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윤정희는 그때 왜 바이올린 연주곡을 들었을까
나이 오십 줄에 들어서면 누구나 예외 없이 부모는 마지막 항해를 시작한다. 드물게 잠자다 영면하기도 하지만 적지 않은 이가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다 세상을 뜬다. 그런 부모를 지켜보노라면 인생은 참으로 덧없고 허망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배우 윤정희(1944~2023)가 오랜 알츠하이머 투병 끝에 지난 1월 눈을 감았다. 윤정희는 알려진 대로 알츠하이머로 인해 고통스러운 말년을 보냈다. 배우 윤정희와 오랜 인연을 맺었기에 나는 누구보다 그녀의 마지막을 안타까워했다. 죽음을 앞둔 알츠하이머 환자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남편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아내의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전했다.
“제 아내이자 오랜 세월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배우 윤정희가 딸 진희의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며 꿈꾸듯 편안한 얼굴로 세상을 떠났다.”
세상과의 이별을 앞둔 어머니를 위해 딸은 호스피스 병동에서 바이올린곡을 연주했다. 인간의 오감각 중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게 청각이다. 어떤 작곡가의 음악이었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딸은 어머니가 평소 좋아했던 음악을 선곡했으리라. 우리가 방점을 두어야 할 것은 윤정희가 마지막 남은 청각으로 바이올린 연주곡을 듣고 눈을 감았다는 사실이다.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우연히 프랑스 영화 ‘다 잘 된 거야(Everything went fine)'를 보게 되었다. 별 기대를 하지 않고 보다가 감동을 받았다. 다 보고 나서 찬찬히 대사를 음미하며 한 번 더 감상했다. 프랑수와 오종 감독이 연출했고 50대의 소피 마르소가 주인공 에마뉘엘 역을 맡았다.
팔십 대 아버지(앙드레)가 갑작스럽게 쓰러졌다. 아버지는 딸(에마뉘엘)을 불러 부탁한다. 혼자 힘으로 걸어 다닐 수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없으니 이렇게 사는 것은 무의미하다. 더이상 살고 싶지 않으니 품위 있게 마무리하는 것을 도와달라.
안락사가 법적으로 허용된 나라는 스위스와 네덜란드. 앙드레는 자발적으로 안락사 의사를 밝혔지만 막상 실행하려니 마음이 오락가락한다. 이로 인해 두 딸과 관계자들은 힘들어한다. 우여곡절 끝에 앙드레는 앰뷸런스에 실려 파리에서 여섯 시간 걸리는 스위스 베른으로 들어간다. 파리에 남은 두 딸은 초조하게 기다린다. 그리고 베른의 한 병원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는다. 병원 관계자가 앙드레의 마지막 순간을 전한다.
“아버님께서 브람스의 피아노 소나타를 들으면서 잠드셨습니다.”
이 장면에서 데이비드 구달 박사가 오버랩되었다. 호주 식물학자 데이비드 구달(1916~2020)의 마지막 장면과 이 영화의 분위기가 비슷했다. 나는 데이비드 구달 박사 이야기를 '세계인문여행'에서 두세 번 짤막하게 언급한 적이 있다.
구달 박사가 굳이 호주에서 스위스 바젤로까지 날아가서 안락사를 택한 까닭은 뭘까. 너무 오래 살다 보니 사랑했던 사람이 아무도 없다. 더 이상 불행해지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그가 바젤의 병원에서 마지막으로 먹은 음식은 치즈케이크와 피시앤칩스였다. 그리고 주사액이 들어가기 직전,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을 들었다. 그리고 온 곳으로 여행을 떠났다.
배우 윤정희, 영화의 앙드레, 과학자 데이비드 구달은 왜 광대한 우주가 한 점으로 소멸하는 그 순간에 음악이 듣고 싶어졌을까. 도대체 음악이 뭐길래?
‘레미제라블’, ‘파리의 노트르담’을 쓴 소설가 빅토르 위고. 그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뮤지컬은 여전히 스테디셀러로 무대에 올려진다. 위고가 음악에 이렇게 갈파했다.
“음악은 인간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그렇다고 침묵할 수도 없는 어떤 것을 표현한다.”
위고의 말에 음악의 본질적 속성이 있다. 음악은 말(언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음악은 느낌을 표현하는 예술이다. 언어로 발화되기 이전, 감정의 소용돌이를 포착하는 게 음악이다.
