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를 본 문과생의 시선... 발명이냐 쓰임이냐
[최현준 기자]
▲ 영화 <오펜하이머> 공식 포스터 |
ⓒ 유니버설 픽쳐스 |
영화를 보기 전,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바로 이 영화를 어떤 장르로 볼지에 대한 것이다. 현재 관객들의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고 있는 이유도 이 영화를 대하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오펜하이머>를 과학 영화나 SF 영화로 기대하고 본 사람이라면 이 영화가 무척이나 지루했을 것이다. 반면, 나처럼 인물 영화나 다큐멘터리 영화를 기대했다면 이 영화를 무척 재밌게 봤을 것이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역동적인 씬은 결코 찾아볼 수 없으며, 워낙 등장인물이 많이 등장하는 탓에 누구인지도 헷갈리는 아저씨들이 테이블에서 이야기하는 게 영화의 절반을 차지하니 그의 전작을 기대하고 온 사람들이라면 지루할 수밖에 없던 영화다. 만약 당신이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한 편의 긴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고 온다고 생각해라. 그러면 조금 더 만족스럽게 영화를 재밌게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난 이제 죽음이요, 세계의 파괴자가 되어버렸다." - 오펜하이머
▲ 원자 폭탄을 발명한 오펜하이머 |
ⓒ 유니버설 픽쳐스 |
앞서 말했듯 이 영화는 오펜하이머에 대한 영화다. 그의 일대기를 모두 다룬 것은 아니지만 '그가 왜 원자폭탄을 개발했는지', '그의 평가가 왜 뒤바뀌었는지', '그리고 원자 폭탄을 개발한 당시 전 세계의 상황은 어땠는지'를 알 수 있는 영화다. 오펜하이어가 누군지 알고 보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느끼는 재미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기 때문에, 유튜브에선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기 전 시청하면 좋은 영상'같은 제목의 동영상이 올라오긴 한다. (물론, 나는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 아예 모른 채 봤지만) 영화의 주인공이 어떠한 사람인지 대충 알면 중요 장면에서 반가움을 느끼겠지만, 굳이 배경지식을 따로 공부할 만큼 그 중요성이 크진 않다. 애초에 내가 내 돈을 내며 즐기는 문화생활에 따로 무언가를 공부해야 하는 것도 이상하다.
"프로메테우스는 신들로부터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었다. 그 형벌로 그는 바위에 묶여 영원히 고통받았다." - <오펜하이머 > 오프닝 문구
▲ 원자 폭탄의 발명으로 미국의 영웅이 된 오펜하이머 |
ⓒ 유니버설 픽쳐스 |
영화에서 역시 오펜하이머의 원자폭탄 발명을 꺼려하는 이들이 다수 등장한다. 원자폭탄의 발명은 인류 과학의 위대한 발전이지만, 누군가는 이로 인해 발생할 후폭풍을 두려워한 것이다. 이는 마치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 때의 상황과 비슷하다.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을 만든 기분이었을까? 오펜하이머는 스스로 원자 폭탄을 만들면서 동시에 위화감을 느낀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발명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 것을 알면서도 끝내 원자 폭탄을 완성시킨다. 그는 영원히 고통받아야 하는 프로메테우스의 삶을 선택하고 받아들인 것이다.
자네는 전례없는 막강한 무기를 인류에게 선물한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가 될거야. 인류는 아직 이걸 감당할 준비가 안됐어 - 닐스 보어
▲ 미국인에게 환영받는 원자 폭탄. 그러나 오펜하이머는 연설 도중 정신적 이상을 겪는다. - 공식 스틸컷 |
ⓒ 최현준 |
과학과 인문학은 정반대의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떼어낼 수 없는 관계다. 영화 속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기술이 발전했고, 그러한 기술은 전쟁에 쓰인다. 전쟁은 나라 간의 갈등으로 이어지며 이러한 갈등은 곧 정치적 대립을 일으킨다. 영화에서 '원자 폭탄'만큼 많이 등장한 단어가 '공산주의'인 것만 봐도 그렇다. 정치와 문화, 철학 등의 인문학적 개념은 과학과 분리될 수 없다. 다만, 과학자들은 과학과 발전에 조금 더 집중하고 세상은 정치와 실리에 더 집중했을 뿐이다.
