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황제에게 굽실거려"…브렉시트 4년, 멀어진 '대영제국' 꿈[글로벌리포트]
"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이후 고물가·저성장의 덫에 갇힌 영국이 총선을 앞두고 경제 위기 타개책 마련을 위해 중국에 손 내밀고 있다.” "
제임스 클레버리 영국 외무장관이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중국을 방문해 “양국 관계를 긍정적으로 가져가는 것이 더 넓은 세계에 이익”이라며 영·중 관계 개선의 신호탄을 쏘자, BBC 방송과 가디언, 파이낸셜타임스(FT) 등은 연이어 비판적인 기사·논평을 쏟아냈다. 집권당인 보수당의 전 대표인 이언 덩컨 스미스 하원의원은 “코우토우(kowtow, 중국 황제에게 굽실거리다)의 최신 버전”이라며 “영국의 약함을 여실히 드러냈다”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中과 황금시대 끝났다"더니 "공동 이익" 강조
그간 영국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반중(反中) 동맹의 일원으로, 대(對)중 강경 노선을 유지해왔다. 이는 EU 국가의 수반들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하며 ‘실익 외교’의 속내를 감추지 않았던 것과는 차별화된 행보다.
실제로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지난해 11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4월),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3월) 등 EU 회원국 정상들은 수십 명의 기업인을 대동해 베이징을 찾았고, 중국은 주요 구매 계약 체결하며 “미국의 대중 압박 정책에 동조하지 마라”고 설득했다.
반면 영국은 2019년 홍콩 민주화 시위에 대한 대응, 2020년 홍콩 국가보안법 시행을 두고 중국을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 각을 세웠다. 2021년 1월 영국이 1997년(영국이 홍콩을 중국에 반환한 해) 이전에 태어난 홍콩인을 대상으로 영국 시민권 신청 혜택을 확대하자 이미 악화일로를 걷던 양국 관계는 바닥을 찍었다.
보리스 존슨 전 총리(2019~22년)는 중국 화웨이의 영국 5세대(G) 네트워크 투자를 막았고, 리즈 트러스 전 총리(2021년 9~10월) 중국을 영국에 대한 ‘위협’으로 분류하고 중국에 맞설 ‘아시아판 나토’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지난해 취임한 리시 수낵 총리 역시 중국을 “시스템적 도전”이라 규정하고 “영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협하는 존재”라고 강조했다. 또 “중국과의 황금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하는 등 전임 총리들의 대중 강경책을 계승할 뜻을 분명히 했었다.
브렉시트로 영국병 귀환…'브레그레트' 정서 만연
BBC 등은 클레버리 장관이 그간의 기조를 뒤엎고 5년만에 베이징을 방문해 “상호존중, 교류, 소통” 등을 강조한 배경에는 ‘브렉시트 후유증’이 자리잡고 있다고 지적했다. 영국은 2020년 1월 브렉시트 이후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영국 파운드화 가치가 추락 했고, 수입 물가는 뛰어올랐으며, 기업 비용이 증가해 교역·투자·경제 성장이 둔화됐다.
브렉시트의 덫에 갇힌 영국이 독일에 이어 ‘유럽의 병자’로 추락할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온다. 앤드루 베일리 영란은행(BOE) 총재는 FT에 과거 영국병으로 이어졌던 ‘임금과 물가의 악순환’이 재현되고 있다고 전했다. 인플레이션을 바탕으로 상승한 임금이 물가를 밀어 올려 노동자들로 하여금 더 강한 임금 인상을 요구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영국의 경제 지표는 암울하다. BOE는 브렉시트로 인한 영국의 생산성 손실 규모가 국내총생산(GDP)의 1.3%에 달하며, 총 손실 규모는 290억 파운드(약 48조원)로, 가구당 약 1000파운드(약 170만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했다. 브렉시트를 하지 않았을 경우와 비교하면 해외국과 상품 교역이 10~15% 하락했고, 이는 GDP 대비 3.2%에 달하는 타격이라고 설명했다.
소비자물가 상승은 심각한 수준이다. 지난해 10월 전년 대비 11.1% 상승해 40년 만에 최고 기록을 세운 뒤, 10%대 급등세를 이어갔다. 지난 7월 영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6.8%로 진면 국면을 보였지만, 유로존 20개국(5.3%), 미국(3.2%)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영국이 주요 7개국(G7) 중 유일하게 역성장(-0.6%)할 것이란 암울한 관측을 내놨다. 임금은 계속해서 오르고 있다. 지난 2분기 영국의 급여 상승률이 전년 동기 대비 7.8% 상승했고, 이는 2001년 자료 집계 이후 최고치를 경신한 것이라고 전했다.
런던 킹스칼리지의 조너선 포테스 교수는 FT에 “브렉시트 여파로 영국 경제는 펑크가 나서 서서히 바람이 빠지는 타이어처럼 둔화 중”이라며 영국 경기 침체 원인이 브렉시트 때문임을 분명히 밝혔다. 영국은 우크라이나와 멀리 떨어져 있어 전쟁 영향도 낮고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 역시 다른 EU 국가에 비해 낮지만, 브렉시트로 인한 물류비 증가와 노동력 부족 등으로 생계비 위기에 직면했다는 것이다.
영국인 사이엔 ‘브레그레트’(Bregret·브렉시트에 대한 후회) 정서가 확산되고 있다. 여론 조사 기관인 유고브(YouGov)가 지난달 영국인 2000여명을 조사한 결과, ‘브렉시트 결정이 잘못된 것이었다’는 응답은 57%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EU 재가입에 찬성한다는 응답자도 과반(51%)으로 나타났다.
中 유화책, 다음 총선 '반전 카드'
가디언은 이번 클레버리 장관의 방중으로 “브렉시트 당시 품었던 환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확인됐다”고 전했다. 당초 영국은 브렉시트를 통해 EU의 일원이 아닌, 그레이트 브리튼(대영제국)으로서 당당한 존재감을 과시하고 미·중 등 주요국과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는 등 전략적 자율성을 발휘해 국익을 극대화하려 했다.
하지만 막상 브렉시트 이후엔 경제력과 지정학적 영향력이 추락하면서 외교에서 ‘영국적 가치’로 고수하던 인권·민주주의·자유 등의 가치마저 뒷전으로 미루는 모양새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영국 의회에선 영국이 유럽에선 고립되고 중국을 포용하게 되는 것 아니냐고 우려하고 있다. 클레버리 장관의 방중 전날 영국 하원 외교위원회가 대만을 독립국가로 인정한다는 내용을 보고서로 채택한 것 역시 중국에 대한 유화 분위기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란 해석이 나온다. 실제로 영국 통계청(ONS)는 브렉시트로 영국과 EU 간 교역량이 줄고, 중국에 대한 무역 의존도는 커졌다고 전했다. 브렉시트 이전 영국의 최대 교역국은 독일이었지만, 지난해 기준 영국은 독일의 10대 교역국에서 사상 처음 이름이 빠졌다. 반면 중국은 독일을 제치고 영국의 최대 수입국이 됐다.
늦어도 2025년 1월 진행될 총선이 영국의 현 내각을 중국 쪽으로 밀어붙이는 동력이 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브렉시트로 인한 경제 위기가 다음 총선에서 최대 이슈로 떠오를 게 뻔한 상황에서, 내각이 선거 승리를 위해 중국과 경제적 협력을 통해 ‘반전 카드’ 마련에 올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BBC는 이달 9~10일 인도 뉴델리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수낵 총리가 시 주석과 만나, 투자 확대 등을 논의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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