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에 지어졌으나 방문한 적 없는 시인의 문학관
[박태신 기자]
1. 하늘의 조화
책상 앞 창문을 닫아야 할 정도로 8월 26일 '구상 문학기행'을 떠나기 전엔 세찬 비가 여러 날 내렸다. 구상 시인이 <그리스도 폴의 강 6> 시에서 비를 '은현'(銀絃 : 은색의 줄)이라 표현한 것을 보고 감탄하고 있던 중이었다. 줄악기(현악기)로 치면 첼로 줄 같은 굵은 빗줄기였다. 작품론을 준비하던 나에게 이 '은현'은 영감이 떠오르도록 도움을 준 것 같다.
그러다 기행 이틀 전 하늘은 비구름을 몰아내고, 초승달을 건너뛴 '수박달' 반달을 금도금해 내보여주었다. 너무도 선명했기에. 그러다 기행 전날 칠월 칠석의 별 직녀성(베가)과 베가성(알타이르), 여기에 데네브라는 별과 함께 '여름의 대삼각형'을 이룬 모습을 내게 보여주었다.
이날 저녁 나는 내가 사는 공릉동에선 많이 알려진 카페, '표준커피'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새로 생긴 카페에 들어가, 마시기엔 너무 아깝게 예쁜 자태로 담긴 차를 마시며 기행 준비를 마무리했다.
▲ 《구상》(문학사상사). 이 책에 실린 시들을 읽고 조금 깊게 감상하고 기행에 참석했다. |
ⓒ 박태신 |
2. 구상계
은하계엔 은하를 비롯해 성운, 별(항성), 행성이 가득하다. 실존하는 그 세계는 끝이 없어서 우리는 상상력과 형이상학을 동원해야 가까스로 가늠할 수 있다.
1만여 편의 시는 어떨까. 나는 그 광범위함을 은하계에 빗대 구상 시인의 시 세계를 '구상계'(具常界)라고 칭해 보았다. 구상 시인이라는 은하를 중심으로, 1만여 개의 시라는 별과 행성, 시인의 인간관계와 사상 등 시인과 관련한 온갖 것이 들어 있는 세계라는 뜻에서.
▲ 왜관 수도원 성당. 태양빛이 스테인드글라스에 걸러진 후 신자석을 은은히 비춘다. |
ⓒ 박태신 |
노년기에 해당하는 적색거성이 된 구(舊) 성당은 은은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우리는 활발하게 활동하는 태양같이 성스럽고 신비스러운 대성전 성당 안에, 성당의 '존재양식'인 침묵을 거스르고 들어갔다.
그 안엔 움직이지 않은 오로라마냥 아름다운 빛의 변화를 창을 통해 보여주는 스테인드글라스, 전 세계의 돌이 네 군데 박혀 중심을 잡아주는 '부유하는' 십자가가 있었다. 우리는 성스러움의 파문(波紋)에 감동하고서 나왔다.
수라장(修羅場)을 방불케 하는
문 밖 거리의 인파와 소음은
마치 딴 세상 정경인 듯
오직 죽음과 같은 고요 속에
고요가 깃들어 있었다.
그 고요 속에 나 또한
고요히 잠겼노라니
그 고요가 고요히 속삭였다.
이제 너의 참 마음을 열어보라고!
그러나 나는 말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 시 '고요' 중에서
발길이 뜸한 대성전 뒤쪽 주변은 수도원 본래의 모습이었다. 키 큰 나무들과 어울려 있는 구 성당과 옛 사제관, 모자상, 등나무 벤치의 안정된 배치가 그랬다.
3. 구상 문학관
▲ 바윗돌. 시인이 서재에 30여 년 동안 보관하며 대화를 나눈 상대. 이 바윗돌이 시 속의 바윗돌이라 믿고 사진에 담았다. |
ⓒ 박태신 |
1층 로비에 여러 개의 소파와 탁자 및 의자가 있는 문학관은 처음 본다. 담소를 나누기 좋은 장소로 만들고 싶었나 보다. 이곳 안내실 옆에서 나는 시인의 소장품 하나를 발견해 들여다보았다. 시를 읽었기 때문이다. 바윗돌이다. 이 바윗돌이 시의 바윗돌이라 여겼다.
돌이라기에는 크고
바윗돌이라는 게 십상인데
그저 울퉁불퉁 막 생겼으나
그 머리 쪽에 차돌이 몇 개 박혀 있어
마치 흰눈이 녹지 않는 산마루 같다.
