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5일에 한번꼴로 찾는다는 이것…수출액도 역대 최대[K-라면 60주년]
1980년대 ‘신라면’ 등 베스트셀러 대거 출시
올 상반기 수출액 4억 달러 넘기며 성장세
라면이나 짜장면은 장복을 하게 되면 인이 박인다. 그 안쓰러운 것들을 한동안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지 않아도 공연히 먹고 싶어진다. 인은 혓바닥이 아니라 정서 위에 찍힌 문양과도 같다. 세상은 짜장면처럼 어둡고 퀴퀴하거나, 라면처럼 부박하리라는 체념의 편안함이 마음의 깊은 곳을 쓰다듬는다. -김훈, 「라면을 끓이며」
소설가 김훈은 맛은 화학적 실체라기보다는 정서적 현상이라고 말했다. 이제는 먹을 것이 넘쳐나는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라면시장이 위축되지 않고 성장세를 이어가는 모습을 두고 그는 라면이 한국인의 정서적 토양의 기층에 착근되었기 때문이라고 평했다. 라면이 한국에서 생산되기 시작한 지 올해로 60년이 되었다. 이 땅에서 라면의 시작은 비록 지독한 식량난을 해소하기 위한 부박한 현실의 산물이었지만 60년이 지난 오늘 라면은 더 이상 안쓰러운 음식이 아닌, 한국의 식문화를 상징하는 'K-푸드'의 선봉으로 자리 잡았다.
1963년, 지독한 식량난 속에서 태어난 한국 최초의 라면
한국 라면의 시작은 196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서울 남대문시장에선 미군이 버린 음식을 끓인 ‘꿀꿀이죽’을 사 먹기 위해 매일 배고픈 노동자들이 장사진을 이뤘다. 식량난에 허덕이는 비참한 모습을 보고 삼양식품의 창업주 고(故) 전중윤 명예회장은 일본 유학 시절 맛보았던 라면을 떠올렸다. 전 명예회장은 그 길로 잘 나가던 보험회사 사장 자리를 내던지고 1961년 삼양식품을 창업했고, 일본 묘조식품으로부터 기계와 기술을 도입해 1963년 9월 15일 국내 최초의 라면 ‘삼양라면’을 탄생시켰다.
삼양라면은 중량 100g에 가격은 10원이었다. 당시 커피가 35원, 영화 55원, 담배 25원 수준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상당히 낮은 가격으로 책정된 셈이다. 하지만 라면이 처음 출시됐을 때 시장의 반응은 냉담했다. 오랫동안 이어온 쌀 중심의 식생활이 하루아침에 밀가루로 바뀌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전을 면치 못하던 라면이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기 시작한 건 1965년 정부가 식량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혼분식 장려 정책을 선보이면서부터다. 저렴한 가격에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이 주목을 받으며 라면은 본격적인 성장궤도에 올라서게 된다.
정부의 혼분식 장려 정책 이후 라면시장에 참여하는 기업들이 늘어나게 됐다. 1965년 농심의 전신인 롯데공업주식회사가 ‘롯데라면’을 출시하며 시장에 진출했고, 이외에도 ‘풍년라면’(풍년식품), ‘닭표라면’(신한제분), ‘해표라면’(동방유량) 등 8개 제품이 시장에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초기 라면시장은 삼양식품이 80%가 넘는 시장점유율을 기록하며 부동의 1위를 기록하고 있었고, 나머지 업체들은 고만고만한 경쟁을 벌이는 수준이었다. 이후 1960년대 말에 가서는 삼양식품과 농심만 살아남아 1980년대 라면시장의 황금기가 열리기 전까지 두 회사가 경쟁을 벌이는 구도가 이어졌다.
1980년대 라면시장의 황금기…전설의 시작
1980년대는 라면시장의 황금기로 불린다. 지금까지 매출 순위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제품 대부분이 이 시기에 출시됐다. 첫 테이프를 끊은 건 농심이었다. 농심은 1982년 해물우동 맛을 담은 ‘너구리’를 선보인 데 이어 ‘육개장 사발면’까지 출시하며 용기면 시장을 본격적으로 열었다. 이듬해에는 된장 베이스의 ‘안성탕면’, 1984년에는 ‘짜파게티’를 선보이며 20년 이상 이어진 삼양식품의 왕좌에 본격적으로 도전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팔도(당시 한국야쿠르트)가 1984년 ‘팔도비빔면’과 1986년 ‘도시락’을 각각 출시했고, 오뚜기도 1988년 ‘진라면’을 들고 참전하게 되면서 라면시장은 현재와 같은 구도를 형성하게 됐다.
