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오펜하이머를 이해하는 몇 가지 시선

김규종 2023. 9. 1.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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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영화 <오펜하이머>

[김규종 기자]

 영화 <오펜하이머> 스틸 이미지.
ⓒ 유니버설 픽쳐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 로버트 오펜하이머 평전>을 토대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만든 영화 <오펜하이머>는 경이롭다. 세 시간에 이르는 상영시간은 절대 길거나 지루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어쩌면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긴장된 음향과 시각효과 덕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놀란 감독이 쓴 각본이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끝까지 저항한 일본군을 지옥의 나락으로 몰고 간 원자탄 제조공정의 책임자 오펜하이머(1904-1967)는 널리 알려져 있다. 이른바 '맨해튼 프로젝트'란 이름으로 유명해진 물리학자가 오펜하이머다. 영화는 그의 청년기부터 말년에 이르는 비교적 긴 시간대를 배경으로 진행된다. 놀란은 논란이 될 만한 시기를 골라 영화에 도입한다.

<오펜하이머>를 보기 전에 아인슈타인(1877-1955)의 상대성이론과 1920년대 중반 양자역학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유리할 듯하다. 또한 에스파냐 내전과 2차 대전 그리고 원폭 투하와 매카시 선풍 같은 시대 상황에 관한 전반적인 이해 또한 유익하다. 개인과 사회 혹은 역사의 관계는 상호 되먹임 구조이기에 양자에 관한 지식이 유용하기 때문이다.

천재 과학자 오펜하이머

오펜하이머는 독일 출신 유대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버드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그는 물리학과 라틴어, 고전 그리스어를 공부했으며, 동양철학에도 관심을 가졌고, 시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하버드를 졸업한 그는 1924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원자구조를 연구한다. 하지만 실험물리학 학풍은 그와 엇박자를 내기 시작한다.

캐번디시 연구소에서는 제임스 맥스웰, 조지프 톰슨, 어니스트 러더퍼드, 닐스 보어, 제임스 채드윅 같은 실험물리학자들이 득세하고 있었다. 오펜하이머는 케임브리지에서 신경쇠약과 우울증을 경험하면서 지도교수 패트릭 블래킷을 독살하려는 시도까지 감행한다. 운이 좋았던 그는 1926년 막스 보른의 초청으로 게르마니아의 괴팅엔 대학에 입학한다.

캐번디시 연구소와 달리 괴팅엔 대학에서는 이론물리학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여기서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재능을 한껏 펼친다. 거기서 그는 독일에 체류한 지 불과 9개월 만인 1927년에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당시 괴팅엔에서는 엔리코 페르미, 볼프강 파울리,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파울 디랙 같은 젊은 물리학자들이 양자역학을 태동시키고 있었다.

양자역학은 질량과 에너지는 등가이며, 물질은 파동성과 입자성을 동시에 소유한다고 주장한다. 양자론 발전에 초석을 놓은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려는 아이러니한 자세를 취한다. 미국으로 돌아온 오펜하이머는 버클리와 캘리포니아 공대(칼텍)에서 양자론 연구와 발전에 총력을 기울인다. 그것이 훗날 맨해튼 프로젝트와 직결된다.

오펜하이머의 사랑과 결혼
 
 영화 <오펜하이머> 관련 이미지.
ⓒ 유니버설 픽쳐스
 
누구나 그렇듯이 오펜하이머 역시 젊은 날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 1936년 그는 심리학자 진 태틀록(1914-1944)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진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반항적이면서도 사랑을 갈구하는 모순적인 인물이다. 오펜하이머를 깊이 사랑하면서도 그가 가져온 꽃다발을 주저 없이 쓰레기통에 내던져버리는 불안정한 인격의 소유자다.

진 태틀록은 미국 공산당원이자 급진적인 정치 행동으로 오펜하이머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정치가 진선미 세 가지 가운데 무엇과 가장 가까운가, 하는 질문을 던질 정도로 오펜하이머는 정치에 무관심한 인물이었다. 그를 정치적 영역으로 인도한 첫 번째 여성이 진이다. 훗날 그의 아내가 된 캐서린 역시 미국 공산당원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오펜하이머가 진과 캐서린을 만났던 1936년에 에스파냐 내전이 발발한다. 3년 넘게 진행된 내전으로 60만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수많은 난민과 고아가 세상을 떠돈다. 오펜하이머는 공산당을 통해서 거금을 기부한다. 캐서린의 두 번째 남편 조셉 달렛은 내전에 참전했다가 목숨을 잃는다. 세 번째 남편과 살다가 그녀는 오펜하이머와 사랑하게 된다.

