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하이엔드] “자꾸 오징어 그리는 이유는요...” 작가 남진우의 아름답고 끔찍한 우화
작가 남진우,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하다
남진우 작가의 그림은 ‘성화’ 같기도, ‘동화’ 같기도 하다. 유럽 중세시대의 제단화를 떠올리게 하는 3단 구성과 설치를 보면 영락없는 종교화다. 천사와 악마, 에덴동산은 기독교적 세계관을 반영한 것인가 싶다가도, 천수관음상을 그린 듯이 손이 수백 개인 괴물은 불교의 탱화를 연상시킨다. 사람의 형상보다는 주로 괴생명체와 날개를 두른 로봇이 등장해 이마에서 빛을 뿜고, 긴 창으로 대결하는 모습은 흡사 애니메이션 혹은 동화의 한 장면 같다.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 인근 자리한 작업실에서 지난달 24일 남진우(38) 작가를 만났다. 자신만의 고요한 성채에서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남 작가는 올해 ‘키아프 하이라이트’작가 20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됐다.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지 궁금하게 만드는, 신묘한 작품 속 등장인물들에 대해 먼저 물었다.
대왕오징어와 영웅의 서사
홍익대학교 미대에서 ‘오징어를 그리는 선배’로 유명했다던 남진우 작가는 오랜 기간 ‘대왕오징어’를 소재로 끌고 와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왔다. 회화를 중심으로 부조 및 입체 작업, 콜라주와 소묘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지만 소재는 늘 비슷하게 대왕오징어와 로봇, 괴물 등이다.
Q : 왜 오징어일까요. (웃음)
A : 어린 시절, 오징어라는 연체동물을 접하고 나서 그 생명체의 매력에 푹 빠졌다. 새롭고 낯선 데다가 신비롭게 느껴졌다. 점차 대왕오징어나, 전설 속 바다 괴물인 크라켄 등 보다 거대한 형태를 좋아하게 됐다. 대학교 때는 오징어를 그리긴 했는데, 주로 연필이나 볼펜으로 매우 사실적으로 그렸다.
Q : 지금은 매우 공상적인데.
A : 지금처럼 상상력이 가미된 왜곡된 형태는 군대 이후 만들어진 캐릭터다. 어릴 때 해외에서 생활하면서 고독했고, ‘로봇 태권V’ ‘마징가 Z’ 같은 전대물(실사 히어로물)이나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다. 중간에 잠깐 이런 현실 도피적 성향을 잊었다가, 군대 생활을 하면서 유년기의 트라우마가 살아났다. 그래서 내 작품을 두고 동심을 표현한다고 하는데, 사실 일그러진 동심이다.
미움받는 괴물, 일그러진 영웅담
Q : 그림 속에선 괴물이 악, 영웅이 선은 아닌 것 같다.
A : 어릴 때 로봇 만화를 보면 선한 쪽과 악한 쪽이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착한 편은 주로 인간의 형상이고, 악한 편은 주로 오징어 같은 이질적 모습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런 악당들의 디자인이나 이미지에 더 끌렸고, 주변 아이들로부터 공감대를 얻지 못해 고독했다. 이 지점부터 나만의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 같다.
Q : 대왕오징어에 더 이입하는 건가.
A : 대왕오징어는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나의 성향에 의해 만들어진, 나를 은유하는 존재다. 반대로 영웅은 나를 고독하게 만들었던 주변 다수다. 오징어가 괴물로 내몰린 존재라면, 영웅은 그 스스로가 괴물이 된 존재다. 둘 다 마냥 착한 것만도 아니고, 악한 것만도 아닌 각자가 사연이 있다.
나만의 신화, 올려다봤으면
남진우 작가는 만화와 애니메이션뿐만 아니라 성경과 영화, 신화, 민화 등에서 스토리와 구성 요소, 표현 방식을 차용한다. 날개 달린 천사, 창을 지닌 악마, 에덴동산이 등장하고, 3단 제단화를 본뜬 형식도 시도한다. 작품의 하단에는 중세시대 그림에서 볼법한 문양을 넣기도 하고, 광목에 유화물감으로 그린 후 가위로 오려내 붙이는 방법은 성당을 장식하는 부조를 연상시킨다.
