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학살은 없었던 게 된다"

이준목 2023. 9. 2.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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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리뷰] KBS 시사고발 <추적 60분>

[이준목 기자]

 KBS 시사고발 <추적 60분>의 한 장면.
ⓒ KBS
 
2023년 9월 1일은 관동대학살(關東大虐殺, 간토대학살)이 벌어진 지 정확히 1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1923년 일본을 강타한 관동대지진 당시 수많은 재일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의 혐오 범죄의 표적이 되어 대량학살을 당했다. 그 피해 규모는 약 6000여 명에서 많게는 1만 5000명 이상까지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일본 우익과 혐한 세력들은 여전히 대학살을 부인하고 희생자들을 모욕하며 진실을 은폐하려고 하고 있다.

9월 1일 방송된 KBS 시사고발 <추적 60분>에서는 '조선인을 죽여라, 학살 그 후 100년' 편을 통하여 관동대학살의 가슴 아픈 역사와 한일관계의 현실을 조명했다.

방송 당일 일본 도쿄의 요코아미초 공원에서는 '관동대지진 100주년 조선인 희생자 추모식'이 알렸다. 하지만 오후에 우익과 혐한 세력들이 운집하여 조선인 학살을 부인하는 반추도집회를 열고 노골적으로 추모를 방해했다.

1923년 9월, 일본 역사상 최악의 자연재해 중 하나로 꼽히는 관동대지진이 발생했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유언비어가 빠르게 퍼진다. 이에 자극받은 일본 군경과 자경단은 죽창과 몽둥이, 총기 등 각종 흉기를 들고 조선인들을 눈에 보이는 대로 학살했다. 피해자는 조선인 뿐만 아니라 중국인과 일본인 사회주의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 정부와 언론은 잔혹한 대학살을 사실상 선동-묵인하고 방치했다. 재난에 따른 내부의 정치-사회적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들에 대한 증오를 부추겨 희생양으로 삼았던 전형적인 국가적 범죄였다.

학살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였던 <독립신문>에서는 공식 희생자를 6661명으로 집계했지만, 일본 사법성은 단 231명으로 집계하며 큰 격차를 보였다. 그로부터 1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한일 양국 정부는, 아직도 관동대학살의 진실에 대한 명확한 규명을 회피하고 있다.

대학살 지역 주민들조차 모르는 당시 역사
 
 KBS 시사고발 <추적 60분>의 한 장면.
ⓒ KBS
 
재일동포 래퍼 후니씨는 조부가 한일병합이 되면서 15세 때 일본으로 건너와 어느덧 4대째를 이어가고 있었다. 일본에서 조선인의 후예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않은 일이었다.

후니씨는 "동화-동조의 압력이 있는 사회에서 이방인은 그 자체로 엄청난 압박감을 받으면서 살아가야한다"는 고충을 밝혔다. 후니씨는 어린 시절부터 한국인 출신이라는 이유로 따돌림을 받았고, 성인이 되어서도 경찰에게 인종차별을 당한 일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지금도 SNS에 글을 쓰면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악플에 시달리기 일쑤라고.

후니씨가 출연한 영화 <인 메이츠>는 간토대학살을 경험한 조선인의 상처를 다룬 작품이다. 후니씨는 여기서 조선인들의 아픔을 랩으로 표현했는데, 간토대학살 피해생존자의 실제 경험과 발언을 다뤘다.

하지만 도쿄도에서는 석연치않은 이유로 <인 메이츠>의 상영을 중지시켰다. 도쿄도는 조선인 학살의 역사를 인정하는 것으로 보일까봐 경계한 것이다. 연출가인 이이야마 유키 감독과 후니씨 일행은 도쿄도청을 방문하여 항의했으나, 관계자들은 관련 기관에서 이미 설명을 마쳤다며 답변을 피했다.

후니씨는 혐한 우익들의 악플세례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없었던 일로 하는 것은 정말 있을 수 없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사회 자체가 이상하다는 것을, 누군가는 말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소신을 밝혔다.

