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흉상 철거 반대 서명, 국방부에 전달했습니다

김경준 2023. 9. 2.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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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450여 명이 이름 올린 '독립영웅 흉상 철거 반대 서명', 이제 시작입니다

[김경준 기자]

 8일 오후 서울 노원구 육군사관학교에 설치된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이회영 선생과 항일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홍범도·김좌진·지청천·이범석 장군 등의 흉상에 신흥무관학교 107주년을 맞아 꽃목걸이가 걸려 있다.
ⓒ 이희훈
 
"이게 나라냐?!"

2016년 겨울,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위한 촛불집회 당시 목이 터져라 부르짖었던 구호를 7년 만에 다시 입밖으로 내뱉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학교의 정체성에 어긋난다"며 육군사관학교에 세워진 독립전쟁 영웅 5인(홍범도, 김좌진, 이범석, 지청천, 이회영)의 흉상을 철거하겠다고 하질 않나,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을 매도하질 않나. 그런데 이젠 독립군을 쫓아낸 자리에 친일반민족행위자 백선엽의 흉상 건립까지 검토하고 있다니. 2023년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일이 맞는지 의문입니다.

저는 독립운동사를 전공하고 있는 박사과정 대학원생입니다. 석사학위논문을 한 독립운동가의 생애로 썼고, 이후로도 독립운동가들의 선양을 통해 그들이 목숨 걸고 찾고자 했던 자유·평화·독립·평등·통일 등의 가치를 알리는 작업을 지속해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심한 자괴감·무력감·절망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제가 알리고자 했던 가치들이 송두리째 부정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저들의 역사농단을 지켜보고 있을 순 없었습니다. 방관하는 것도 죄를 짓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지난 8월 25일부터 전국의 역사 전공 대학생,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육사 독립영웅 흉상 철거 및 백선엽 흉상 건립 철회를 위한 온라인 서명운동을 제안했습니다(관련 기사 https://omn.kr/25d7a).

전국 60개 대학, 450여 시민 동참
 
 육군사관학교의 독립영웅 흉상 철거 반대 서명운동 결과물
ⓒ 김경준
 
서명운동 소식을 전하자 전국의 역사학도들이 자발적으로 서명에 동참했습니다. 하룻밤새 200명 넘는 시민들이 서명에 참여했습니다. 개별 대학들에 집단행동을 요청하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서명운동을 하는 동안 특정 대학들이 집단적으로 서명에 동참한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아마 소식을 접하고 각 대학별로 모종의 결의(?)를 했던 게 아닐까 여겨집니다. 제 소셜미디어 이웃인 지방의 한 대학 교수님이 서명에 참가하자고 학생들에게 링크를 공유한 것도 뒤늦게 알았습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경희대 사학과에서 학부생, 대학원생 그리고 졸업생까지 참여했다는 사실입니다. 경희대학교의 전신이 우당 이회영 선생이 세운 신흥무관학교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의미 있는 행보입니다.

"일반 시민들도 참여하게 해달라."

서명운동을 하는 동안 이런 민원(?)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번 사태는 역사학도만 나설 문제도 아니거니와 일반 시민으로서 목소리를 내고 싶은데 마땅한 창구가 없으니 자신들도 서명에 참여하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참여대상을 역사학도로 한정한 것은, 이번 서명운동을 계기로 각계각층에서 자발적인 서명운동이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목소리를 내고 싶었던 시민들은 서명에 참여했습니다. 그래서 원칙적으로는 역사학도들을 대상으로 하지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서명에 참여하는 것까지 막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독립운동가 후손, 초등학생, 중학생, 교사, 자영업자 등 나이도, 직업도 제각각인 시민들이 기꺼이 이름을 올렸습니다. 무엇보다 본인을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라 소개한 분의 서명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는 서명과 함께 "나도 결사반대다. 이놈들아!"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서명운동 당시 시민들이 남긴 메시지들 중 일부를 소개합니다.
 
"대한민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한 나라이지 조선총독부의 후신이 아닙니다."
"역사를 정권의 하수인으로 만들려는 육군사관학교의 행태를 규탄한다."
"저급한 역사 인식과 스스로의 역사 부정은 미래를 어둡게 할 것이다."
"육군사관학교 학생들은 살았느냐? 죽었느냐?"
"이념적 틀에 박혀 역사의 죄인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이번 흉상 철거 및 반민족행위자의 흉상 건설을 적극 규탄한다."

