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급 사극 '스파르타쿠스'의 특별함에 대하여

김성호 2023. 9. 2.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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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532] <스파르타쿠스: 저주받은 자들의 전쟁>

[김성호 기자]

사극은 언제 매력을 가질까. 여러 답이 나올 수 있겠으나 나는 오늘의 시각으로 어제의 역사를 다루는 데서 그 근원을 찾는다. 사학계의 평가와 대중의 인식을 넘어 작가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새롭게 평가하고 제 극 위에 펼쳐내고는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멋진 사극에는 역사 속 인물의 새로운 모습들이 등장하는 경우가 잦다고 하겠다.

어디까지나 학문이며 기록일 밖에 없는 역사에 비하여 예술은 운신의 폭이 크다. 그리하여 사극은 역사적 인물을 역사와 달리 표현하는 유연함을 종종 발휘하고는 한다.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사극 중 하나로 꼽히는 드라마 <스파르타쿠스> 시리즈는 그와 같은 유연함을 적극 활용한 보기 드문 작품이다.

<스파르타쿠스: 저주받은 자들의 전쟁>은 2010년부터 3년 여 동안 이어진 시리즈의 최종편이다. 노예 검투사의 비인간적 처우에 항거하여 일어난 반란으로부터 로마군과의 연이은 전투, 마침내 반란군 진압을 위해 대대적으로 출격한 크라수스의 군단과 최후의 전투에 이르는 스파르타쿠스의 난을 매조지하는 세 번째 시리즈다. 모두 10부작으로 이뤄진 드라마는 스파르타쿠스의 난의 마지막, 크라수스와 스파르타쿠스가 각각 이끄는 대격돌을 그린다.
 
▲ 스파르타쿠스: 저주받은 자들의 전쟁 포스터
ⓒ starz
 
스파르타쿠스 vs. 크라수스, 카이사르

크라수스는 저 유명한 역사 속 로마 삼두정의 한 축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다. 그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함께 최전성기의 로마 공화정을 지탱하는 축으로 역사에 길이 남았다. 율리우스 씨족, 카이사르 가문의 가이우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이름으로 흔히 불리듯 리키니우스 씨족, 크라수스 문중의 마르쿠스는 크라수스라는 이름으로 이야기되곤 한다. 따라서 이 글에선 마르쿠스를 크라수스라, 가이우스를 카이사르라고만 적겠다.

<저주받은 자들의 전쟁>은 삼두정의 세 주역을 모두 등장시키는 흔치 않은 선택을 한다. 거의 이름만 등장하는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달리, 크라수스와 카이사르는 모든 회차에 주역으로 등장한다.

지난 두 시즌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인 스파르타쿠스는 이제야 제게 어울리는 맞수를 마주한다. 그로부터 그간 이어온 전쟁의 운명을 가름하는 일대 대전을 준비하게 되는 것이다. 영웅이란 그가 맞서 싸운 상대의 강함만큼 위대해지게 마련이다. 크라수스와 카이사르의 뛰어남이 곧 스파르타쿠스의 훌륭함을 드러내는 수단이 된다.
 
▲ 스파르타쿠스: 저주받은 자들의 전쟁 스틸컷
ⓒ starz
 
이 시리즈가 특별한 이유

그렇다면 이 드라마는 왜 특별한가.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나는 크라수스에게서 그 단서를 발견한다. <저주받은 자들의 전쟁>은 그간 크라수스에게 가해진 여러 평가, 때로는 지나치게 모욕적이던 평가를 뒤집어냈다. 말하자면 이 작품 속 크라수스는 곱게 자란 부잣집 아들이며 악독하게 부를 불린 소인배이고 별다른 재능 없이 높은 자리를 차지한 한심한 인물로 묘사하지 않는다.

크라수스의 첫 등장은 인상적이다. 명성과 어울리는 큰 저택에서 크라수스는 노예와 대련 중이다. 칼을 들고 마주 선 두 사내는 서로를 향해 칼을 내리치고 막아내고 힘을 겨룬다. 한때 로마 검투장을 휩쓸었다던 노예와 매일 같이 대련하며 스스로를 단련하는 이 귀족 사내가 바로 크라수스인 것이다.

노예와 마주 상대하며 함께 땀을 흘리는 광경을 좋지 못하게 여기던 당대의 시각으로 보자면 다분히 실용적이며 성실하고 투쟁적인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크라수스의 아들은 이 광경에 눈살을 찌푸리지만, 아버지는 아들에게 칼을 던져 진짜 사나이의 승부가 어떤 무게를 지니는지를 일깨울 뿐이다.
 
▲ 스파르타쿠스: 저주받은 자들의 전쟁 스틸컷
ⓒ starz
 
역사 속 인물을 재평가한 패기 넘치는 드라마

크라수스는 드라마 내내 인상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제가 잘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을 구분하고, 약한 부분은 보완하며 강한 부분은 살려내는 지혜로운 인물로 그려진다. 그가 젊고 재기 넘치는 카이사르를 제 군 안에 받아들인 것 또한 그러한 이유다. 저와 제 아들에게 부족한 군재를 카이사르를 통해 보완하기 위해서다.

훗날의 치욕적 패전 때문인지 여러 작품이며 역사적 서술 가운데서 크라수스는 혹독한 평가를 받아들기 일쑤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서만큼은 다르다. 크라수스는 제게 마땅한, 그러나 흔한 평가와는 다른 공정한 평가를 받는 것이다. 그는 시종일관 스파르타쿠스에게 위협을 주는 지휘관이며, 실제 역사에서와 같은 승리를 거둔다.

그로써 스파르타쿠스는 그저 탈출한 노예무리의 수장이 아닌 당당한 지휘관으로 묘사될 여지를 갖고, 그가 전에 거둔 두어 차례의 승리 또한 그저 방심이며 우연에 기댄 것이 아닌 정당한 승리로써 재현되기에 이른다.
 
▲ 스파르타쿠스: 저주받은 자들의 전쟁 스틸컷
ⓒ starz
 
사극이 이룰 수 있는 멋에 대하여

드라마는 크라수스와 스파르타쿠스가 주고받는 치열한 공방을 긴장감 넘치게 그려낸다. 그 와중엔 카이사르의 재기와 패기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 있고, 크라수스의 아들이 느끼는 열패감과 그로 인한 경박한 실수가 있으며, 이를 놓치지 않는 스파르타쿠스의 명민함과 다시 이를 뒤집어내는 크라수스의 결단력이 있다. 극은 이 모든 순간을 절묘하게 그려냄으로써 역사가 담아내지 못한 두 영웅의 대결을 흥미롭게 재현한다.

실제 역사가 지나치게 저평가한 크라수스는 이로부터 제게 어울리는 모습을 되찾는다. 크라수스의 강건함 덕분에 스파르타쿠스의 최후 역시 마땅한 장엄함을 획득한다. 그저 그런 노예의 허망한 죽음이 아닌, 로마 역사가 플로루스의 표현 그대로 "임페라토르(최고 통솔자)처럼 싸우다 죽"는다. 노예가 왕이 되는 순간이다. 스스로의 힘과 용기로 왕의 존엄을 얻은 자, 로마의 노예이며 검투사들의 영웅이고 부당함에 항거한 자들의 왕 스파르타쿠스의 이야기가 그렇게 완성된다.

수많은 역사서와 문학작품, 극이 보잘 것 없이 그려온 크라수스가 이 작품에서만은 전혀 다르게 그려진다. 그로부터 이 사극이 오늘의 관객들에게 특별한 감동을 일으킨다. 사극이 이를 수 있는 아름다움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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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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