1939년 9월 1일은 물리학자들에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그 하나는 로시 로마니츠가 발표한 '블랙홀'이며, 그 둘은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다. 좁은 의미의 물리학적 발견과 세계사적 대사건인 2차 대전 발발이 공교롭게 겹친다. 아인슈타인은 나치의 핵폭탄 제조가 인류의 재앙이 될 것이라는 경고의 편지를 루스벨트 대통령에 보낸다. 이때부터 오펜하이머는 우라늄 연구에 본격 착수하며, 1942년 8월 미 육군은 맨해튼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오펜하이머와 맨해튼 프로젝트

맨해튼 프로젝트의 핵심은 인류 초유의 원자탄 개발이다. 미증유의 세계대전으로 지구촌 곳곳이 상상을 초월한 참상을 경험하고 있을 때, 미국과 나치 독일은 경쟁적으로 원자탄 개발을 서둔다. 원자탄은 전쟁을 끝낼 수 있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기술과 실무 책임자는 오펜하이머였고, 독일 쪽 대표자는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였다.

미 육군 소장 레슬리 그로브스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정점에서 모든 업무를 총괄한다. 그는 오펜하이머의 자유분방한 사생활, 공산주의 사상에 경도된 지난날의 행적에 고개를 흔들지만, 국가를 향한 오펜하이머의 충성심을 굳게 확신한다. 그런 믿음에 기초하여 그로브스는 오펜하이머가 필요로 하는 인적-물적 자원에 대한 지원을 아낌없이 베푼다.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프로젝트에 에드워드 텔러, 한스 베테, 어니스트 로런스, 엔리코 페르미, 리처드 파인먼 같은 당대 최고의 과학자들을 영입한다. 그는 뉴멕시코에 자리한 로스앨러모스 고원에 연구소를 건립하고 원자탄 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마침내 1945년 7월 16일 앨러머고도에서 '트리니티'라고 명명된 최초의 핵폭탄을 성공시키기에 이른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계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이것은 트리니티가 성공리에 폭발한 다음 오펜하이머가 남긴 말이다. 이 말은 힌두교의 3대 경전 가운데 하나인 <바가바드기타>에 나오는 말이기도 하다. 사실 오펜하이머는 취미로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여 <바가바드기타>를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아울러 네덜란드어는 1주일 공부하여 강의할 정도로 언어에 소질을 보인 인물이기도 하다.

오펜하이머와 원자탄 투하

나치 독일은 원자탄이 개발되기 직전인 1945년 5월 8일 오후 11시 1분(러시아 기준 5월 9일 0시 1분) 항복을 선언한다. (영국과 프랑스 같은 유럽 연합군의 전승 기념일은 5월 8일이고, 러시아의 그것은 5월 9일이다). 이탈리아는 1943년에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고, 원자탄 투하 대상 국가는 추축국(樞軸國) 가운데 끝까지 저항하던 일본이었다.

1945년 7월 26일 포츠담 선언 열흘 전에 트리니티가 성공함에 따라 미국은 원자탄 투하 일자를 고려한다. 그 결과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15킬로톤 규모의 원자탄이 투하된다. 히로시마의 14만, 나가사키의 4만~7만 시민들이 당일 사망한다. 이로써 일본 군부는 더 이상의 저항이 쓸모없다는 결론에 이르러 8월 15일 투항한다.

원자탄 투하의 성공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은 오펜하이머와 조력자들에게 엄청난 영광과 환희를 가져다준다. 하지만 그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와 자책으로 이어진다. 원자탄의 파괴력과 후폭풍이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트루먼 대통령은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 오펜하이머를 백악관에 초청하여 거대한 승리를 축하한다.

내 손에 피가 묻어 있다고 말하는 오펜하이머에게 트루먼은 손수건을 건네주고는 닦으라고 빈정댄다. 그러면서 소련은 원자폭탄을 영원히 만들지 못할 것이라 호언장담한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정반대되는 생각을 피력하고, 미국의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한다는 뜻을 피력한다. 동시에 그는 원자력을 제한할 미국 주도의 국제기구 창설을 제안한다.

"저렇게 징징대는 인간은 들여보내지 마라!"

오펜하이머와 대담을 끝낸 다음 트루먼이 동석했던 국무장관 애치슨에게 남긴 말이다. 연합군의 우두머리로 전승국을 대표하는 미국 대통령의 자신만만하고도 잔인한 모습이 담겨 있는 발언이다. 그러나 1949년 소련은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했고, 1954년 미국의 15메가톤 규모의 수소폭탄 개발에 이어 소련 역시 1955년 수소폭탄 개발에 성공한다.

오펜하이머와 청문회
 
 영화 <오펜하이머> 관련 이미지.
ⓒ 유니버설 픽쳐스
 
1950년 2월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은 공화당원 대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국을 공산당에게 뺏긴 것은 미국의 공산주의자들 때문이며, 우리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205명의 공산주의자 명단을 가지고 있다. 국무부에만 57명의 공산당원이 암약하고 있다."