"민족정기를 훼손하는 정부는 국민의 정부가 아닙니다."
"대통령이 국민의 투표로 선출되었다고 하여 역사를 자신의 필요에 따라 왜곡할 권한까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더 이상 역사에 죄를 짓지 마십시오."
"윤석열 정부는 친일반민족행위를 즉각 멈추라"
"신흥무관학교가 아닌 만주군관학교의 법통을 이어가시겠습니까?
"우리 정부와 군은 대체 누구를 대표하고 누구를 지키고 있는 것인가. 우리의 주권과 국민, 역사인가. 아니면 이념의 틀에 박힌 냉전적 사고인가?"
   
서명운동을 시작한 뒤로도 매일 새로운 이슈가 터졌습니다. 이종찬 광복회장 등 원로들이 나서자 정부는 한 발 물러선답시고 이회영, 지청천, 김좌진, 이범석 네 분의 흉상은 이전 존치하고 '공산주의자'라고 규정한 홍범도 장군 한 사람만 철거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또 백선엽 대신 맥아더 흉상을 세우는 방향도 검토하고 있답니다.

치졸합니다. 홍범도 장군을 쫓아내기 위해 근거도 없이 그를 자유시 참변의 주동자로 몰아가고, 해방 전 소련 공산당에 입당한 행위를 갖고 '이적행위'를 한 것마냥 매도했습니다.

시간이 없었습니다. 국무총리와 대통령실까지 흉상 철거에 힘을 실어주는 분위기 속에서 언제 육사에서 홍범도 장군의 흉상이 끌어내려질지 알 수 없는,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습니다. 서명운동을 길게 진행할 여유가 없다고 판단해 8월 31일 0시를 끝으로 서명운동을 마무리하고, 국방부와 육군사관학교에 서명부와 성명서를 제출하기로 했습니다.

서명운동 종료 후 집계한 결과 총 455명(일반 시민 포함), 국내외 60개 대학의 역사학도들이 서명에 동참했습니다. 어떠한 조직체나 후원 없이 진행했음에도 짧은 시간에 이 정도의 참여율이라니, 큰 성과였습니다. 동시에 온국민이 들끓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홍범도 장군 묘역에 올린 서명자 명단

8월 31일 아침 일찍 대전행 열차에 올랐습니다. 국립대전현충원의 홍범도 장군 묘역을 찾아 서명부와 함께 큰 절을 올렸습니다. 특별히 홍범도 장군의 고향, 평양의 전통주인 '문배술(문배주)'도 한 잔 올렸습니다.
 
 2023년 8월 31일 홍범도 장군 묘역에서
ⓒ 김경준
 
 2023년 8월 31일 국립대전현충원 홍범도 장군 묘역에 평양 지역 전통주 '문배술'과 큰절을 올리다.
ⓒ 김경준
사후 78년 만에 돌아온 고국이건만,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말도 안되는 모욕에 시달리는 장군께 이 술 한 잔과 450여 시민의 마음이 작은 위로가 되길 바랐습니다.

"내가 돌아오지 말걸, 공연히 돌아와서 이 꼴을 보네."

홍범도 장군을 주제로 한 이동순 시인의 싯구 중 하나입니다. 왜 저는 홍범도 장군의 쓸쓸한 묘역을 보면서 이 구절이 생각났던 걸까요. 울컥했습니다. 차라리 홍범도 장군을 카자흐스탄에 그대로 모셔뒀더라면 이런 모욕은 당하지 않으셨을 텐데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참배를 마치고도 쉽사리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괜히 묘역 주변을 서성이며 상념에 빠져 있노라니, 많지는 않지만 한두 명 단위로 시민들이 와서 인사를 드리고 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천안에서 내려왔다는 한 여성 분은 "너무 분해서 왔다"면서 울먹였습니다. 그러면서 "앞으로 강단에 서게 되면 학생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알려달라"는 당부까지 하고 떠났습니다.
 
 홍범도 장군 묘역을 참배하는 한 시민의 모습
ⓒ 김경준
 
"잠깐 서주십시오"... 우여곡절 끝에 국방부에 전달한 서명

홍범도 장군 묘역에 보고를 마친 뒤, 곧바로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용산 전쟁기념관을 방문해 김좌진·홍범도 두 분의 흉상 앞에서 한 번 더 묵념을 올린 뒤, 국방부 민원실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잠깐 서주십시오!"

막 민원실로 들어가려는 참에 경찰관 한 명이 황급히 뛰어와 멈춰세웠습니다. 그는 "다른 직원이 올 때까지 5분만 대기해달라"면서 한쪽으로 데려가 소속, 이름 등을 묻기 시작했습니다. 어느새 저를 에워싼 경찰관의 수가 5명까지 늘어났습니다.

