 ‘볼쇼이 우수리스키 섬’ 전체를 중국 땅으로 표시했다. 이곳은 러시아와 중국이 19세기부터 영유권을 주장한 지역으로, 2008년 양측이 동·서를 절반씩 점유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번 지도에선 러시아 쪽 부분도 모두 중국 땅으로 표시됐다.

같은 지도에 인도의 일부 주와 남중국해 섬도 중국 땅으로 기재되면서 인도·말레이시아 등 주변국은 강하게 반발했다. “시 주석이 오는 9~10일 인도 뉴델리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회의에 불참하게 된 배경도 주최국인 인도와 외교 갈등을 빚은 탓”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각국이 이토록 민감해하는 영토 문제조차 러시아는 중국 앞에서 ‘묻고 가기’를 택한 셈이다. 미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는 이와 관련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중국 앞에서 무기력해지고 있다”고 꼬집었다. 미 조지 메이슨대 공공정책 대학원 마크 카츠 교수는 매체에 “서구의 제재 때문에 러시아가 중국에 경제적으로 지나치게 의존하게 됐다”면서 “푸틴 대통령은 영토 문제로 화가 나더라도 시 주석에게 큰 소리로 불평할 입장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중국과 러시아 국경 지대의 볼쇼이 우수리스키를 자국 영토를 넘어 검은 선으로 표시한 중국의 '2023 표준 지도' 모습. X(옛 트위터) 캡처

실제 푸틴 대통령이 가장 공들이는 외국 정상이 있다면 시 주석이다. 올해 3월 국제형사재판소(ICC)에서 체포 영장이 발부된 이후 푸틴 대통령은 좀처럼 해외 순방을 가지 않았지만, 첫 순방지로 중국을 골랐다. 크렘린궁이 지난 7월 “푸틴 대통령이 중국의 초청을 받아 ‘일대일로(一帶一路) 포럼’ 참석차 10월 중국에 방문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달 22~24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신흥 경제 5개국 모임인 브릭스(BRICS) 정상회의 등을 화상으로 소화했다. 인도에서 열리는 9월 G20도 가지 않는다.

올해 3월 시 주석이 러시아를 찾았을 때도 푸틴 대통령은 그를 극진히 대접했다. 푸틴 대통령이 시 주석의 손 아래로 손을 포개 악수하거나, 건배 잔을 시 주석보다 낮게 올리는 등의 모습이었다.

이 같은 푸틴 대통령의 행보는 우크라전이 장기화하면서 내부 악재까지 겹친 탓이 크다. 지난 6월 최측근이던 바그너 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의 반란 사건이 컸다. 지난달 20일엔 러시아가 47년 만에 발사한 달탐사 우주선 ‘루나-25’가 달 착륙에 실패하며 자존심을 구겼다. 러시아는 서방 제재로 착륙선의 핵심 부품을 자체 조달한 터였다. 러시아가 실패한 직후 인도의 달 탐사선 ‘찬드라얀-3호’는 달 착륙에 성공했다. 당시 브릭스 정상회의 기간과 겹쳤는데, 푸틴 대통령은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에게 속 쓰린 축하 인사를 건네야 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과 사망한 예브게니 프리고진 바그너 수장. AP=연합뉴스

그럴수록 푸틴 대통령은 안으론 결속 다지기에 집중하고, 밖으론 중국을 비롯한 우군 끌어 모으기에 집중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에게 반기를 든 프리고진이 지난달 비행기 추락으로 의문사한 데 이어, 1일 공개된 러시아의 새 국정 역사 교과서엔 푸틴 대통령의 사진이 실렸다. 푸틴 대통령은 ‘오늘날의 러시아-특별군사작전’을 이끈 인물로 소개됐다. 시 주석을 만나기 전에는 튀르키예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과 정상회담도 갖는다. 흑해 곡물 협정을 되살리기 위해 에르도안 대통령이 오는 4일 러시아 소치를 방문할 예정이라고 크렘린궁이 밝혔다.

이와 관련 영국 일간 가디언의 외교 칼럼니스트 사이먼 티스돌은 2일 “무자비한 푸틴은 자신의 개인적인 성전(聖戰)에 더욱 집착하고 있으며, 러시아의 지정학적 르네상스를 위해 모든 위험을 감수하려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에 따라 평화회담을 통한 종전 가능성은 희박해지고 있다는 전망이다. 그는 “서방의 유일한 선택지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을 압도적으로 늘리는 것”이라고도 했다.


우크라, 이번엔 ‘드론보트’ 공격


러시아의 점령지인 크림반도로 향하는 크림대교에선 주말새 교전이 이어졌다. 러시아 국방부는 1~2일 “우크라이나 정권이 크림대교를 겨냥한 반잠수식 무인(드론) 보트 공격을 했고, 세 척을 무력화했다”고 밝혔다. 이번 공격에는 러시아 유조선과 교량을 공격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보안 당국이 개발한 ‘시 베이비(Sea Baby)’란 이름의 보트가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공격이 이어지자 러시아 당국은 3일 크림대교를 폐쇄했다.

이와 관련 존 커비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선임조정관은 1일 현지 취재진들에게 “지난 72시간 동안 남부 자포리자 지역에서 눈에 띄는 진전이 있었다”고 밝혔다.

미국이 조만간 전차·장갑차를 무력화할 수 있는 열화우라늄탄을 우크라이나에 지원한다는 보도도 나왔다. 로이터통신은 2일 복수의 미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미국이 수주 내로 열화우라늄탄이 포함된 무기 지원 패키지를 전달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농축 우라늄 부산물로 만드는 열화우라늄탄은 앞서 미국이 지원한 집속탄과 더불어 치명적인 무기로 꼽힌다.

이유정 기자 uu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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