……
그 바윗돌은 나와 날마다 마주하며
집안의 어느 누구, 어느 책보다도
가장 많은 시간의 대화를 나누곤 하는데
그것도 아주 형이상학적인 것이
화제의 중심이다.
- 시 '어느 바윗돌' 중에서
▲ 구상 시인과 서영옥 여사. 의사였던 서영옥 여사는 구상 시인을 위해 병원 뒤쪽에 집필실 ‘관수재’를 지었다. |
ⓒ 박태신 |
이번 기행에서 내가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여기는 것은 구상 시인과 서영옥 여사의 사진이다. 서재에서 찍은 듯한데, 두 분의 미소 속에서 평소의 금슬 좋은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감동이 일었다. 두 분이 결혼할 수 있었던 설화 같은 에피소드를 알고 있어 더 그랬다.
우리는 이제
자신보다도 상대방을
더 잘 안다.
무언(無言)으로 말하고
말로써 침묵한다.
……
이제사
우리의 만남은
영원에 이어졌다.
- 시 '노부부(老夫婦)' 중에서
▲ 관수재. 집필실과 서재이자, 병치레를 많이 한 시인의 요양소이기도 했다. |
ⓒ 박태신 |
4. 관수재(觀水齋)
문학관 뒤쪽엔 생전 때 집필실이자 서재였던 곳 '관수재를' 복원해 놓았다. 시인은 왜관의 낙동강이든 서울의 한강이든 강에 나가 '관수세심'(觀水洗心) 즉 '물을 보고 마음을 씻는 것'을 목적으로 삼으시곤 했다. 그래서 '관수재'는 집필실 이름으로 아주 적절한 것이었다.
▲ 칠곡보생태공원. 낙동강과 고속전철 철교가 보인다. |
ⓒ 박태신 |
5, 낙동강
2019년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세운 시비를 찾아 칠곡보생태공원에 들렀다.
아지랭이가 아물거리는 강에
백금(白金)의 빛이 녹아 흐른다.
……
멀리 철교(鐵橋) 위에서
화통차(火筒車)가
목쉰 소리를 낸다.
풀섶에 갓 오른
청개구리가
물끄러미
바라본다.
- 시비 '강' 중에서
'화통차'가 지나다니는 철교는 낙동강 칠곡보 아래쪽에 있고 지금은 그 위로 무궁화호와 새마을호가 서울역, 왜관역, 부산역을 오고간다. 왜관역에 내려 베네딕도 수도원 들른 경험이 10여 년 전 있었다. 칠곡보 위쪽엔, 또 하나의 '화통차' KTX가 다니는 튼튼한 철교가 세워져 있다.
마치 시비가 시인이듯 했다. 시인은 낙동강을 지긋이 바라보고 우리는 시인 옆에서 엎어지며 노니는 손녀들 같았다. 너른 잔디밭도 가만히 둘 수 없었다.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저녁식사 후엔 작가론과 작품론 발표, 토론시간을 가졌다. 기행 오기 전 한자어가 많은 구상 시인의 시를 네이버 국어사전과 한자사전 뒤적이며 읽고 상상하고 그 놀라운 시어에 감탄했다. 또 시인의 삶과 사상을 엿보았다. 덕분에 나는 이 시대 큰 어른을 만난 것 같았다. 이제 선물 같은 시간들을 감사히 여기며 여름을 떠나보내려 한다. 오늘 새벽녘 가을의 전령사 귀뚜라미 소리를 한껏 들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다음 '브런치스토리'에도 게재했습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교육부 장관이 저지른 심각한 교권 침해
- "박 대령의 언론 통한 자료 공개, 증거인멸"... 군 검찰의 괴상한 논리
- [단독] '지분 쪼개기'까지... 대법원장 후보자 배우자 또 투기 의혹
- [단독] 대학병원 전공의들, '비급여' 비타민만 2억 넘게 처방... 징계도 안 받았다
- [이충재 칼럼] 윤 대통령의 극우 편향, '권력중독' 탓이다
- '안보 칼춤' 윤 정부의 비겁한 통일부 죽이기
- RE100 없는 CF100, 사기 취급받을 수 있다
- 한·중·일 시민 1600명 도쿄에서 '대학살 자행 일본 사죄하라'
- 해군검사 "수사기록 사본 떠놔라, 무섭다" 조언... 외압 예상한듯
- "오직 일본에서만 일어난 한국인 대량 학살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