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골라서 약 처방 받는다"…어느새 난 마약에 중독 됐다

남수현, 채혜선 2023. 9. 1.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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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용 마약류 오남용 문제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사진은 미국의 거대 제약회사가 마약성 진통제(옥시콘틴)를 출시하며 중독성을 의도적으로 축소 판매해 중독 사태를 초래한 사건을 다룬 미국 드라마 '돕식'(2021)의 한 장면. 사진 예고편 캡처


“주위에선 다 제가 중독자인 걸 알게 됐는데, 저만 인식을 못 했어요. ‘의사 선생님이 지어준 약인데 왜 약물 중독이라고 하냐’면서 나는 중독자가 아니라고 부인했죠.”

5년여간 병원에서 처방받은 수면제(항불안제)에 중독됐던 박모(50)씨의 말이다. 약을 끊은지 3년 차에 접어든 박씨는 현재 마약 중독재활센터에서 상담사로 일할 정도로 회복됐다. 하지만 약물에 중독됐을 땐 몽롱한 상태로 운전하다가 교통사고를 내는 등 정상적인 일상생활이 불가능했다.

박씨가 의료용 마약을 접한 건,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면제를 처방받기 시작하면서다. 의사의 처방을 통해 원하는 만큼 약을 구하는 것도 전혀 어렵지 않았다. 박씨는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내가 먹는 약이 (의료용 마약류로 분류되는) 향정신성의약품인 줄도 모른 채 나중엔 ‘약을 잃어버렸다’고 거짓말하는 방식으로 양을 늘려갔다”며 “환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마치 본인이 의사가 된 듯 약을 골라 처방받거나 구하기 너무나 쉬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대마초·코카인·필로폰 등의 마약뿐 아니라 병원에서 처방받을 수 있는 의료용 마약 오남용 문제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지난해 의료용 마약류를 처방받은 환자는 1946만 명이다. 전년 대비 62만명(3.3%) 증가했는데, 관련 통계 수집을 시작한 2018년 이후 최다로 나타났다. 건강검진이나 치료를 목적으로 수면마취 주사제나 마약성 진통제 등의 수요가 늘어난 것도 있지만, 의료용 마약 중독 역시 증가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이범진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는 “‘의료 쇼핑’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처방이 늘고 있다. 통계에 안잡히고 숨어있는 사람도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마약류는 ①마약, ②향정신성의약품(향정), ③대마 등 크게 3가지로 분류된다. 진통·마취·식욕억제·항우울 등 각종 효능에 따라 식약처의 허가를 받은 의료용 마약류 품목은 지난해 기준 523개(마약 211개, 향정 312개)에 달한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올 상반기 마약류 사범 1만252명 중 7407명(72%)이 향정 관련 사범이었다. 향정 단속 건수는 전년 동기 대비 28.5%(4524건→5812건) 증가했다. 검찰 관계자는 “향정 사범이 늘었다는 건 의료용 마약류 오남용이 심각해지고 있다는 경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오남용이 많을 것으로 추정되는 의료용 마약류는 옥시콘틴·펜타닐 등 진통 효과가 있는 마약과 프로포폴·졸피뎀 등 진정에 사용되는 향정신성의약품이 꼽힌다. 최근 서울 강남구 압구정역 인근에서 약물에 취한 채 롤스로이스 차량을 몰다가 행인을 치어 중상을 입힌 혐의를 받는 피의자 신모(28)씨는 케타민 등 의료용 마약류로 분류되는 향정 7종의 투약 사실이 검사로 확인되기도 했다. 그는 경찰에서 "치료목적으로 처방받았다"고 주장했다.

신재민 기자
지난 24일 서울 영등포구 마약퇴치운동본부 중독재활센터에서 박영덕 센터장이 한 단약자와 상담하고 있다. 남수현 기자


실제로 의료용 마약류에 중독된 상당수가 '치료용'이었다고 주장한다. “나는 아프니까 의사가 처방해준 약을 먹는 것”이라며 치료나 재활 노력을 거부하는 경향도 강하다. 박영덕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중독재활센터장은 “‘아프다’고만 하면 약을 다 주니 중독된 사람에게 의사는 약을 받아내기 위한 수단”이라며 “최근 자기도 모르게 약에 중독된 사람을 보면 대체로 의료용 마약에 빠진 이들이었다”고 전했다.

20대 후반 김모씨도 처음엔 만성두통 해결을 위해 의료용 마약류를 처방받았다가 4년간 중독의 늪에 빠져있었다. 인터넷에서 두통약을 검색하던 중 암 환자에게 쓰이는 진통제를 알게 됐고, 다니던 병원에 문의하니 바로 처방받을 수 있었던 게 시작이었다. 지난 24일 서울 영등포구 마약퇴치운동본부 중독재활센터에서 만난 김씨는 “두통이 해결되고 난 뒤에도 그 약이 주는 편안함과 쾌락을 얻기 위해 병원을 하루 최대 세 군데까지 다니며 약을 받았다”며 “기숙사 같은 방을 쓰던 110㎏에 달하는 친구가 두들겨 깨워도 일어나지 못할 때가 많을 정도로 약에 취해 지냈다"고 고백했다. 진통제를 끊은 후에도 또 다른 약을 찾아 해매기도 했다. 김씨는 “또 다른 정신질환 치료제가 각성 효과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질환인 척 검사를 받고 약을 처방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해국 가톨릭대 의정부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최근 중복 처방이나 재유통 사례가 뚜렷한 프로포폴이나 펜터민 등의 마약류는 명백하게 불법인 경우를 찾아내는 게 그리 어렵지 않지만, 그 외 약품은 정상 처방인지 오남용인인지를 구분하기 상당히 어렵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의사가 약물 처방 시 중독 위험성을 평가하고 따져보게 하려면 이런 과정에 수가를 부여하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수현·채혜선 기자 nam.soohyo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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