이른바 매카시 선풍의 악랄한 바람이 불어온 것이다. 이런 배경에는 1948년 6월 소련의 베를린 봉쇄, 1949년 8월 소련의 핵실험 성공, 1949년 10월 중국의 장개석이 국공내전에서 패배해서 대만으로 쫓겨나고, 대륙에 모택동의 중국이 성립한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미국의 혐오와 공포를 극명하게 드러낸 인물이 매카시였다.

매카시 선풍은 원자력 위원회도 비켜 가지 않는다. 수소폭탄 개발에 관한 견해 차이로 오펜하이머는 오랜 동지 에드워드 텔러와 갈라서고, 미국 당국은 오펜하이머의 과거 행적에 다시 의구심을 가진다. 그런 상황을 악화시킨 인물은 오펜하이머에게 공산주의자이자 소련 스파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씌운 루이스 스트라우스 원자력 위원회 의장이었다.

스트라우스는 열렬한 반공주의로 무장한 민주당원 윌리암 보든을 선발대로 삼아 오펜하이머를 향한 공격의 포문을 열어젖힌다. 스트라우스가 오펜하이머를 공격하게 된 배경을 영화는 오해에서 출발한 원한과 복수심으로 그려낸다. 저명한 물리학자들이 모여 있던 자리에서 오펜하이머의 가벼운 농담을 스트라우스는 자신을 향한 모욕이라고 받아들인다.

스트라우스가 오펜하이머의 농담을 모욕으로 받아들인 근저에는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가 대화하는 장면이 자리한다. 스트라우스는 원자력 위원회 건물에서 오펜하이머와 대화를 마친 아인슈타인이 자기를 완전히 무시해버렸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판단한 까닭을 그는 오펜하이머가 자신을 폄훼(貶毁)하는 발언을 했을 것이라고 넘겨짚은 게다.

사실 이 대목은 관객에게도 상당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데, 영화 끝부분에서 전모가 드러난다. 그것은 원폭 실험이 몰고 올 후폭풍에 관한 오펜하이머의 사려 깊은 근심과 아인슈타인의 상념이 원인이었다. 하지만 사적인 오해에서 비롯한 분노와 모욕을 반드시 돌려주겠다는 욕망으로 가득 찬 스트라우스가 오펜하이머를 청문회에 세운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오펜하이머 청문회 5년 뒤에 스트라우스 청문회가 열렸다는 사실이다. 오펜하이머의 충성심과 진실성을 확인하는 비공개 청문회에 반하여, 스트라우스의 상무장관직 수행 능력을 묻는 공개 청문회가 열린 것이다. 이 자리에서 물리학자 데이비드 힐은 스트라우스의 개인적인 원한을 거론함으로써 스트라우스의 패배를 가져온다.

오펜하이머와 역사

역사가 되풀이된다는 말은 유효하다. 개인사든 사회사든 국가사든 세계사든 그 말은 모두에게 적용된다. <오펜하이머>에서 우리는 아인슈타인의 말로 그것을 확인한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의 시발점이었으나, 양자역학을 이해하지 못한 인물로 생각되었다. 1905년 특수상대성이론, 1915년 일반상대성이론으로 최고의 물리학자 반열에 오른 아인슈타인.

그는 1921년 광전효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음으로써 환희의 절정을 경험한다. 막스 플랑크, 아인슈타인, 닐스 보어의 발견에 기초한 양자역학은 1925년 이후 하이젠베르크, 에르빈 슈뢰딩거, 막스 보른, 파울 디랙의 손을 거쳐 발전한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죽을 때까지 자신에게서 첫걸음을 뗀 양자역학을 인정하지 않는다.

언젠가 오펜하이머와 대화하면서 아인슈타인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자네가 버클리에서 나를 위해 리셉션을 열고 상을 준 일이 있지. 그런데 그건 날 위한 게 아니라 자네들 모두를 위한 것이었지. 이제 자네 차례야. 자네가 넉넉히 유명해지고, 벌을 받고 난 후에 세상은 자네에게 연어와 감자샐러드를 대접하고 메달도 줄 거야. 모든 걸 용서했다고 말할 테지. 하지만 그건 자넬 위한 게 아니라, 그들 자신을 위한 거야."

1963년 12월 린든 존슨은 원자력 위원회에서 오펜하이머에게 '엔리코 페르미상'을 수여한다. 10년 전 그가 겪어야 했던 비극적인 청문회의 기억을 씻어주고자 함이었다. 그로써 오펜하이머는 온갖 의혹에서 풀려나 복권되었으나, 그의 완전한 복권은 2022년에 이뤄진다.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과학적 발견과 그에 따른 유명세와 희생은 대물림된다. 따라서 개인이 치러야 하는 오해와 소외와 보복은 어쩔 도리 없는 것 아니겠는가?!
 
 영화 <오펜하이머> 스틸 이미지.
ⓒ 유니버설 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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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저의 개인블로그에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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