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 쓰탈린당의 충직한 당원" "조선빨찌산의 거두"…홍범도 부고 살펴보니
홍범도 생애후반기 평가에 중요자료
"출신성분·계급투쟁·당성만 평가…
독립기념관 모셔야 고인도 기쁠 것"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육군사관학교 경내에서 독립기념관으로 이전하는 문제를 놓고 정치권이 소란스럽다. 홍 장군의 흉상을 어디에 모시는 게 적절할지는 역사적 사실의 문제인데도 정치쟁점화 되고 있다는 점에서, 자칫 후쿠시마 원전 오염처리수 방류 문제처럼 총선을 앞두고 표심에 영향을 미치려는 선전선동으로 점철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2일 데일리안 취재를 종합하면 홍범도 장군의 흉상 이전 문제는 홍 장군의 생애 전체를 객관적으로 평가해, 고인의 업적 중 후손들에게 가장 귀감이 되는 순간을 빛낼 장소에 설치하는 게 맞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1920년대초 봉오동·청산리 전투 등 홍 장군의 민족독립운동 업적과 함께, 1943년 홍 장군이 타계했을 때의 부고 기사 등을 통해 이후 소련공산당에서의 활동 등도 객관적으로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소련 전역에서 구독 가능한 유일한 한글 신문이었던 '레닌기치(레닌의 깃발, Ленін кичи)'는 1943년 10월 27일자 신문에서 2면에 홍범도 장군의 부고 알림과 부고 기사를 게재했다. '레닌기치'는 최대 4만 부까지 발행했던 소련의 제(諸)공화국간 공동신문으로, 재소(在蘇) 한인 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를 참고하면 홍 장군이 타계했을 때, 고인의 어떠한 지점이 주로 평가받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는 지적이다.
'레닌기치' 1943년 10월 27일자는 먼저 2면 하단에 부고 알림을 박스 처리했다. "홍범도 동무가 여러 달 동안 병환에 계시다가 본월 25일 하오 8시에 별세했기에 그의 친우들에게 부고함. 장례식은 1943년 10월 27일 하오 4시에 거행함"이라며 "정미공장 일꾼 일동"으로 나갔다. 8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부고 알림 양식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주목할만한 내용은 부고 알림 상단에 '홍범도 동무를 곡하노라'는 제목으로 쓰인 부고 기사다.
신문 2면에 부고 기사가 따로 실린 것으로 볼 때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달 29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이국 땅에서 쓸쓸히 스러져갔다"고 말한 것과는 달리, 홍 장군이 소련공산당과 재소 한인 사회에 인지도와 영향력 있는 인물임을 보여준다. 부고 기사는 네 단락으로 이뤄져 있으며, 띄어쓰기 포함 412자로 200자 원고지 2매 분량이다.
부고 외 애도 기사 따로 나가…이재명
"쓸쓸히 스러져갔다"는 주장과 달라
"머슴살이하다 착취의 멍에에 대치"
민족독립운동보다 계급투쟁 성격 조명
첫 단락은 홍범도 장군 타계에 관한 내용을 서술했다. "홍범도 동무는 여러 달 동안 숙환으로 집에서 신음하다가 그만 75세를 일기로 하고 1943년 10월 25일에 세상을 떠났다"고 썼다. 부고 알림과 동일한 내용이다.
두 번째 단락은 "그는 1868년 조선 평안남도 평양부에서 출생해 부모를 어려서 여의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머슴살이로 생을 유지했다"며 "쓰라린 생의 학교를 마친 그는 일찍부터 착취의 멍에를 대치해 분투했으며 조선빨찌산 운동의 거두가 돼 역필고투했다"고 돼있다.
홍 장군의 생애에서 '머슴살이'를 강조해 공산주의에서 중요한 이른바 '출신 성분'을 부각하면서 "착취의 멍에를 대치해 분투했다"고 해서 민족독립운동보다도 계급투쟁적 성격을 앞세우고 있다.
이번에 문제가 된 육사 경내 흉상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지청천 장군은 6대조가 종2품 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이범석 장군은 전주 이씨 광평대군파로 부친은 진사였다. 김좌진 장군은 충남 홍성의 유력 향반 출신이며, 이회영 선생은 오성부원군 이항복의 후예로 부친은 종1품 우찬성 벼슬을 지냈다.
블라디미르 레닌과 레프 트로츠키 등 소련 적군(赤軍) 인사들이 영내로 진입한 독립군 간부 중에서도 유독 홍 장군에게 주목해 추후 별도 면담을 가지고 권총까지 수여했으며, 홍 장군 또한 이들의 호의에 순응해 소련공산당 입당에 이르게 된 배경에는 공산당 조직이 강조하는 출신 성분과 계급투쟁 적합성이 깔려있다는 분석이다.
"조선빨찌산 운동의 거두가 됐다"는 대목에서 '빨치산'은 김일성·남로당의 빨치산과는 시기적으로 무관한 것은 사실이다. 여기에서 '빨치산'이란 게릴라전·유격전·비정규전을 의미하는 파르티잔(Partisan)의 번역어다. 다만 구체적인 독립운동 전투명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조선빨치산 운동'으로 뭉뚱그렸다는 점에서 역시 민족독립운동보다는 계급투쟁의 성격이 조명됐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우원식 "스탈린, 한인 강제 이주 전에
저항할만한 독립운동가 2500명 처형"
홍범도, 처형은커녕 이주 후 선호받는
직장 배정…'스탈린 체제'서도 고평가
세 번째 단락에서는 "홍범도 동무는 레닌-쓰탈린당의 충직한 당원으로서 년치가 이미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사업에 열성있게 참가했으며 당의 사명을 꾸준히 실행하기에 정력을 아끼지 않았다"고 서술했다.
