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독립운동, 끝은 한국전쟁... 조선의용군의 비참한 최후 [윤태옥의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윤태옥(답사 여행객)]
▲ 한단시 진기로예열사릉원 조선의용군 기록 |
ⓒ 윤태옥 |
출발은 조국의 해방과 독립운동이었으나 전장은 시대의 격랑에 따라 항일 무장투쟁에서 중국 국공내전으로, 다시 조국의 한국전쟁으로 바뀌어갔다. 동족상잔의 전면전에서 선제공격의 주역이었으나 정전 이후 북한의 권력투쟁에서 토사구팽을 당했다. 참극의 한국전쟁을 관통하는 굵직한 비극의 하나가 바로 이들, 조선의용군이다.
내가 처음 조선의용군의 흔적을 마주한 것은 2012년 10월 중국 섬서성 옌안의 뤄자핑(羅家坪)이란 작은 마을이었다. 건축기행으로 황토고원의 동굴집을 찾아갔다가 우연에 가깝게 마주쳤다. 1944~1945년 그곳에 주둔해 있던 조선의용군 군정학교 옛터의 표지와 허물어지다시피 한 허름한 동굴집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렇게 내 머릿속에 깊은 인상을 남긴 조선의용군과의 인연은 2016년 2월 이어졌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어느 날 중국 허베이성 스좌장을 거쳐 타이항산을 찾아갔다. 윤세주, 진광화, 무정, 김학철, 정율성, 박일우, 박효삼, 김두봉... 황베이핑촌, 후자좡촌, 난좡촌, 윈터우디촌, 좡쯔링...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역사라서 더욱 진하게 다가왔다. 코로나19가 막아서기 전까지 세 번이나 더 찾아다녔다.
시작은 '조국해방'이었지만... 지옥문 열어젖힌 그날
한국전쟁의 비극이 시작된 그날, 38선에는 북한 인민군 보병 21개 연대가 동서로 늘어서 있었다. 개전포격이 끝나자 자주포와 탱크를 앞세우고 일제히 남쪽으로 진공하기 시작했다. 기습적이고 전면적인 공격이라 남침 또는 침략이란 말로 압축되곤 한다.
그 전에 국지적인 충돌이 있었지만 전면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들은 조국해방 국토완정(完征)이라고 외쳤지만 그것은 곧 대량살상 동족상잔이란 지옥의 문을 열어젖힌 것이었다. 모든 것을 그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한, 요즘 말로 불가역적인 일대 사건이었다.
▲ 조선의용군 이동로(타이항산 유적지) |
ⓒ 윤태옥 |
▲ 중국 공산당 팔로군 사령관인 주더(朱德)의 명령문 |
ⓒ 윤태옥 |
조선의용군과 관련해서 중국 답사에서 따로 스크랩을 해둔 것이 있었다. 타이항산의 우즈산(五指山)에 있는 조선의용군 옛터에서 본 전시물이었다. 하나는 일제 패망 후 조선의용군 이동과 연안파 간부의 입북경로 지도였고, 또 하나는 조선의용군에게 하달한 중국 공산당 팔로군 사령관인 주더(朱德)의 명령문이었다.
그의 명령은 "소련 홍군의 중국과 조선 경내로의 진입작전을 돕고 조선 인민을 해방하기 위해, 지금 화베이에서 대일 작전을 하고 있는 조선의용군 사령 무정, 부사령 박일우, 박효삼은 즉시 소속부대를 통솔해 팔로군과 동북군 각 부대를 따라 동북으로 진격해 적 괴뢰군을 섬멸하는 동시에 동북의 조선인민을 조직해 조선을 해방하는 과업을 달성"하라는 것이었다.
이동경로 지도에 따르면 옌안을 떠난 조선의용군 본부는 허난성에서 북상해온 부대와는 타이위안에서 합류했고, 그 다음 안후이성과 장수성에서 출발해온 의용군과는 장자커우에서 합류했다. 그곳에서 청더와 진저우를 거쳐 선양에 도착했다.
조선의용군은 당연히 조국으로 들어가고 싶었으나 새로운 점령군인 소련군에 길이 막혔다. 이들은 3개 지대로 나누어 남만주, 북만주, 동만주로 이동했고, 조선독립동맹의 간부들은 단둥을 거쳐 평양으로 먼저 들어갔다. 이들이 바로 연안파다.
