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양' 찾는 위기의 김정은…北, 숙청 피바람 부나
北, 이달 최고인민회의…내각총리 경질 전망
김정은, 경제 파탄으로 '수령 무오류성' 흠집
"김정일처럼 희생양 찾기…의도적 책임회피"
집권 초기 "다시는 인민들의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했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경제난의 책임을 뒤집어씌울 희생양을 찾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특히 장마당 쌀값도 안정시키지 못한 상황에서 미사일 도발과 훈련, 열병식을 거듭 밀어붙이는 것은 무리해서라도 주민들의 시선을 돌려야 할 만큼 '리더십 위기'에 봉착한 방증이라는 평가다.
1일 북한 관영매체 보도를 종합하면, 북한 당국은 오는 26일 평양에서 최고인민회의를 소집한다. 이는 우리의 국회에 해당하는 기구로, 북측은 이번 회의에서 '조직 문제'가 논의될 것이라고 밝혔다. 최근 김 위원장으로부터 "건달뱅이 내각이 국가경제사업을 다 말아먹고 있다"고 질책받은 김덕훈 내각총리의 경질을 비롯한 내각 개편 가능성이 점쳐진다.
그 흔한 침수에…김정은, 왜 이렇게까지 격노했나
앞서 김 위원장은 지난달 21일 대규모 침수가 발생한 평안남도 지역을 찾아 김덕훈 총리를 거칠게 비난한 바 있다. 기반시설이 열악한 북한에서 장마철 침수는 흔한 일인데도, 내각이 무책임한 탓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허벅지까지 물이 차오른 논에 직접 들어가는 모습을 연출했다. 이런 질책은 주민들이 보는 노동신문에도 여과 없이 공개됐다.
주목할 점은 김 위원장이 "책임 있는 기관과 당사자를 색출해 당적, 법적으로 단단히 문책하고 엄격히 처벌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당적, 법적으로 처벌하라'는 표현은 북한에서 최고 수위의 처분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김정은 집권 초기 대대적인 숙청으로 '피바람'이 불던 시절 쓰이던 표현이 10년 가까운 세월 만에 이례적으로 다시 등장한 것이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북한에서 '당적, 법적 처벌'은 사형을 포함한 최고 수준의 징계를 암시한다"며 "2013년 6월 북한 문건에는 처형된 것으로 알려진 리영호 인민군 총참모장이 '당적으로, 법적으로 처리된 자'라고 규정돼 있다. 역시 처형된 것으로 알려진 전정갑 서해전대장과 김철 인민무력부 부부장에 대해서도 동일한 표현이 쓰였다"고 분석했다.
조 위원은 이러한 '희생양 찾기'가 김정일 시절 '심화조 사건'을 연상시킨다고 짚었다. 1994년부터 이른바 '고난의 행군'으로 수백만의 인민이 굶어 죽자, 김정일은 대규모 숙청 작업을 벌였다. 악화된 민심의 눈을 돌리기 위해 아버지(김일성) 시대 인물들에 간첩 혐의를 씌워 숙청한 것이다. 그 대상자만 최소 2만5000명, 사망자는 3000명을 넘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오류성' 무너진 위기의 수령…희생양 찾는 이유
복수의 대북 소식통은 북한 내부에서 김정은의 위신이 급격히 하락하고 있다고 전했다. 집권 초기 "다시는 인민들의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경제는 파탄이 났고 '고난의 행군' 시절만큼 심각한 식량난으로 각지에서 아사자가 속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정은의 격노는 '최고지도자의 무오류성'에 위기가 닥친 것을 방증한다는 분석이다.
무엇보다 내각은 사실상 실권이 없다는 점에서 '책임 회피'를 위한 공포정치의 부활로 평가된다. 노동당에 모든 권력이 집중된 북한에서 내각은 경제를 회생시키거나 국가적 사업을 주도할 만큼의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조한범 위원은 "집권 이후 최악의 위기에 봉착한 김정은이 공포정치로 돌파구를 마련하려 하는 듯하다"며 "의도된 책임 회피 전략"이라고 지적했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도 '위기론'에 힘을 실었다. 경제적 타격이 극심한 상황에서도 미사일 도발과 정찰위성 재발사, 각종 대규모 훈련, 열병식을 거듭 밀어붙이는 것은 그만큼 주민들의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다는 진단이다. 박 교수는 "부담을 안고서라도 주민들의 단합이 필요한,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을 반영한다"며 "무리수를 두고 있다"고 분석했다.
북한은 올 들어서만 벌써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 열병식을 진행했고, 오는 9일에도 '정권 수립 75주년'을 기념하는 9·9절 민간무력 열병식을 예고했다. 지난 2월에는 건군절 75주년 열병식을, 7월에는 전승절(정전협정 체결일) 70주년 열병식을 개최한 바 있다. 한 해 동안 세 차례나 열병식을 여는 것은 김정은 집권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가죽 롱코트' 걸치던 실세에서 '숙청 위기' 김덕훈
다만 일각에선 김덕훈 총리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관측도 나온다. '김정은의 질책' 이후 열흘 사이 두 차례에 걸쳐 조선중앙통신에 언급됐기 때문이다. 태국 수상에게 축전을 보냈다거나 광산 준공식에 참석했다는 보도였다. 그러나 축전 보도의 경우 주민들이 볼 수 있는 노동신문에는 실리지 않았고, 특히 그의 신변을 짐작할 수 있는 사진도 첨부되지 않았다.
한편, 김덕훈 총리는 2020년 북한 간부 진영에선 나름 젊은 축인 59세의 나이로 총리 자리에 올랐다. 권력의 정점으로 꼽히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 중 하나로, '김정은 최측근'을 상징하는 가죽 롱코트를 걸친 채 현장 시찰에 나서는 모습을 연출하곤 했다. 특히 주요 행사 때마다 김정은 다음으로 호명되는 경우도 잦아 실세 중의 실세로 평가됐다.
장희준 기자 jun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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