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아리랑 따라불렀다…조선인 학살 추도식, 日정치인 첫 참석
1일 오전 11시 58분, 회장 안에 모인 400여명이 다 같이 머리를 숙였다. 100년 전인 1923년 9월 1일, 규모 7.9의 대지진이 일본 도쿄(東京) 일대를 덮쳤던 바로 그 시간이다. 이날 도쿄 지요다(千代田)구 국제포럼에서 열린 '제100주년 관동대진재 한국인 순난자(국가가 위기에 빠졌을 때 의롭게 목숨을 바친 사람) 추념식'에는 한국, 일본 정치인들과 재일동포 등이 모여 당시 숨을 거둔 영령들을 위로했다.
100년 전 발생한 간토(関東)대지진으로 10만 5000여명이 사망했다. 지진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 '우물에 독을 탔다' 등의 유언비어가 퍼졌고, 약 6000명으로 추산되는 조선인이 일본 경찰·재향군인·민간인들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됐다. 일본 내각부 중앙방재회의가 2008년 작성한 보고서에는 "대지진 당시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각지에서 결성된 자경단이 일본도와 도끼, 쇠갈고리 등으로 무장한 채 재일 조선인들을 닥치는 대로 심문하고 폭행을 가해 살해했다"고 적혀있다.
올해 100주년을 맞아 주일본 대한민국민단(민단)이 주최하고 주일 한국대사관과 재외동포청이 후원하는 대규모 추념식이 진행됐다. 윤덕민 주일대사는 이날 추도사에서 "관동 대지진 당시 한국인들이 억울하게 희생됐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역사 그 자체"라며 "이러한 불행한 과거사는 다시 되풀이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직시하며 상호 이해를 깊이 한다면, 자유민주주의·인권·법치 등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파트너인 한국과 일본은 진정한 동반자로서 미래지향적 협력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수원 민단 도쿄본부 단장도 추념사에서 "미래를 내다보며 차근차근 노력하여 한·일 양국의 평화, 안녕, 더 나은 공존공영의 평화로운 세계 구축에 힘써나가자"고 호소했다.
추도사 후엔 소리꾼 장사익씨가 무대에 올라 '아리랑'과 '봄날은 간다'를 부르며 고인들을 기렸다. 행사에 참석한 재일동포들과 정치인들도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를 조용히 따라 불렀다. 장사익씨는 공연 후 "오늘 제 노래가 돌아가신 분들에게 조그만 위안이 되고 동포 여러분에게 힘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日 정치인 10여명 참석, 스가 전 총리는 조화
이날 행사에는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일본 전 총리를 비롯해 야마구치 나쓰오(山口那津男) 공명당 대표, 후쿠시마 미즈호(福島みずほ) 사회민주당 대표, 오오사카 세이지(逢坂誠二) 입헌민주당 대표대행, 다케다 료타(武田良太) 일한의원연맹 간사장 등 10여 명의 일본 정계 인사가 참석해 조선인 희생자들을 추도하며 헌화했다. 한국에서는 정진석 한일의원연맹 회장과 윤호중 간사장, 배현진 국민의힘 의원 등이 참석했다.
자민당 의원 등 일본 정치인이 민단 주최 추도식에 참석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최근 한·일 관계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으로 풀이된다. 단, 일본 정부가 조선인 학살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 듯 일본 정계 인사의 추도사는 없었다. 일한의원연맹 회장을 맡고 있는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전 총리는 이날 행사에 조화를 보냈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이날 행사 후 기자들과 만나 "일본 정부가 지금이라도 조선인 학살에 대한 사실을 파악하고, 나쁜 일을 한 데 대해서는 정직하게 사과하고 책임을 다해야 한다"며 "죄송하다"고 말했다.
고이케 지사, 올해도 추도문 안 보내
이날 같은 시간 도쿄 스미다(墨田)구에 있는 요코아미초(橫網町) 공원에서도 일조협회 등이 주최하는 추모제가 열렸다. 30도가 넘는 늦더위 속에서 수백명의 시민들이 참석해 100년 전 학살로 희생된 조선인과 중국인을 추도했다.
이날 행사를 주최한 '간토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 실행위원회'(이하 실행위)는 1974년부터 요코아미초 공원에서 매년 9월 1일 추도식을 열고 있다.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郎), 마스조에 요이치(舛添要一) 등 과거 도쿄도 지사들이 이 행사에 추도문을 보내왔으나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현 지사는 2017년부터 추도문을 보내지 않고 있다.
실행위는 100주년을 맞아 고이케 지사에게 여러차례 추도문을 요청했으나 이번에도 추도문은 없었다.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의 국가책임을 묻는 모임'의 다나카 마사타카(田中正敬) 사무국장은 이날 행사에서 "(조선인) 학살은 그동안 조사와 연구로 알려진 역사적인 사실"이라며 "도쿄도 지사와 일본 정부는 과거를 직시하고 희생자와 진지하게 마주해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도쿄=이영희 특파원 misqui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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