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학살 그때처럼…남아공에선 "좋은 외국인? 죽은 외국인" [간토대지진 학살 100년]
"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키고, 우물에 독을 탔다.” " 100년 전 간토대지진 당시 참상을 기록한 일본 정부 중앙방재회의 보고서(2008년)에선 이 같은 유언비어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하면서 조선인 학살의 배경이 됐다고 명시했다. 그런데 100년이 지난 현재도 세계 곳곳에서 유사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이른바 ‘제노포비아(Xenophobiaㆍ외국인 혐오)’에 기반한 혐오 범죄들이다.
스페인독감(1918~1920년) 이후 한 세기 만에 찾아온 코로나19 팬데믹(전 지구적 감염병 대유행)으로 북미와 유럽에서 국적과 무관하게 아시아계 사람들이 무차별 공격의 대상이 된 게 대표적이다. 일면식도 없던 사람으로부터 욕설과 폭언을 듣는 것은 예사, 길을 걷다가 갑자기 주먹이 날아오거나 얼굴에 침을 뱉는 등 과거 보기 힘든 혐오 범죄가 만연했다. 심지어 2021년 8월 미국 애틀랜타에서 총기 난사로 한인 여성 4명을 포함해 아시아계 6명 등 8명이 숨지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중국 우한(武漢)이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진원이라는 이유로 각종 괴담과 유언비어가 기승을 부린 결과였다. 아시아인을 향해 “더러운 생물 테러리스트”와 같은 모욕적인 발언이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일파만파 퍼져나가며 혐오가 혐오를 키우는 양상이었다. 프랑스에선 아시아계 시민들이 차별과 폭력을 멈춰달라며 ‘나는 바이러스가 아니다(#JeNeSuisPasUnVirus)’는 해시태그를 내건 온라인 캠페인을 벌일 정도였다.
아프리카인으로 불똥 튄 코로나19
당시 중국에서도 코로나19를 매개로 제노포비아가 횡행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코로나19를 퍼트린다”며 이들을 호텔과 식당에서 문전박대하거나 보건 당국이 감염자 접촉 여부와 상관없이 유전자증폭(PCR) 검사를 강요하는 일이 속출했다. “중국 광저우의 한 병원에 격리된 나이지리아 국적 감염자가 간호사를 때렸다”는 등 각종 괴소문이 위챗(중국판 카카오톡)과 같은 SNS를 통해 확산하면서 사태를 키웠다.
지난 5월 5일 세계보건기구(WHO)가 3년 4개월 만에 팬데믹 종식을 선언한 이후, 이런 분위기는 사그라든 상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한번 일어난 혐오 감정은 또 다른 계기가 생기면 언제든 다시 폭발할 수 있는 잠재된 시한폭탄”이라는 경고한다.
100년 전 일본과 유사한 남아공
인종차별의 피해자가 또 다른 차별을 하는 상황도 빚어진다. 1994년 이전 흑백 차별이 극심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선 다른 국가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폭력 사태가 끊이질 않고 있다. 나이지리아, 인도 등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을 실업률과 범죄율을 끌어올리는 원흉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대놓고 ‘강간범’ ‘마약팔이’로 내몰기 일쑤고, 현지식 비하어인 ‘마꿰레꿰레(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쓰는 사람)’ ‘아마제제(거머리)’ 등을 쓰며 경멸한다. 지도층 인사가 “좋은 외국인은 죽은 외국인”이라며 혐오를 조장하는 일도 생겼다.
급기야 2008년 남아공 최대 도시인 요하네스버그 인근에서는 남아공 노동자와 다른 아프리카 국가 출신 노동자 간 대규모 폭력 사태가 일어나 60여명이 숨지고, 수천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2018년 3월부터 1년 1개월간 살해당한 외국인 트럭 운전사만 200여명에 이른다는 보고도 있다.
