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강풀 "한국형 히어로, 역사와 닿아있길 바랐다"
디즈니+ 시리즈 '무빙' 각본 집필
착한 사람들 힘 합치는 이야기
"오래 읽히는 책 같은 작품 만들고파"
"만화를 그릴 때도 안 그랬거든요? '무빙' 공개를 앞두고 긴장을 많이 했어요. 이틀 전부터는 잠도 못 잤어요. '만화나 그리지 그랬냐' 소리 들을까 봐요.(웃음) 주변 사람들 반응이 좋았는데, 그 말도 못 믿겠더라고요. 눈을 뜨면 반응을 검색하고, 종일 찾아봤죠. 다행히 나쁘지 않구나 싶으니까 매주 수요일만 기다려져요. 연재할 때는 일주일이 그렇게 빨리 가더니, 이젠 시간이 왜 이리 안 가는지."
강풀 작가(48·본명 강도영)는 앓는 소리부터 하며 자리에 앉았다.
8년 전 카카오 웹툰에 연재한 '무빙'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디즈니+(플러스)에서 동명 시리즈로 태어났다. 500억 제작비가 투입된 대형 프로젝트로 기획 단계부터 주목받았다. 원작자 강풀이 극본도 썼다. 집필에만 4년이 걸렸다.
웹툰계 조상이라 불릴 만큼 입지가 탄탄한 강풀은 '무빙'(감독 박인제)으로 신인 작가로 데뷔했다. '순정만화' '바보'(2008), '그대를 사랑합니다'(2011) 등 영화로 탄생한 웹툰만 여러 편이지만, 직접 펜을 든 건 처음이다.
최근 서울 종로구 화동 한 카페에서 만난 강풀은 "착한 사람이 이기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웹툰계 조상, 20년만 신인 작가로
강풀은 2003년 데뷔작 '순정만화'로 이름을 알린 지 20년 만에 신인 작가가 됐다. 자신의 작품이 영화화되는 과정에서 원작자로서 개입을 안 하기로 유명한 그가 왜 집필을 맡았는지 궁금했다. 직접 시나리오를 쓴 이유를 먼저 물었다.
"개발 과정에서 '이렇게 가야 한다'고 방향에 관한 의견을 냈어요. 그 과정에서 제작진이 '직접 써보시는 게 어떠냐' 묻더라고요. 나를 못 믿는 성격이라서 거꾸로 '그럼 내가 써볼 테니 한번 보고 판단해달라'고 했죠. 이후에 오케이(OK) 된 거죠. 16부 예정이었는데 20부를 하게 해주면 쓰겠다고 했죠."
'무빙'의 영상화는 2015년 발표됐다. 강풀은 "연재할 때만 해도 OTT 시대가 아니었는데, 세상이 변하면서 힘을 갖게 됐고 드라마가 맞겠다 싶었다. 욕심도 났다. 만화에 미처 그리지 못했던 서사를 볼륨을 키워서 써보고 싶었다"고 했다.
강풀은 "원작을 각색한 영화는 내 것이 아니라 감독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늘 '알아서 하시라'고 말씀드렸다"고 떠올렸다.
"'만화나 그리지, 꼴값 떨고 있네?' 소리 들을까 봐 잠이 안 왔어요. 부담감이 심하더라고요. 강풀 영화의 최대의 적은 강풀 원작이라는 평도 들었어요. 내가 쓸 때는 뭔가 달라야 한다는 강박도 생겼죠. 그런데도 도전을 하게 되더라고요."
홀로 만화를 그리던 강풀은 '무빙'을 통해 새로운 즐거움을 알았다고 했다. 그는 "공개되기까지 쉽지 않은 과정을 지켜보며 처음에는 만화가가 낫다고 생각했었다"며 웃었다. 그러면서 "자본의 논리가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또 다른 스트레스도 받게 되더라"고 했다. 협업을 통해 부담보다 즐거움이 더 컸다.