"아니, 무슨 집회나 시위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개인이 민원실에 민원서류 하나 제출하러 가는 건데 이렇게까지 합니까?"
"원칙상 저희 직원이 동행해 민원 제출을 돕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장에 있던 제가 볼 때는 '보조'가 아니라 '감시'에 가까웠습니다. 경찰들은 서류 봉투에 뭐가 들었는지 계속 묻고, "열어서 확인해볼 수 없느냐"라고 요청해오기까지 했습니다.

'혹시 모를 테러를 방지하려면 이분들도 어쩔 수 없겠지'라며 최대한 이해하려 애쓰면서 요청에 응했습니다. 그러나 서명운동부의 촬영까지 시도하기에 이름, 소속 등 개인정보만큼은 찍지 못하도록 거부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국방부 민원실에 서명자들의 명단과 성명서를 전달했습니다. 전달 과정에서도 경찰관들이 일거수일투족을 촬영하고 어딘가에 계속 보고하고 있어 보였습니다. 시민의 권리로 의사를 표현하는 것임에도 이같은 '살벌한'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것이 서글펐습니다.
 
 2023년 8월 31일 국방부 종합민원실 앞에서
ⓒ 김경준
 
서명운동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

솔직히 450여 명의 서명으로 당장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건 역사를 농단하려는 윤석열 정권에 보내는 일종의 '선전포고'입니다. 이번 서명운동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라고, 앞으로 단단히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공식적인 서명운동은 마감했지만, 국방부 제출 뒤 돌아와 확인해보니 그사이 서명에 참여한 인원이 늘어나 누적 인원이 540명(8월 31일 오후 10시 30분 기준)에 이르렀습니다. 많은 이들이 "추가 서명을 받아달라"고 하기에 서명운동 링크를 폐쇄하지 않고 일단 계속 받기로 했습니다. 육군사관학교 전달 역시 잠시 보류했다가 추가 서명 명단까지 함께 동봉해 발송할 예정입니다(서명하기 링크 https://forms.gle/wEpySB15ZNkJCMNY8 )

독자 여러분께도 당부드리고 싶습니다. 이대로 방관하면 나중엔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육사 흉상 철거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이미 대한민국 해군 잠수함 '홍범도함'의 이름 변경과 홍범도 장군의 서훈 취소까지도 검토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다 현충원에서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들어내기라도 할까 두렵습니다. 설마 그렇게까지 할 리가 있겠냐고요? 그런데 요즘 들려오는 뉴스를 보면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실감 납니다.

2016년 겨울, 우리는 무도한 정권을 응징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갔고, 그렇게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보여줬었습니다. 다시 한 번 일어서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함께 싸워주십시오. 끝으로 홍범도 장군의 어록을 하나 인용하겠습니다.

"나는 지금 늙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이 지금 파시스트들과 전쟁을 한다. 젊은이들! 모두 무기를 잡고 조국을 위하여 용감하게 나서라!"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홍범도 장군 흉상
ⓒ 김경준
 
 홍범도 장군 묘역에 헌정한 '독립영웅 흉상 철거 반대 서명자 명단'
ⓒ 김경준
 
[독립영웅 흉상 철거 반대 서명운동 결과 보고]

※ 서명인원: 455명 (2023년 8월 31일 0시 기준)
※ 참여대학(가나다순)

가톨릭대, 강원대, 건국대, 경기대, 경남대, 경북대, 경상국립대, 경희대, 고려대, 공주대, 국민대, 계명대, 관동대, 단국대, 동국대, 동아대, 대구대, 대구가톨릭대, 대진대, 명지대, 목포대, 부산대, 서강대, 서울대, 서울시립대, 서울여대, 성균관대, 수원대, 숙명여대, 숭실대, 신라대, 세종대, 안동대, 연세대, 우석대, 육군사관학교, 이화여대, 인제대, 인하대, 와세다대(일본), 원광대, 전남대, 전북대, 전주대, 조선대, 중산대(중국), 중앙대, 제주대, 창원대, 총신대, 충남대, 충북대, 한국교원대, 한국외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한남대, 한림대, 한성대, 한양대, 홍익대 (이상 60개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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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앞으로도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계획이 백지화될 때까지 다양한 활동을 이어갈 생각입니다. 그동안의 활동 경과 및 앞으로의 활동 상황은 인스타그램 @kiaquot (독립로드) 를 통해 공유하고자 합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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