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사관학교를 더럽힌 초대 공군참모총장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2023. 9. 3.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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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김정렬

[김종성 기자]

 2018년 6월 8일 서울 노원구 육군사관학교 연병장에서 열린 독립군과 광복군의 전신인 신흥무관학교의 107주년 기념식에서 생도들이 분열을 하고 있다.
ⓒ 이희훈
육군사관학교가 독립투사 홍범도·김좌진·지청천·이범석·이회영의 흉상을 철거하고 친일파 백선엽의 흉상을 설치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항일투사들을 토벌했던 친일군인 백선엽의 길을 육사 생도들에게 권유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 충격적인 일이다. 좌파 항일운동이나 무장 독립투쟁에 대한 평가를 떨어트리려 하는 윤석열 정권의 움직임과 무관치 않은 장면이다.

홍범도처럼 무기를 들고 일본제국주의에 맞선 투사들의 대부분은 제국주의에 비판적인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나 공산주의자다. 좌파 독립운동가들을 솎아내려는 윤 정부의 작업은 아무래도 무장 독립운동가들 쪽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다.

이는 일본이 허용한 합법적 범위에서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무기를 든 세력에 대한 보복을 뒤늦게 윤 정권이 대신해 주는 셈이다. 일본의 기시다 후미오 내각도 아니고 한국 정권이 그런 역할을 해주는 것은 어이없는 일이다. 이런 흐름에 육군사관학교까지 가세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육사가 흉상을 모셔 오겠다는 백선엽은 대한민국 육군을 모독한 인물이다. 일본 편에 가세해 한민족을 억압한 인물이 한국 육군에 몸을 담근 것 자체가 육군에 대한 모독이다. 이것이 육군에 대한 모독이 아니라고 말하는 육사 및 육군 관계자가 있다면, 이는 육군의 정훈교육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뜻이 된다.

백선엽처럼 한국 육군을 모독하고도 한국에서 떵떵거리며 살아간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공군참모총장, 국방부 장관, 민주공화당 초대 의장 등을 지낸 김정렬 전 국무총리도 그런 사례에 속한다. 그 역시 육군을 더럽혔다. 그런데도 을지무공훈장·충무무공훈장·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한국 육군을 모독한 인물이 한국에서 칭송을 받는 한국 현대사의 부조리한 장면 중 하나다.

일본 육사 나온 뒤 조종사로 변신해 초대 공군참모총장
 
 일본 육군 항공대 복무 시절 김정렬
ⓒ 위키미디어 공용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7년 9월 29일 일본 가가와현에서 출생한 김정렬은 경성공립중학교를 졸업한 뒤인 1937년 12월 일본 육사에 입학했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 김정렬 편에 따르면, 그는 "일본군 보병대위 출신인 김준원(일본 육사 26기)의 아들이자 일본군 공병 중좌를 지낸 김기원(일본 육사 15기)의 조카"다. 이런 배경 때문에 일본에서 태어났다가 아버지가 제대하면서 귀국해, 한국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다가 일본으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고교 과정인 일본 육사 예과를 거쳐 1939년 3월 본과에 들어간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 9월에 졸업했다. 이듬해에 육군항공사관학교 전투기과에서 비행훈련을 마친 뒤 항공 소위로 전쟁에 뛰어들었다.

만약 일본이 패망하지 않았다면, 그는 대한민국의 총리보다는 일본의 전쟁영웅으로 기억됐을 수 있다. 지금의 한국인들에게는 정당인이나 행정관료로 기억되고 있지만, 일제강점기의 그는 일왕(천황)을 위해 하늘로 올라가 혁혁한 무공을 세운 전사였다.

1941년 12월 8일, 일본군이 진주만을 전격 공습했다. 태평양전쟁의 발발이다. 이날 일본군의 기습 공격이 하와이에서만 벌어진 것은 아니다. 필리핀과 싱가포르 등에서도 동시에 진행했다. 이날 중위 김정렬은 필리핀 전선에 급파돼 미국 공군과 전투를 벌였다. <친일인명사전>은 "1941년 12월 8일 오전 5시 필리핀 공격 작전에 참가해 미군 공군력을 거의 궤멸시켰다"고 서술한다. 일본군의 승승장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것이다.