▲ 조선의용군 정율성 부부 |
ⓒ 윤태옥 |
▲ 조선의용군 옛터 전시물 |
ⓒ 윤태옥 |
조선의용군은 1938년 10월 김원봉의 주도로 조선민족전선연맹이 중국 국민당과 제휴해 우한에서 '조선의용대'란 명칭으로 창설했다. 조선민족전선연맹은 계급이 아닌 민족을 앞세운 조선인들만의 독립운동 단체였다. 김원봉(민족혁명당), 김성숙(조선민족해방동맹), 유자명(조선혁명자연맹, 무정부주의자 단체), 최창익, 김학무(조선청년전위동맹)가 연합했다.
조선의용대 창설 초기에는 대원들이 국민당의 화중·화남 전선에 배치돼 일본군과의 전선에서 정치선전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조선인이 없는 지역에서 벌이는 정치선전 활동에 젊은 대원들이 회의를 품게 됐고 장제스의 항일의지에 대해서도 의심했다.
이들은 화북(華北)를 거쳐 만주로 진출하면서 그곳의 조선인들을 흡수해 힘을 키우고 일본군을 격파해 조국의 해방을 이루자는 주장을 했다. 김원봉은 이들의 '북상(北上)전략'을 받아들였다. 1941년 김원봉과 본부 인원을 제외한 대다수의 조선의용대의 주력은 국민당의 감시를 피해 뤄양에서 황하를 건너 타이항산의 중국 공산당 팔로군 지역으로 들어갔다.
조선의용대는 팔로군이라는 스스로 선택한 환경 속에서 적응하고 변화해갔다. 처음에는 창설을 주도한 것은 김원봉이었으나 북상한 이후에는 북상을 주도한 최창익으로 주도권이 옮아갔다. 그 다음에는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에도 참여했으며 마오쩌둥의 신뢰를 받는 무정이 합류하면서 주도권을 장악했다. 이때 명칭도 조선의용대에서 조선의용군으로 바뀌었다.
조선의용대로 출발한 무장조직의 상급기관, 곧 군사적 명령을 하달하는 주체도 변경됐다. 창설 당시에는 국민당과 공동으로 구성하는 지도위원회가 상급기관이었으나 북상 이후에는 화북청년연합회로, 다시 조선독립동맹으로 변경됐다. 최종적으로는 중국 공산당이 주도하는 동방각민족반파쇼동맹의 무장대오로 규정됐다.
만주로 진공한 조선의용군은 만주의 조선인들에게 상당한 환영을 받았다. 조선의용군은 1·3·5지대로 나눠 만주의 조선인 밀집지역으로 신속하게 뻗어갔다. 조선의용군에 대해 환상에 가까운 존경심을 품고 있던 조선인 청년들이 대거 입대하면서 비약적으로 몸집이 커져갔다. 같은 시기, 같은 지역에서 임시정부의 광복군이 확군하려다가 실패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중국 공산당과 제휴해온 조선의용군은 1946년 초 동북민주연군으로 개편되면서 조선의용군이란 명칭도 해소됐다. 동북민주연군은 1948년 동북인민해방군으로 개편됐다.
▲ 조선의용군의 전개와 변신 |
ⓒ 박종현 |
이들의 확군 과정은 3지대 경우만 봐도 쉽게 이해할 할 수 있다. 3지대는 1945년 11월 주덕해(훗날 옌볜조선족자치주 주석)가 이끌던 조선의용군과 이상조(조선독립동맹 북만주특위)가 이끌던 조선인 부대가 합쳐진 것이었다. 3지대는 하얼빈 지역의 국민당 지방부대 토벌전에 참가했다. 이들의 첫 전투는 1946년 2월의 무란현 전투. 3지대는 빠른 속도로 연대 규모로 성장했다.
1948년 5월 무단장(牧丹江)의 조선인들로 이루어진 1개 연대, 그리고 조선의용군 7지대와 합쳐 3개 연대가 편제되는 독립11사단이 됐다. 이들은 화전현의 도시방어와 치안유지를 맡았고 인근 지역에서 몰려든 조선인 청년들을 흡수했다. 독립11사는 1948년 11월 중국 인민해방군 164사단이 됐다.
1지대와 5지대 역시 3지대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성장했다. 남만주의 1지대는 독립4사단을 거쳐 166사단이 됐다. 동만주로 향한 5지대는 옌볜의 조선청년들을 흡수하면서 독립15사단을 거쳐 156사단이 됐다. 1945년 11월 선양에 집결했을 때 1천 명 수준이었던 조선의용군은 그 다음해에는 1만 명 규모로, 1949년에는 5만여 병력으로 확군했다. 실로 엄청난 성장이었다.