단체관광이든 자유여행이든 우리는 유럽여행 중에 음악회를 한두 번은 가려고 한다. 왜 그럴까. 미술관 투어에는 해설자가 동반되어야 하지만 음악공연에는 언어의 장벽이 없어서다.
내가 천재 시리즈에서 다룬 천재 54명 중 음악에 특별히 조예가 깊은 사람은 빅토르 위고, 프리드리히 니체, 헤르만 헤세, 찰리 채플린, 백남준, 밀란 쿤데라, 무라카미 하루키 등이었다.
헤르만 헤세를 보자. 나는 헤세를 고향인 독일 칼브에서 출발해 튀빙엔, 바젤 등을 답사하며 그를 연구했지만 그가 음악에 해박한 식견이 있는 줄을 알지 못했다.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가 2022년에 번역되어 나왔기 때문이다.
헤세는 음악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음악은 내가 무조건적으로 경탄을 바치는,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 유일한 예술이다.”
그는 또한 음악을 “순간과 영원의 동일성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라고도 정의했다.
헤세는 스위스에 살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음악회를 다녔고, 음악에 대한 느낌과 생각을 기록했다. 그 책이 ‘Musik, Hermann Hesse’다. 이 책에서 헤세는 모차르트의 오페라에 대해 이렇게 썼다.
“하지만 150년이 지나도록 조금도 노화되지 않은 생생한 무엇으로 승화시킨 모차르트의 정신이 아니었더라면, 그 문학 중 단 하나도 모차르트 당대를 넘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하물며 오늘날까지는 두말할 것도 없다.”
헤세가 언급한 오페라는 ‘피가로의 결혼’ ‘마술피리’ ‘돈 조반니’를 말한다. ‘피가로의 결혼’은 프랑스 극작가의 작품으로 먼저 연극으로 만들어졌다가 다폰테가 오페라 대본으로 다시 쓴 것이다. ‘마술피리’는 오페라 대본 작가 쉬카네더의 작품이다. ‘돈 조반니’도 다폰테의 작품이다.
헤세는 소설에서도 음악을 자주 등장시켜 서사를 풀어간다. ‘데미안’에서 주인공 싱클레어가 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즐겨 듣는 것으로 묘사했고, ‘황야의 이리’에서는 등장인물인 파블로를 재즈 뮤지션으로 그린다.
위고, 헤세, 하루키 3인은 음악을 좋아해 애호가에서 음악적 식견으로 발전한 경우다. 그러나 니체는 이들과는 출발점이 다르다. 니체는 철학과 비평에서 빛나는 저작을 남기기 전에 이미 작곡가이면서 피아니스트였고 음악비평가였다.
리하르트 바그너가 라이프치히에서 서른한 살 어린 니체를 만나고 싶어한 이유는 무얼까. 젊은 대학생이 자신의 작품을 연주하고 비평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이 생겨서였다. 니체는 바그너를 아버지처럼 따랐고 스승으로 숭앙했다. 바그너는 니체를 스위스 루체른 집으로 초대했고, 니체는 그 집에서 살다시피 했다. 니체의 철학과 비평에서 음악을 빼놓고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니체는 실제로 ‘바그너의 경우’ ‘니체 대 바그너’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프랑스 작가 조르주 리에베르가 ‘니체와 음악’이라는 책을 쓰게 된 배경이다.
음악에 관한 니체의 어록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음악이 없다면 인생은 한낱 실수, 피곤하기만 한 일, 유배에 불과할 뿐이오”라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다음을 최고로 평가한다.
“음악에는 말할 수 없고 은밀한 무엇이 있다. 음악은 우리에게 친숙하지만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낙원 이미지와 비슷하다. 음악은 지성으로 파악이 가능하나 결코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음악이 우리 존재의 움직임, 깊이 감추어져 있으면서도 현실과 고통에서는 벗어나 있는 움직임을 보여주는 까닭이다.”
달포 전, 어머니 같은 큰 누님이 말기 암 진단을 받은 지 2개월 만에 돌아가셨다. 나이 들어 죽는 건 자연의 이치라며 일체의 수술을 거부했던 누님에게 설상가상으로 뇌경색이 왔다. 언어능력이 떨어져 의사소통이 어렵게 되자 누님은 노래를 불렀다. 친척들과 전화 통화할 때마다 누님은 노래로 대화했다.
조성관 작가·천재 연구가
'지니어스 테이블' 운영자, 전 주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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