그 뒤로도 그는 일본 본토와 인도네시아 등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일왕의 항복 선언 직전에는 인도네시아 주변에서 "영국 비행기와 거의 매일 공중전을 치렀다"고 위 사전은 설명한다.

1937년에 일본 육사 예과에 입학한 뒤부터 제국주의의 밥을 먹으며 일본을 위해 8년간 살았다. 그런 중에 혁혁한 전공도 세웠다. 이렇게 친일 봉급을 받으며 일제에 충성한 전 일본군 대위 김정렬은 해방 뒤 아무렇지도 않게 한국 육사를 노크했다.

그는 일본 육사 입학 10년 만인 1947년 10월에 서른 살 나이로 한국 육사 5기로 들어갔다. 태평양전쟁 발발 당일에 미 공군력을 궤멸시킨 전투기 조종사가 한국 육사의 늦깎이 신입생으로 변신했던 것이다. 이 자체만으로도 한국 육사는 모독을 당한 셈이다.

일본 육사를 나온 뒤 조종사로 변신한 그의 모습은 일제 패망 뒤에도 반복됐다. 1948년에 한국 육사를 졸업한 그는 육군항공사령부 비행부 대장, 육군항공사관학교 교장 등을 거쳐, 공군이 독립된 1949년 10월에 초대 공군참모총장이 됐다.

이승만 정권 후반부인 1957년에 예편하고 국방부 장관을 지내던 그는 15년 전에 겪은 것과 유사한 일을 또다시 겪게 됐다. 충성을 바치던 정권이 갑자기 무너지는 일이었다. 1945년에 히로히토 일왕의 항복선언으로 실직자가 된 그가 1960년 4·19혁명 때의 이승만 하야 성명으로 또다시 실직 위기에 놓이게 됐던 것이다.

전 정권 장관 자격으로 이승만 망명에 관여
 
 이승만 대통령과 공군참모총장 시절의 김정렬(왼쪽에서 두번째)
ⓒ 위키미디어 공용
그러나 이때도 살아났다. 1년 뒤에 5·16 쿠데타가 일어나고 1963년에 민주공화당 초대 의장이 됐고, 박정희 정권하에서 주미대사·국회의원과 반공연맹 이사장 등을 지냈다.

그가 몸담은 제4공화국 정권(유신정권)은 1979년 10·26사태를 계기로 1980년 8월 16일에 막을 내렸다. 박정희의 후계자인 최규하 대통령의 사임으로 8년 만에 문을 닫은 것이다. 이로 인해 박 정권 사람들은 대체로 불이익을 받거나 고초를 당했지만, 그는 제5공화국하에서도 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과 국정자문위원에 이어 국무총리를 지냈다.

김정렬의 생각은 다를 수도 있지만, 한국 현대사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인생에서 분기점이 된 것은 28세 때인 1945년, 43세 때인 1960년, 63세 때인 1980년이다. 세 연도는 그가 몸담은 정권이 패망하거나 없어진 시점이다. 그는 그 세 번을 다 살아남았다. 세 정권 모두 세상의 지탄을 받은 정권들인데도, 그는 매번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남았다.

그 셋 중에서 두 시점에 그는 인상적인 행동을 보였다. 몸담았던 정권을 마무리하는 데에 관여한 점이다.

이승만 사망 다음 날 보도된 1965년 7월 20일 자 <경향신문> 기사 '한 시간만 늦었더라도'는 이승만의 하야에 관한 비화를 다뤘다. 이 기사는 이승만이 하야 결심을 굳힌 1960년 4월 26일 오전 9시 10분경 이승만에게 상황의 급박성을 알린 인물 중 하나로 김정렬을 거론했다. 김정렬 국방부 장관, 박찬일 비서관,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바깥 상황을 보고받은 뒤에 이승만이 사퇴 결심을 굳히고 하야 성명서 작성을 지시했다고 한다. 성명은 오전 10시 20분에 발표됐다.

김정렬은 이승만의 하와이 망명에도 관여했다. 당시의 미국 중앙정보국(CIA) 한국지부장인 피어 실바의 회고를 담은 1982년 5월호 <신동아> 특집 기사를 소개한 그달 3일 자 <동아일보>에서 김정렬의 활약상을 확인할 수 있다.