1985년은 국내 라면사에 있어 첫 번째 왕권 교체가 일어난 해다. 1980년대 초중반 다수의 히트 제품을 선보이며 시장을 흔든 농심은 1985년 결국 라면시장 1위에 오른다. 시장 1위에 오른 농심은 선두 자리를 공고히 다질 수 있는 제품 개발에 나섰고, 얼큰한 국물을 즐기는 한국인의 식습관에 착안해 만들어진 제품이 바로 1986년 출시된 ‘신라면’이다. 신라면은 출시되자마자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며 순한 맛 위주였던 당시 라면시장이 매운맛 라면의 시대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신라면은 1991년 이후 현재까지 33년째 국내 라면시장 판매 1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국내 라면의 역사가 해를 더해가고 매년 수십 종의 신제품이 출시되면서 다양한 트렌드와 콘셉트의 제품들이 시장을 흔들고 또 사라졌다. 대표적인 것이 하얀 국물 라면 열풍이다. 2011년 라면 업체들은 삼양식품의 ‘나가사끼 짬뽕’을 시작으로 팔도와 오뚜기가 각각 ‘꼬꼬면’과 ‘기스면’을 출시하는 등 경쟁적으로 하얀 국물 라면을 선보였다. 당시 업계에선 매운맛 일색이던 시장에 소비자들의 숨어있던 욕구가 분출됐다며 매운맛 라면 시장의 위기론이 제기되기도 하고, 하얀 국물과 기존 빨간 국물로 시장이 양분될 것이라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2011년을 뜨겁게 달구던 하얀 국물 열풍은 이듬해부터 빠르게 시들해졌고, 지금은 소규모 카테고리로 축소돼 운영되고 있다.
하얀 국물 라면 열풍 이후 국내 라면시장에서 매운맛은 한국 라면 맛의 근간으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아가는 모습이다. 신라면이 수많은 제품의 도전 속에서도 30년 이상 국내 시장의 선두 자리를 지켜내며 전 세계 100여 개국으로 수출되는 글로벌 제품으로 성장하고, 2012년 출시된 삼양식품의 ‘불닭볶음면’이 온라인에서 매운 음식 먹기 챌린지라는 새로운 놀이문화의 중심에서 국내외 소비자의 주목을 받으며 수출 효자 품목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최근 한국 라면은 다시 한번 화끈한 매운맛에 집중하고 있다. 이달 들어 농심이 신라면의 매운맛을 강화한 ‘신라면 더 레드’를 출시한 것을 비롯해 주요 라면 업체들이 일제히 기존 제품의 매운맛 강화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장의 흐름 속에서 한국 라면 시장이 앞으로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지 귀추가 주목된다.
K-푸드 선봉에 선 라면
한국 라면시장이 양적·질적 성장을 거듭하면서 라면이 내수용 산업이란 말도 옛말이 됐다. 1969년 삼양식품이 베트남으로 첫 수출을 시작한 이후 라면 수출은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탄생 60주년을 맞은 올해 한국 라면은 상반기 역대 최대 수출액을 기록하며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1일 관세청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기준 라면 수출액은 4억4620만 달러(약 5900억원)로 집계됐다. 기존 최대치였던 지난해 상반기 수출액(3억8328만 달러)보다 16.4% 증가한 수치다. 상반기 라면 수출액은 2015년 이후 줄곧 늘었다. 2015년 상반기 1억383만 달러에서 2018년 상반기 2억1618만 달러로 상승했고, 2020년 상반기에는 3억207만 달러로 3억 달러선을 넘은 뒤 올해 상반기 처음으로 4억 달러마저 넘어섰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3만 달러를 훌쩍 넘었지만, 소비량도 여전하다. 세계라면협회(WINA)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인의 연간 라면 소비량이 전년 대비 4개 늘어난 77개로 조사됐다. 전체 소비량은 39억5000만개로 4.2%(1억6000만개) 늘었다. 그동안 한국의 라면 소비량은 연간 38억~39억개 수준이었다가 코로나19 발생 초기인 2020년 사회적 거리두기 영향으로 외식 활동이 제약을 받고 ‘집밥’ 수요가 늘면서 41억3000만개로 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2021년 코로나19 장기화로 밀키트와 배달 음식 등 대체 음식이 성장하면서 라면 소비는 37억9000만개로 감소했다. 지난해 다시 라면 소비가 회복되면서 한국인의 1인당 연간 라면 소비량은 77개까지 늘어났다. 남녀노소 4.8일마다 라면을 소비했다는 뜻이다.
구은모 기자 gooeunm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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