레닌과 이오시프 스탈린의 당, 즉 소련공산당의 당원으로서 당성(黨性)이 충직했음을 평가하고 있다. 1927년 입당한 홍범도 장군은 이에 앞서 트로츠키를 통해 레닌과 면담했는데, 후일 스탈린 유일지도체제가 수립된 뒤 소련공산당 내에서는 트로츠키와 연줄이 있거나 공산주의·계급투쟁적 관점과 무관하게 민족 문제만 바라보는 사람은 대숙청 과정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우원식 민주당 의원은 지난 2019년 4월 YTN라디오 '뉴스 정면승부'에서 "스탈린이 '연해주에 조선 사람 다 없애라'고 해서 37년에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했잖느냐"며 "강제 이주하기 전에 이것에 저항할만한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처형했다. 2500명 정도를 처형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홍범도 장군은 처형된 2500명의 독립운동 지도자에 들기는커녕 1937년 연해주 한인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이후에도 당시 흔했던 숙청이나 아사를 피하고, 고려극장 수위 직업을 부여 받을 수 있었다. 극장 수위 자리를 오해하기 쉬우나, 당시 70세였던 홍 장군에게는 좋은 자리였으며 실제로 본인도 만족했다는 기록이 직간접적으로 남아있다.
타계 한 해 전인 1942년 고려극장이 다른 곳으로 이전하자, 홍 장군은 역시 선호받는 직장인 정미공장에 배속됐다. 부고 알림이 "정미공장 일꾼 일동"으로 나간 것은 이 때문이다. '레닌기치' 부고 기사의 평가대로 홍 장군이 레닌 시대 뿐만 아니라 스탈린 체제에서도 충직한 당원으로 평가받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분석이다.
우원식 의원은 지난달 29일 YTN라디오 '뉴스킹'에서 "홍범도 장군이 공산당에 참여한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같이 독립운동을 했던 동지들을 보호하기 위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야권에서는 어쩔 수 없이 소련공산당에 입당한 것처럼 설명하고 있지만, 연해주 한인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전후의 독립운동가 대량 처형 등 여러 정황과 부고 기사를 보면 스탈린 체제에서 당성에 대한 평가가 뛰어나지 않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관측이다.
또 우 의원은 지난달 28일 CBS라디오 '뉴스쇼'에서는 "공산당에 가입해 공산당 활동에 관여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며, '금방 탈당했잖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지만, 이 또한 사실과 모두 다르다는 비판이 나온다. 부고 기사에 분명 "사회사업에 열성 있게 참가했고 당의 사명을 꾸준히 실행했다"고 나오는데다, 탈당 기록은 전무하다는 것이다.
부고문의 '우리 조국'은 소련 가리켜
野, 흉상 논란 계기 한미동맹 허물자?
김병주 "한미동맹, 정권에 따라서
바뀔 수도 있다…영원한 우방 없어"
네 번째 단락은 "우리 조국과 볼셰비키당에 퍽 충직한 홍범도 동무는 자기의 생의 경로를 진실히 맞추고 길이 돌아갔다"며 "홍범도 동무에 대한 기억은 그를 아는 친우들에게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라는 문장으로 마무리됐다. 여기서 기사의 볼셰비키당이란 앞서의 레닌-스탈린당, 즉 소련공산당이며, 이에 비춰보면 '우리 조국'이란 당연히 소련을 가리킨다는 해석에 이견이 없다.
조태용 국가안보실장은 지난달 30일 국회 운영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윤석열 대통령이 전날의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이 '어떻게 하자고 말하지는 않겠다. 어떤 것이 옳은지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 여권 관계자는 "홍범도 장군의 생애 전반에 걸친 역사적 사실들을 객관적으로 올려놓고 국민들이 함께 생각해 옳은 길을 찾아보자는 뜻"이라며 "장군께서도 계급투쟁과 소련공산당 당성만을 평가받았던 후반부 일생보다는 봉오동·청산리 전투를 이끌었던 1920년초의 삶을 자랑스러워 하시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소련군복을 입고 육사 경내에 계시기보다는 독립기념관에 모시는 게 고인도 기뻐하실 일"이라고 말했다.
반면 야권에서는 이 사안을 역사적 공과(功過)의 평가라는 사실 영역의 문제로 바라보기보다는, 총선을 앞두고 정치 프레임의 유불리나 승패 문제로 여기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우려스럽다는 지적이다.
야권 일각에서는 육사 경내에 한미동맹을 기념하는 공간을 조성하는 문제를 이번 흉상 이전 논란과 엮어, 차제에 한미동맹의 영속성마저 부정하거나 우리 군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해야 한다는 사명마저 부정할 수 있는 호기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안민석 민주당 의원은 지난달 30일 KBS라디오 '최강시사'에서 "친일 대통령이 홍범도라는 독립운동가를 공격하는 싸움"이라며 "친일 대통령이 이기겠느냐, 독립운동가가 이기겠느냐. 승부는 뻔하게 예측된다"고 말했다.
김병주 민주당 의원은 지난달 31일 SBS라디오 '정치쇼'에서 "한미동맹이 계속 지속된다면 (흉상 이전 공간에 한미동맹파크를) 만들어도 되겠는데, 이것(한미동맹)은 정권에 따라서 바뀔 수가 있지 않느냐"며 "한미동맹을 강조하는 정권도 있고 (정권에 따라) 약화할 수도 있다. 동맹은 영원한 우방도 없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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