위 기사는 CIA가 이승만 하야 및 망명에 관여한 일을 언급하면서 "이 과정에서는 당시 미국 측에서 메카나기 주한미국대사와 매그루더 주한 8군 사령관, 한국 측에서 김정렬 당시 국방장관이 주요한 역할을" 했다고 설명한다.

김정렬이 국방부 장관직에서 물러난 것은 1960년 5월 3일이고, 이승만이 이른 아침에 망명한 날은 그달 29일이다. 위 기사에 쓰인 "김정렬 당시 국방장관"이란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김정렬이 전 정권 장관의 자격으로 이승만 망명에 관여했다고 이해해야 한다.

식민지배 역사를 도로 불러들이는 데 일조
 
 1993년 9월 12일 자 <동아일보> '남산의 부장들 (155) 김정렬 '최대통령 하야 설득 담판'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히로히토와 이승만·박정희에 이어 김정렬의 네 번째 주인이 될 전두환은 1979년 12·12 쿠데타 및 1980년 5·17 쿠데타에 이어 5·18 광주학살과 뒤이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5.30) 수립으로 사실상의 대통령이 됐다. 이때 전두환에게 가장 걸리적거린 인물은 유신정권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대통령인 최규하였다. 전두환은 알아서 그만두기를 염원했지만, 최규하는 그럴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이때 전두환의 가려운 데를 긁어준 이가 김정렬이다. 최규하 정부의 총리였던 신현확은 전두환의 요청을 단칼에 거절한 반면, 박 정권하에서 공화당 의장을 지낸 김정렬은 박 정권의 유산인 최규하 정권을 소멸시키는 데 적극 앞장섰다.

이 과정을 정리한 1993년 9월 12일 자 <동아일보> '남산의 부장들' 제155회는 일언지하에 거절한 신현확과 달리 "그는 적극적으로 나섰고, 결국 전 사령관에게 커다란 선물을 안겨주었다"라고 말한다.

최규하는 "지금 국민들은 군인들이 나서는 것보다 나같이 별 의심이 가지 않는 사람이 과도정권을 끌고가기를 원하고 있다"며 민심이 자기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김정렬은 여러 차례에 걸쳐 최규하를 설득한 끝에 결국 사퇴 결심을 끌어냈다. 박 정권의 유산인 최규하 정권이 전두환 정권에 길을 비켜주도록 만든 것이다.

자신이 몸담았던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을 마무리하는 데 관여했던 김정렬의 모습은 옛 주인인 히로히토의 나라와 관련해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1945년에 28세였던 김정렬이 패망 직후의 일본제국을 마무리하는 일에 나설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한일협정이 강행된 1965년의 행보를 통해 일제 식민잔재를 마무리할 생각이 전혀 없음을 표시했다.

온 국민의 저항과 분노 속에 한일기본조약과 부속 협정(통칭 한일협정)이 강행된 뒤인 1965년 7월 16일, 그는 한일협정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그날 발행된 <경향신문>은 대일 굴욕외교를 지지한 예비역 장성 103명의 성명 발표를 보도하면서 김정렬을 맨 먼저 거론했다. 김정렬은 이 성명의 대표로 거론됐을 뿐 아니라 성명서 발표 행사의 사회까지 맡았다.

이 장면은 1937년부터 8년간 일제에 충성하고 그 녹봉을 받은 김정렬이 그때의 충성심을 잊지 않았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승만 및 박정희 정권의 청산에 대해서는 불철저하나마 어느 정도 관여했다. 그랬던 그가 일제 잔재 청산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음을 명확히 표시했다. 그는 식민지배의 역사를 청산하기는커녕 그것을 도로 불러들이는 데에 일조했다.

김정렬 같은 사람들이 다녀간 곳이 한국 육군사관학교다. 이런 이들이 육사를 다녀간 뒤 한국 사회는 더욱 오염됐다. 이는 육사가 자신을 정화하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에서 독립투사들의 흉상을 치우고 친일파 백선엽의 흉상을 들인다면, 육사가 스스로를 깨끗이 할 기회는 더욱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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