시민활동가 야마모토 스미코씨는 간토대학살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을 소개했다. 당시 일본 군경과 자경단은 곳곳에 조선인을 색출하기 위한 검문소를 세웠고, 조선인을 집단 학살하여 난간에 매달아놓는 만행을 저질렀다. 스미코씨는 희생자들의 시신을 공개적으로 전시하듯 처리한 이유에 대하여 "보여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조선인은 죽여도 된다는 것을 모두에게 전하고자 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현재는 대학살이 벌어졌던 지역의 인근 주민들조차 당시의 역사를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참히 희생되었지만 기록되지도 기억되지도 못했다. 학살 당한 사람의 이름과 신원조차도 제대로 규명되지 못했다. 스미코씨는 "그 사람이 살아있었다는 흔적 자체를 다 빼앗아버린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독립신문>에서는 가와가나현 일대에서 희생된 조선인의 숫자만 약 3900명으로 추산하고 있지만 일본 정부가 인정한 희생자는 단 2명에 불과했다.
 
 KBS 시사고발 <추적 60분>의 한 장면.
ⓒ KBS
 
재일교포 2세 오충공 감독도 재일 조선인 학살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오랫동안 제작해왔다. 오 감독은 "조선인 학살의 모든 것을 처음부터 알고 시작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을 만나고 사료를 모으면서 하나씩 알게 된 것도 많다. 당시 자경단이나 생존자를 인터뷰하면서, 그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왜 지금까지 이야기를 안 했는지, 관동대지진을 어떤 역사로 생각하는지 물어보면서 저도 배우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간토대학살 당시 도쿄 아라카와의 강변 일대에서는 100여 명이 이르는 조선인들이 살해 당하고 시신을 암매장했다는 관련자들의 증언이 있었다. 하지만 유골은 발견되지 않았는데, 훗날 학살 직후 일본 경찰이 유골을 파내 어디론가 빼돌렸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오 감독은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난 비극적인 역사를 계속 추적하는 이유에 대하여 "기록이 있어야 사람들은 기억한다.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더라도 나중에 그 영상이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릴 것이다. 그런 사명감으로 뭉치게 되었다"고 밝혔다.

아라카와 학살을 세상에 알린 재일동포와 양심적인 일본 시민들은 뒤늦게 조선인 희생자를 위하여 아라카와 강변에 작은 추모비를 건립했다. 하지만 학살사건에 대하여 공식조사는 끝내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국인 희생자들의 경우 학살 직후 피해조사가 실시되어 750여 명에 이르는 사망자 명부가 확보됐고,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일본 당국으로 배상 제안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은 희생자의 이름이나 기본적인 신원도 확인되지 못하며 조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조선인 폭동에 대한 유언비어 퍼트린 일본 정부
 
 KBS 시사고발 <추적 60분>의 한 장면.
ⓒ KBS
 
관동대지진 직후인 1923년 9월 2일, 일본 내무성이 경보국장의 이름으로 각 지방에 보낸 공식 전신문의 원본을 확인한 결과, 학살의 도화선이 된 조선인 폭동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트린 것이 바로 일본 정부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일본 정부는 조선인들이 폭탄을 소지하고 방화를 일삼았다며 이를 명분으로 계엄령을 선포한다고 밝혔고, 이는 일본 군중들의 학살범죄를 선동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또한 각 지역의 면사무소를 통하여 재향군인회, 소방단, 청년단 등에게 자경단을 조직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는 증언도 나왔다. 최근 일본 국회에서 관동대학살의 계기가 된 전신문이 핵심 증거로 공개되었으나, 정작 일본 정부는 사실을 확인하기 어렵다며 여전히 책임을 부인하고 있다.

