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냉장고 없는 17일
죄책감 들기도… 합리적인
소비원칙 세우는 계기 돼
입추(立秋)를 하루 앞둔 지난달 7일 새벽, 열대야를 이기지 못하고 잠에서 깨어나 냉장고 문을 열자 절임음식의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얼굴을 청량하게 스쳤던 냉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생수병과 반찬통에 이슬이 맺혔고, 우유갑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냉장고에 문제가 생긴 게 분명했다.
냉동실 내부는 냉장실보다 더 처참할 게 불을 보듯 뻔했다. 다급하게 문을 연 냉동실 내부 풍경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얼음은 모두 녹았고, 아이스크림은 죽처럼 변했으며, 고기를 담은 비닐봉지에 핏물이 흉측하게 고였다. 냉동실 안쪽 깊숙이 넣어둔 새우의 몸통은 회색에서 분홍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해산물이 녹기 시작하자 절임음식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역한 냄새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냉장고 온도계에서 냉장실은 25도, 냉동실은 9도를 가리켰다.
즉석 냉동 만두 2봉지가 눈에 들어왔다. 지난밤 귀갓길 편의점에서 하나를 사면 똑같은 하나를 덤으로 주는 행사 상품으로 2개나 쟁여둔 그 만두. 이걸 사지 않았다면 심란한 기분도 조금은 줄었을 것이다. 싸게 샀다고 좋아했던 지난밤의 미소가 후회로 돌아왔다. 냉장고를 더 깊숙이 들여다볼수록 마음만 아플 뿐이었다. 미지근한 물을 아무리 들이켜도 35도를 넘나드는 한밤중 무더위에서 높아진 불쾌지수를 떨어뜨릴 수는 없었다. ‘하필 이런 불볕더위에 냉장고 고장이라니….’
신접살림으로 장만한 뒤부터 15년 넘게 사용한 냉장고는 작동을 멈추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말썽을 부리지 않았다. 음식의 신선도를 유지해야 하는 냉장고는 매일 24시간, 연중 365일을 쉬지 않고 일하는 가전제품이다.
15년 넘게 사용한 냉장고라면 정전으로 잠시 멈춘 시간을 빼더라도 13만 시간 이상을 작동한 셈이 된다. 주 평균 40시간을 일하는 임금노동자가 휴가도 없이 60년 넘게 일하면 13만 시간에 도달할 수 있다. 그렇다면 냉장고는 웬만한 인간과 맞먹을 정도의 업력을 쌓았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냉장고의 작동 시간은 에어컨, 공기청정기, TV, 전기밥솥, 전자레인지, 세탁기 등과 같은 다른 가전제품을 압도한다. 최첨단 전자기기인 스마트폰은 대체로 10년을 넘겨서까지 사용되지 않는다. 작동 시간만 놓고 보면 스마트폰도 냉장고에 견줄 상대가 되지 않는다.
냉장고 고장을 확인하고 이튿날 제조사에 수리를 신청하자 “부품이 단종돼 제품을 수리할 수 없다”는 회신이 돌아왔다. 결국 새롭게 구입한 제품을 배송받은 지난달 24일까지 17일 동안 냉장고 없이 살아야 했다.
냉장고를 사용할 수 없는 불편함이 찾아오자 그동안 의식하지 못했던 일상의 즐거움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마트에서 먹거리를 골라 가족에게 저녁밥으로 차려주는 행복, 퇴근길에 과일이나 아이스크림을 사 들고 귀가하는 일상의 사소한 재미, 어느 주말 하루쯤은 고기를 구워 먹는 사치도 결국 식재료를 냉장고에 보관할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고장 난 냉장고는 필요 이상으로 소비했던 과거의 실패들을 들춰내 죄책감도 안겨줬다. 내외부 온도 차이가 사라진 냉장고에서 해산물, 육류, 유제품, 달걀, 과일, 채소 순으로 상한 식재료를 매일같이 버려야 했다. 수년 전 어느 날 마트 바구니에 손쉽게 담았을 파스타 소스, 3개 가격으로 4개를 샀다며 합리적 소비라고 착각했지만 결국 2개를 버려 손해를 확정한 육가공품, 여행지에서 기분에 휩쓸려 산 현지 특산품 초콜릿이 유통기한의 ‘커트라인’에서 탈락해 포장도 뜯지 못한 채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새롭게 구입한 냉장고를 집으로 들여 일상을 되찾았을 때 가족과 모여 몇 가지 원칙을 정했다. 오래 두고 먹을 음식도 3개월 안에 소비할 정도의 분량만 구입하고, 새벽 배송 플랫폼을 이용할 때 스스로에게 수차례 되묻는 식으로 누구나 세울 수 있는 간단한 원칙들. 우선 쉽게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해 보겠다.
김철오 온라인뉴스부 기자 kcopd@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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