오펜하이머 입장에서 세상이 주목한 건 원자 폭탄의 '발명'이 아닌 원자 폭탄의 '쓰임'이었다. 그럼에도 핵무기가 없으면 전쟁이 종식될 것이라고 믿으며 오펜하이머는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원자 폭탄의 발명 이후에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인류의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세상이 바라는 건 과학의 발전이 아니다. 이상의 실현이 아니다. 세상은 과학을 그저 인간의 욕구를 채우는 수단으로 볼뿐이다.
▲ 다이너마이트의 발명으로 사후에 평가 받는 노벨의 모습 - 책 <재미있는 발명 이야기> |
ⓒ 허정림 |
"제 손에 피가 묻어있는 것 같습니다." - 오펜하이머
▲ 죄책감을 떨쳐내지 못하는 오펜하이머 - 공식 스틸컷 |
ⓒ 최현준 |
이 영화의 핵심이자 내가 가장 집중해서 바라본 부분이 이 부분이다. 원자 폭탄을 만들어 낸 오펜하이머. 그에게 윤리적인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를 죽음의 신으로 부를 수 있을까?
아직까지도 과학자와 윤리적 책임의 관계에 대한 뚜렷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나 역시도 영화를 보는 내내 과연 오펜하이머에게 책임을 추궁해야 하는지, 아니면 역사적 발전에 기여한 그를 옹호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본 뒤에 과연 그 시대의 상황을 겪어보지 못한 21세기의 내가, 과학도 윤리도 잘 모르는 제삼자인 내가 그를 평가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영화 속 비공식 청문회에서 오펜하이머를 "심판"하려는 위원장들. 그리고, 그의 잘잘못을 따지거나 무작정 그를 옹호하는 사람. 그들과 나는 다르지 않았다. 과연 나에게 누군가를 심판할 자격이 있는 걸까? 어느 누가 그를 심판할 수 있을 것인가? 위선적인 나의 모습이 테이블 건너의 사람들과 겹쳐 보였다.
영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장면은 오펜하이머의 얼굴이다. 그만큼 오펜하이머에 많은 감정이입을 할 수 있도록 감독이 의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오펜하이머였다면 어땠을까? 하고 말이다. 아무리 과학자라고 해도 한 인간에 불과할 것이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죄책감을 느낄 것이다. 영화 후반부, 승리했지만 기뻐하지 못하고, 기뻐해야 하는지, 죄책감을 가져야 하는지 혼란스러워하는 그의 모습에서도 우리는 알 수 있다. 원자폭탄을 만들어 낸 오펜하이머 역시 죄책감을 떨쳐내지 못한다는 것을. 오펜하이머는 "무기를 만드는 건 우리지만 어떻게 써야 할진 정부가 정해야 한다"라고 말했지만, 스스로도 그 말에 확신을 갖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과정을 이미 겪은 이와 얘기하며 담담하게 청문회의 결정을 받아들인다. 바로 동시대의 최고로 평가받는 과학자, 아인슈타인과 귓속말을 나누며.
▲ 실제 오펜하이머의 모습. 책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의 표지로 유명하다. |
ⓒ 사이언스북스 |
원자폭탄이 실제로 일본에 떨어진 이후 7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과연 오펜하이머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해야 할까. 공산주의 활동가? 일반인을 무시하고 여자를 좋아하는 괴짜? 인류의 과학 발전에 한 획을 그은 천재? 아니면 수십만 명의 사람을 살해한 죽음의 신? 오펜하이머에 대한 평가는 개인에게 달렸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를 통해 우리 개인은 집단을 형성할 것이며, 이 집단의 목소리가 커지면 이는 인문학으로 발전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의 연구성과와 더불어 원자폭탄을 발명한 인물에 대한 개인적 견해다.
이 영화를 보고 많은 관객들이 참여할 수 있는 토론의 장이 활성화되었으면 좋겠다. 그의 성과, 평판, 철학 등 어떠한 것이라도 좋으니 더욱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의견을 내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사람들이 '인간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어디로 무엇을 위해 나아가야 하는가?' 와 같은 인문학적 물음에 대한 질문에 관심을 갖게 될 테니 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영화는 과학 영화가 아니다. 한 사람에 대한 다큐멘터리이자, 우리에게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인문학 영화다. 영화 <오펜하이머>를 만든 놀란의 의도 역시 이와 같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끝으로 3시간 가까이 의자에 앉아 이 영화를 끝까지 시청한 관객들과 나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각자의 의견을 내며 토론하는 우리 21세기 인문학자들에게 동질감과 감사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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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최현준 시민기자의 개인 브런치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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