당시 사이타마에서 조선인 희생자 중 공식적으로 신원이 확인된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인 강대흥씨는 일본 자경단의 습격으로 살해당했다. '사이타마현 조선인 강대흥 살인사건 판결문'에 따르면 자경단은 일본도와 창 등으로 도망치는 강대흥씨를 추격하여 잔혹하게 난자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대하여 다나카 마사타카 센슈대학 문학부 교수는 "조선인 사냥을 한 거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조사 결과, 간토 지방에만 약 3600개 이상의 자경단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설명했다. 당시 조선인들은 가와가나현에서 약 3999명, 도쿄도에서 1781명이 살해당했고, 이밖에도 사이마타, 지바, 군마현 등에서의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또한 이러한 대량 학살의 배후에는 일본 군경이 조직적으로 개입했다는 증거들도 속속 나오고 있다. 일본군에서 수용소에 조선인들을 모아놓은 뒤, 자신들이 학살에 개입했다는 증거를 숨기기 위하여, 자경단과 마을주민에게 조선인을 인계하여 대신 살해하도록 사주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다나카 교수는 "이것은 일반적인 혼란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수용소에서 조선인을 선별해서 죽인 것이기에 무차별적인 아닌, 의도적인 것이다. 국가가 학살에 가담했다는 상당히 잘못된 실태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했다.

일본 우익과 혐한들은 현재 간토대학살을 부인하고 희생자에 대한 추모를 조직적으로 방해하고 있다. 이 중에는 위안부 소녀상에 말뚝테러를 저지른 전력이 있는 스즈키 노부유키같은 극우 정치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조선인 희생자가 있었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지만, 6600명은 거짓말이다. 실제로 조선인들의 테러 계획이 있었고 폭동을 진압했다는 언론보도도 있었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이러한 극우세력의 연이은 사실 왜곡과 압박이 일본의 사회 공론장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극우 보수들의 공격을 두려워하여 중립적인 이들도 불편한 진실의 실체를 부인하거나 침묵하게 된다는 것이다.
 
 KBS 시사고발 <추적 60분>의 한 장면.
ⓒ KBS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 도지사는 2016년만 해도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에 추도문을 보내며 관동대학살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인정한 바 있다. 하지만 이듬해부터 돌연 추도문 발송을 중단하면서, 우익의 입김을 의식하여 학살의 역사를 부인하는 데 동참한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에 고이케 도지사는 "이미 희생자 위령법회에 참석하여 추모의 뜻을 밝혔기에,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 추도문을 보내지 않은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미야카와 야스히코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 실행위원장은 "표면적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역사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다루고 싶지도 않고 모르는 척하고 싶은, 가능한 도망치고 싶은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고 고이케 도지사의 심중을 분석했다.

과거를 직시하지 않은 채, 미래를 기약하는 파트너가 되는 것이 가능할까. 간토대학살 희생자인 고 남성규씨의 유족인 권재익씨는 일본뿐만이 아니라 우리 정부 역시 진실을 규명하는 일에 소극적인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권재익씨는 2016년부터 간토대학살의 유족들을 찾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으며, 이를 위하여 100주년을 맞이하여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제작진은 간토대학살의 진상규명을 위한 우리 정부의 입장을 문의했지만, 외교부에서는 두 번에 걸쳐 글자 하나 바뀌지 않고 "일본에 진상조사 필요성을 제기하고 자료 제공을 요청한 바 있다"는 사무적인 대답만 돌아왔다.

현재 일본에 있는 간토대학살 희생자 묘비 중에 이름이 새겨진 것은 단 세 곳에 불과하다. 양심적인 일본인들이 비용을 모아서 유족들을 초대하려고 했지만, 유족은 찾아오는 것도 반갑지 않다며 거부 의사를 밝히며 마음의 상처를 드러냈다.

마지막으로 오충공 감독은 "한국 정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학살이 없었던 것이 되어버린다"는 메시지를 전하며 "한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했고, 일본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저는 밝히고 싶다"며 진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당부했다.

국가가 희생된 이들에 대한 관심과 진실을 외면하는 사이에, 백 년이 지난 지금도 추모비 앞에는 '조선인 학살은 정당방위였다', '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하며 반성없는 우익과 혐한들이 판을 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대통령의 막연한 장및빛 기대처럼 일본이 미래를 향하여 걸어갈 진정한 파트너라면, 먼저 지나간 역사의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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