만주조선인부대는 중국혁명에 참가해 간부를 양성하면서 조국혁명을 위한 역량을 키우겠다는 전략이었지만 상층 간부와 일반 사병의 정서는 좀 달랐다. 중국 공산당이나 조선의용군 상층부는 이념적 동지와의 국제연대를 대단히 중시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중국인들에게 조선인이란 일본제국주의에 충성했던 앞잡이거나 밀정들이었다. 심지어 '아편 삐끼'들이라는 부정적인 인상도 있었다. 안중근과 같이 양쪽에서 존경받는 투사가 있기는 했으나 일상은 그렇지 않았다.
중국의 사회주의 진영 안에서도 민족갈등이 있었다. 옌볜에서 벌어진 토지개혁과 청산운동의 경우 중국인 간부들이 현지의 조선인 간부들을 차별적으로 숙청하기도 했다. 중국 인민해방군으로 편제를 바꾼 다음에 만주조선인군대의 정책임자는 항상 중국인이었고 조선인은 부책임자에만 보임하는 것도 그랬다.
이런 기류 속에 국공내전의 만주지역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조선인 대원들 사이에선 '이제는 조국으로 돌아가자'는 정서가 생겨났다. 만주의 승리 후에 베이징과 톈진까지 진공한 다음에는 '이제 할 만큼 다 했다'는 기류가 강해졌다. 창강을 넘어서자 이런 기류는 더욱 팽배했다. 중국 공산당 지휘부 역시 조선인 부대는 귀국해야 한다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북한이 1949년 이들의 귀국을 요청했고 한국전쟁 전에 보병 10개 연대가 입북한 것이다.
그들은 왜 한국전쟁 전면에 나섰을까
1949년 7월 중국 인민해방군 166사단은 북한으로 들어가 즉시 인민군 6사단으로 개편됐다. 164사단도 인민군 5사단으로 개편됐다. 1950년 봄 156사단이 입북해 인민군 12사단이 됐고, 중국 4야전군의 조선인들을 집결시켜 편성한 부대는 정저우에 집결해 기차를 타고 신의주를 통해 입북해 인민군 4사단의 18연대가 됐다.
이들은 입북하자마자 즉시 북한 국적을 취득했고 중국 공산당 당원은 조선노동당의 당원으로 심사 없이 전환됐다. 심지어 군복도 한꺼번에 인민군 복장으로 일제히 갈아입었다.
이 시기의 귀국은 일제의 패망 직후의 귀국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때는 38선을 분단으로 인식은 했지만 아직 전쟁은 아니었다. 그러나 1948년 남북의 정부가 따로 세워지면서 한반도의 분단은 기정사실화했고 1949년부터는 국토완정이란 구호 아래 전쟁으로 성큼성큼 다가가고 있었다.
▲ 조선의용대 후자좡촌 전투기념비 |
ⓒ 윤태옥 |
조선의용군 지휘부는 왜 전면전에 동의하고 주력으로 나섰을까. 한국전쟁은 김일성이 주도해 중국과 소련을 설득해서 감행했다. 그러나 조선의용군만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망국기에 자신들을 지원해준 동맹국 중국의 국공내전에 참가했다. 거기서 그들은 성공체험을 했다. 내전에서 이기면 그것이 혁명의 성공이라는 것.
혁명이라는 수사 아래 내전은 백성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사병들은 또 얼마나 죽어나가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성공했다. 성공체험으로 인해 혁명은 전쟁이고 전쟁은 혁명의 지름길이라는 인식이 그들에게 더 강해진 것은 아닐까. 그것이 김일성의 전면전을 확고하게 받쳐준 것이 아닐까. 조선의 독립운동은 직접 성공하지 못했으나 중국 국공내전에서 승리했다. 실패 뒤의 성공이 다시 동족상잔이란 극단의 실패까지 몰고 간 게 아닐까.
다시 타이항산을 떠올린다. 산과 산은 멀리서 보면 첩첩이라 한 덩어리 같지만, 가까이 보면 계곡으로 나뉘고 능선 따라 이어지기가 복잡하게 얽힌다. 38선의 만주조선인부대 10개 연대는 타이항산의 조선의용군과 정치적으로도 인맥으로도 직접 이어진다. 그와 동시에 일제의 패망과, 조국의 해방, 미소의 분할점령, 중국의 국공내전이라는 연접한 계곡들로 나뉘기도 한다. 하나인 듯 둘이고 둘인 듯 하나다.
▲ 한단시 진기로예열사릉원 조선의용대 윤세주의 묘 |
ⓒ 윤태옥 |
▲ 한단시 진기로예열사릉원 조선의용대 진광화의 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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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자좡촌 항일문학비 김학철과 김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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