"믿고 의지할 사람이 생긴 게 처음이에요. 만화 그릴 때는 의사결정을 혼자 했는데 의견을 물어볼 사람이 생긴 거죠. 작품 이야기를 하면서 함께 만들어가는 즐거움을 처음 느꼈어요. 서로 믿고 귀 기울이면서 함께 만들어 가는 기분이 참 좋더라고요."
'이야기꾼' 강풀의 세상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세상이 변했다. 콘텐츠 시장도 급격히 달라졌다. 강풀은 "방망이 깎는 노인이 된 것 같다"고 했다.
"내 나이 곧 50인데, 10년쯤은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겠죠? 그렇다고 은퇴를 계획한 건 아니지만, 언젠가 시대에 뒤처지지 않을까 걱정됐죠. 연출에는 관심이 없어요. 감독은 본인 작품 준비와 촬영 포함 최소 3년은 걸리더라고요. 이야기꾼으로, 오로지 활자 안에서 살고 싶어요."
'무빙'의 후속 시즌 등 계획을 묻자 강풀은 "9월 20일 공개되는 마지막회 이후에 다시 물어달라"며 웃었다. 그는 "처음으로 안식년을 가질 생각이다. 공개가 마무리되면 두 달 정도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다. 그 후에 이후 행보가 정해지지 않을까"라며 말을 아꼈다.
계획을 집요하게 묻자 강풀은 "예전에 '히든'을 하겠다고 했다가 4년째 거짓말쟁이가 돼 버려서"라며 웃었다. 그러면서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극본을 쓰는 맛을 알아버렸다"고 털어놨다. 그는 "'무빙'이 잘 됐다고 해서 극본을 하겠다고 해서는 안 될 거 같다. 만화에 대한 애정도 여전히 있다"고 덧붙였다.
"대중은 더는 서사에 관심이 없는 거 같아요. 2배속, 숏폼 콘텐츠가 소비되고, 줄거리보다는 보고 싶은 걸 찾아보는 시대죠. '무빙'에서 사람을 깊고 넓게 보여주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 서사를 탄탄하게 완성해야 했어요. '과연 맞나' '모험은 아닌가' 걱정도 됐죠. 단편적으로 소비되는 작품이 아닌 책꽂이에 꽂히는 책 같은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스토리 서사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무빙'으로 다행히 산은 넘었다지만, 다음에도 가능할까요?"
가족 지키려 싸우는 사람들=히어로
강풀은 '무빙'을 "슈퍼 히어로가 아닌 히어로물"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형 히어로'라고 처음에 우겼는데, 이제 받아들여 주셔서 감사하다"며 웃었다.
"저도 한국형 히어로가 뭔지 모르겠어요.(웃음) 다만 우리나라 역사와 닿아있길 바랐어요. 의지와 상관없이 시대가 흘려버린. 뭔가 이기기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길 바랐죠. 가족이나 아들, 남편이나 부인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을 그리고 싶었어요. 엄마, 아빠들이 이 시대 히어로라고 생각해서 그걸 확장했어요. 가족이 바로 한국형 히어로라고 봤어요."
강풀은 "착한 사람들이 이기는 이야기가 좋다"고 했다. 그는 "작가지만 첫 번째 독자이기도 하다. 염세적인 이야기는 안 보고 싶다. 제가 좋아하는 이야기는 착한 사람들이 이기는, 좋은 사람들이 힘을 합치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이야기꾼 강풀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재미'다. 그는 "의미보다 재미가 중요하다. 시청자가 봤을 때 무조건 재미있길 바랐다. '나만 재밌으면 어떡하지' 가장 고민했다"고 말했다.
강풀의 작품에는 늘 소시민이 등장한다. 우리 주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이유를 묻자 그는 "그것밖에 못 해서 그런다"며 호방하게 웃었다.
이어 "이야기 소재를 주변에서 찾는다. 주변에서 일어날 법한 이야기를 쓴다. 스케일을 키우는 데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사람을 보여주는 데 집중하고 싶다. '무빙'에서도 그랬다. 초능력자들은 땅에 발붙이기 힘든 사람들이다. 와닿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아는 사람이어야 했다"고 말했다.
이이슬 기자 ssmoly6@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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