장용규 한국외대 아프리카학부 교수는 지난해 6월 발표한 논문에서 “남아공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노동자를 흡수하는 거대 시장”이라며 “남아공인들은 자신들이 처한 사회-경제적 어려움을 이주 노동자 탓으로 돌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이주 노동자에 대한 폭력 및 추방 운동은) 자경단이 기획, 행동에 옮기고 정부와 정치권이 이를 묵인하거나 후원하는 프로젝트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사실상 간토대지진 당시 일본에서 자경단을 중심으로 자행된 조선인 학살의 폭력 구조와 흡사하다는 의미다.
지구온난화가 키운 '제노포비아'
100년 전 간토대지진처럼 대규모 재해가 문제되는 사례도 적지 않다. 특히 최근엔 지구온난화 등의 영향으로 빚어진 재해를 계기로 외국인 혐오 등이 심각해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인도 북동부 방글라데시와 부탄 사이의 아삼 지역엔 100여년 전부터 무슬림들이 거주하고 있다. 인도 정부는 이들을 불법 이주민으로 간주한다. 힌두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나렌드라 모디 정권은 이들을 추방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2019년 12월 시민법을 개정했다. 1971년 방글라데시가 독립하기 이전부터 이 지역에 살았던 무슬림에게만 거주권을 부여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그런데 법 시행을 앞두고 같은 해 몬순 기간(통상 6~9월) 아삼 지역에 홍수로 이재민 20만명이 발생했다. 물난리로 조상 대대로 살았음을 증명할 문서 등을 잃어버린 무슬림 가족이 많았다. 결국 인도 정부가 20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주민 등록에서 배제한 결과, 이들은 불법 이민자로 전락했다. 당시 쫓겨난 무슬림을 변호하던 아만 와두드 변호사는 법정에서 “이들은 가난하고, 문맹이며,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다른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불법 이민자라는 혐의를 받고 있다”고 항변했다.
2019년 9월 초강력 허리케인 ‘도리안’이 바하마를 덮쳤을 때도 유사한 사태가 벌어졌다. 2010년 대지진으로 이주해온 아이티 출신 이주자들이 바하마 정부의 강요로 집단 수용시설로 보내졌다. 이들 역시 신분을 증명할 서류 등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현지 비영리 단체인 휴먼라이츠 바하마 등에 따르면 당시 이 시설에서는 강간·구타 등 폭력이 난무했다. 뉴요커는 당시 사태를 다룬 기사에서 “바하마에서 반이민 정서가 고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허리케인 도리안이 강타했다”며 “바하마 정부는 이주민들이 안전할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허리케인 이후 3개월 동안 1000명 이상의 아이티인을 추방했다”고 전했다.
'난민 포비아' 일었던 한국
한국에서도 2018년 5월 무비자로 제주도에 입국한 예멘인 500여명이 난민 신청을 하면서 ‘난민 포비아’가 일기도 했다. 당시 “난민으로 위장한 테러리스트가 있을 수 있다”는 등의 글들이 온라인을 달궜다. 특히 예멘 남성들을 겨냥해 “여성을 혐오하고 강간을 일삼을 것”이란 비방이 쏟아졌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난민법을 폐지해달라’는 청원이 올라왔고, 여기에 71만명이 동의했다. 제주시 홈페이지는 관련 민원으로 도배되다시피 했고, 박상기 당시 법무장관은 직권남용 혐의로 고발됐다.
유엔난민기구(UNHCR)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2020년 12월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난민 수용에 대한 ‘찬성’ 응답은 33%, ‘반대’ 응답은 53%로 나타났다. 2018년 예멘 난민 사태 당시(찬성 24%, 반대 56%)보다는 소폭 개선됐으나, 여전히 난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강한 편이다. 이 조사 결과와 관련, UNHCR 측은 “반대 이유의 상위순위에 난민에 대한 오해와 가짜뉴스의 영향이 여전한 것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이런 현상은 정부가 주도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인류학자인 장정아 인천대 중국ㆍ화교문화연구소장은 “어느 국가건 자신이 관여된 역사적 사실에 대해 인정하고 직시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정부가 해결할 거라고 기다려서 될 일이 아니다. 여러 나라 민간이 끊임없이 만나고 교류하면서 공동의 인식과 공감대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상진 기자 kine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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