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쌓인 등산화를 다시 꺼냈습니다

김재완 2023. 9. 1.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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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100대 명산을 모두 오른 후배를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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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완 기자]

몇 년간 소식이 뜸했던 후배의 SNS는 온통 산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취미라고 하기엔 과도한 일정의 산행이 명백해 보였고, 산과 전혀 연관 없어 보이던 그의 변화가 궁금했다. 나는 지리산 종주는 물론이고, 마흔 중반을 넘긴 몇 년 전까지도 수시로 산을 찾던 산악인 선배로서 후배에게 전화를 했다.

"와!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시죠!"

후배의 목소리는 여전히 중저음이었지만, 제대를 앞둔 청년처럼 들떠 있었다. 나는 형식적인 안부인사도 생략한 채, 등산의 목적을 물었다.

"그냥요. 그냥 산이 좋아요."

설명할 수 없는 이유 없이 어떤 대상이 좋은 것이 가장 맹목적이고 즐거운 법이다.
후배는 서른 중반이 되며 깊은 고뇌에 빠졌다고 한다. 평일 대낮에 듣기는 쉽지 않은 대답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세상 속에서 밀려오는 무료함. 반복되는 직장 생활에서도 꺼지지 않는 일상탈출에 대한 욕망, 대안도 대책도 없지만 남들을 따라가고 있는 길에 대한 의구심.
 
 정상에서 보는 풍광 때문에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다.
ⓒ elements.envato
 
모두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 고뇌하는 것도 아니며, 이런 고뇌를 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비슷한 시기 닮은 고민을 한 나는 그의 고뇌가 이해는 되지만, 왜 산으로 향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왜 하길 산이었어? 너 산이라면 질색이었잖아?"

후배는 답답한 마음에 우연히 겨울 태백산을 찾았고, 운명처럼 자신의 취향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렇다. 모든 운명적인 일은 사소한 것에서 비롯되는 법이다.

"회사에서 가니까 싫었나 봐요. 첫 산행은 너무 힘들었는데, 다음 주에 또 생각이 나고, 세 번째부터는 멈출 수가 없었어요."

회사원이라면 후배의 말에 모두가 공감할 것이다. 회식은 메뉴에 따라 반가울 때도 있지만, 워크숍은 끔찍하며, 산을 좋아하지 않는 직장인에게 등산이 있는 워크숍은 최악이었을 것이다.

후배가 산을 다니며 먼저 찾아온 변화는 신체였다고 한다. 누적된 피로로 주말이면 운동은 고사하고 외출도 적었다고 한다. 그러나, 주말마다 등산을 시작한 지 석 달만에 오킬로그램이 빠졌다고 한다. 사라졌던 식욕이 솟아났음에도, 사라져야 할 군살이 사라지는 마법이 일어난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1킬로그램의 감량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것이다.

체중이 줄고 등산이 익숙해지자 잡념과 함께 월요병도 사라졌다고 한다. 월요일을 보내야 산에 갈 수 있는 주말이 오기 때문이다. 월요일이 지옥의 종착지가 아니라 천국으로 가기 위한 휴게소가 된 것이다. 주말 아침 배낭을 챙기며 휘파람을 부는 자신에게 놀랐고, 산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자신이 대견했다고 한다. 그날 이후로 주변에서 말릴 정도로 산을 찾았다고 한다.

얼마 후, 우리는 오랜만에 만나 등산에 대한 찬양의 시간을 가졌다. 후배는 세월이 흘렀지만 피톤치드 마사지를 받아서인지 예전보다 생기 있어 보였다. 역시 최고의 성형은 운동과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취기가 오른 후배가 느닷없는 고백을 했다.

"마흔이 넘어서 글을 쓰게 되고, 좋아하는 걸 찾아서 행복하다고 하셨죠? 제겐 산이 그래요."

문득 등산과 글쓰기의 공통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매진한 만큼의 대가를 정직하게 내어주며, 성패와 무방하게 뜻대로 할 수 있는 드문 행위이다. 뜻대로 되는 일은 점점 줄어들며, 하기 싫은 일을 하지 못하는 자유도 줄어드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 아닐까? 다행히 후배와 나는 그 일상에서 숨구멍을 찾았다.

얼마 후, 후배는 한국의 100대 명산을 모두 올랐음을 인증하는 사진을 올렸다. 회사를 다니는 직장인이 달성할 수 없는 속도로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후배는 일주일에 2~3회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녔고, 여름휴가도 산에서 보냈다. 누가 시켜서 할 수 없는 일을, 해낼 수 있는 원동력은 단 하나이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

자신의 취향을 발견하지 못한 채 부유하는 모든 이들이여 일상을 조금만 깨트려보자. 나는 후배 덕에 먼지 쌓인 등산화를 꺼내며, 산을 오르는 이유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정상에서 보는 풍광 때문에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다. 등산의 목적은 정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 있다. 산을 오르는 동안 실재하는 육신의 고통으로 인해, 실체가 없는 상념을 잊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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