Q : 종교적 색채도 엿보인다.
A : 살아오면서 좋아했던 모든 요소를 가져다 붙이다 보니 이런 형식이 만들어졌다. 일본 애니메이션 같은 그림체, 바로크·로코코 시대의 복잡한 문양과 장식체, 중세 판타지물에 등장하는 갑옷 캐릭터 등 흥미를 가진 모든 요소를 따왔다.
Q : 기독교적이기도, 불교적이기도 한데.
A : 서양 성화에 등장하는 지옥의 왕 루시퍼를 모티브로 해 작업한 건데, 설치하고 보니 의도치 않게 부처님이나 힌두의 신 같다는 의견이 나왔다. 초록색이나 주황색 등 사찰에 많이 쓰는 색의 영향도 있는 것 같다.
Q : 3단 형식이 인상적이다.
A : 중세 시대 제단화 형식이다. 성경도 따지고 보면 신화 같은 서사시다. 나도 나만의 신화·서사시를 표현하는 것이니, 성경을 담았던 모든 양식을 활용해보고 싶다. 사람의 눈높이보다 조금 높게 걸린 성당 그림처럼, 압도감을 느꼈으면 한다.
“고여 있는 시간 필요, 나만의 색 발전시킬 것”
Q : 이 서사의 결말이 있나.
A : 현재까지는 끝나지 않는 이야기다.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대결 구도에서 벗어나서, 화합하는 과정으로 보여주는 마무리를 희망하고 있다. 아마도 앞으로는 괴물과 영웅의 대결 구도만이 아닌, 둘 사이에서 중립적 역할을 하는 조정자가 등장할 예정이다.
Q : 세계관의 확장인 건가.
A : 오징어에만 몰두했을 때는 오징어가 사는 세상을 그려보자고 했고, 왕국이 탄생했다. 그리고 영웅이라는 반대급부의 존재가 생겼고 여기서부터 작업이 보다 뚜렷해졌다. 이 세계관을 더 확대해서 다른 존재들도 담아내고 싶다. 마치 메타버스처럼.
Q : 어떤 작가가 되고 싶나.
A : 한결같은 작가다. 결국 내가 만든 왕국의 서사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게 나의 작업 방식이다. 어떤 방식으로, 어떤 매체를 가지고 작업하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고 세계관을 심화시키는 방식으로 해나가고 싶다. 세상이 빠르게 흘러가지만, 오히려 요즘은 고여 있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머무르고 고여 있을 때 나만의 색이 발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
■ 작가 남진우는...
「 1985년생.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학사 졸업. 2023년 에디트한남, 2022년 오시선, 2021년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아웃사이트, 2020년 벗이미술관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 젊은모색·천안미술관, 2019년 대안공간루프, 2019년 금천문화재단 빈집프로젝트·베이징 코뮨·대구미술관 등의 기획전에 초대되었으며 2023년 송은미술대상전에 선정, 전시 예정이다. 참여 레지던시로는 익산창작 스튜디오, 독일 라이프치히 HALLE14(Spinnerri) 등이 있다. 소장처로는 서울시립미술관, 벗이미술관, 마드리드의 Soleccion Solo 등이 있다.
」
■
「 다시 한번 한국이 예술로 들썩이고 있습니다. 오는 9월 6~9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리는 키아프 서울·프리즈 서울이라는 걸출한 두 아트페어 덕분입니다. 두 페어의 개최 기간에 맞춰 전국 곳곳에서 열리는 아트 이벤트도 참 많습니다. 예술에 대한 관심이 폭증한 이때, 한국의 작가들에 대해 한 걸음 더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 중앙일보가 출품 준비에 한창인 작가들을 만났습니다. 키아프가 올해 처음으로 선정 발표한 '키아프 하이라이트 작가' 중 시간적·지리적으로 인터뷰가 가능했던 한국 국적의 작가들입니다. 직접 작가들을 만나보니 왜 이들이 스스로를 "노동집약형"이라고 말하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창의성을 오랜 시간을 들여 묵묵히 작업해 나가는 작가 10인을 매일 1명씩 '나는 한국의 아티스트다' 인터뷰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
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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