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빨리보다 제대로
제대로 문제를 해결했을 때 의미를 가진다
인생 최초의 대회는 주산경시대회였다. 저학년부 참가자였던 나는 커다란 체육관에 열 맞춰 늘어선 책상들을 보자마자 긴장했다. 큰 호각소리와 함께 시험이 시작됐다. 문제를 다 풀면 책상 위 고깔을 높이 들어야 한다. 그럼 줄마다 배정된 담당자가 내 시간을 기록한다. 이후에는 열중쉬어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내가 제일 빨랐나?’ 잠시 두근거렸지만 나처럼 두리번거리는 애와 눈이 마주쳤다. 1, 2초 간격으로 연달아 고깔이 올라왔다. ‘더 빨리 풀어야 해.’ 조급함이 가슴을 조여 왔다.
승산, 제산, 가감산 순서로 시험이 진행됐는데 나는 가감산에서 드디어 제일 먼저 고깔을 들었다. 의기양양하게 아직 문제를 푸는 참가자들을 구경했다. 누군가 곧 두 번째로 고깔을 들었고, 저 애가 승산과 제산에서 나보다 먼저 고깔을 들었을까 궁금했다. 누구도 1등하라고 한 적이 없는데 시험장의 분위기 때문인지 승부욕이 발동했다. 결과는 시험이 끝나고 현장에서 곧 발표됐다. 나는 승산과 제산에서 1등, 그리고 가감산에서는 순위 안에도 들지 못했다.
열 살 무렵의 경험은 나에게 커다란 메시지를 남겼다. 물론 그때는 가감산에서의 실패가 부끄러워 교훈까지 곱씹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무언가를 잘하고 싶을 때 중요한 것은 속도보다 정확함이다. 고깔을 1등으로 들지는 못했지만 승산과 제산 문제들은 제대로 풀었고, 가감산은 가장 빨리 풀었지만 오답이 있었다. 정답과 숫자 하나의 차이라 할지라도 틀린 것은 틀린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속도는 일단 제대로 문제를 해결했을 때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빨리’를 외친다. 무리한 공사 일정에 쫓겨 기초공사를 소홀히 하고, 음식이 조금만 늦게 나와도 재촉을 하고,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뀔 것을 알면서도 기어이 액셀을 밟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압축성장의 근간이 된 ‘빨리빨리’는 근면과 효율을 넘어 부실과 불신이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외형을 키우느라 내면이 쪼그라들고 번아웃이 오기도 했다. 나도 성격이 꽤나 급한 편이다. ‘빨리’가 ‘오답’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최근 큰 행사를 앞두고 일이 바빠지면서 나도 모르게 ‘빨리’가 입에 붙었다. 이럴 때 꼭 실수를 하거나 뭔가 제대로 되지 않아 ‘다시’ 하게 되는 일들이 발생한다. 특히 신입 팀원과 일할 때 급하다고 설명을 충분히 해주지 않으면 틀린 것을 바로잡는 데 더 많은 시간이 들기도 한다. 어떤 일을 왜 하는지, 누구를 위해서 하는지 모르면 규칙을 지키는 것도 자율성을 발휘하는 것도 어렵다. 한마디로 ‘뭣이 중헌디’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회사 인스타그램을 운영하는데도 지향점이 필요하다. 마음이 급하면 팔로어 숫자에만 연연하게 된다. 회의시간엔 인플루언서를 통해 광고를 하자는 아이디어도 나온다. 그것도 물론 언젠가 필요할 수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원하는 타깃 고객에게 우리가 설정한 방향으로 우리를 소개하는 것이다. 초기에 이런저런 가벼운 이벤트로 일시적 팔로어를 늘리는 것은 결국 고객과의 관계나 매출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신진 예술가들이 계속 작업할 수 있도록 새로운 컬렉터를 발굴하고 작품을 판매하는 일을 한다. 그 일을 제대로 잘하고 싶다. 지출되는 운영비와 인력을 생각하면 ‘빨리’의 마음이 튀어나와 어떻게든 지금 한 점이라도 더 팔아야 한다. 하지만 올해의 매출만큼 내년과 후년의 성장도 생각한다. 실력과 신뢰가 중요하기에 ‘제대로’의 결심을 한다. 작품 구입이 즐겁고 유익한 경험으로 남길 바라며 고객이 좋은 선택을 하도록 돕는다. 그래야 우리가 예술가와 함께 오래 성장하는 회사가 될 테니 말이다.
물론 나는 아직도 ‘빨리’에 대한 욕심을 온전히 떨쳐버리지 못하고 팀원들에게 ‘정확하게 빨리 부탁해요’ ‘차분하게 신속하게 해주세요’ 같은 난도 높은 주문을 하고 있다. 하지만 제대로 해내고 싶다.
정지연 에이컴퍼니 대표·아트디렉터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1등석 예약했는데 이코노미라니”…혜리, 美항공사에 당했다
- 7년전 신생아 딸 텃밭 암매장한 母…아들 앞에서 범행
- 이부진 만난 장미란 차관 “한국방문의 해 위해 노력”
- [속보] 尹, 10월2일 임시공휴일로…‘추석 6일 연휴’
- [영상] “브레이크 안밟혀!” 베테랑 기사, 버스 들이받아
- “무인텔서 자는데 누가 껴안아…살려고 자는척” 잡고보니
- 8월의 마지막, ‘슈퍼 블루문’ 뜬다…저녁 7시 29분부터
- ‘흉기위협·폭행’ 정창욱 셰프 “실형은 부당, 봉사하겠다” 호소
- [단독] ‘文정부 대표 정책’ 청년내일채움공제 예산 4206억 삭감
- 홍준표와 ‘대구 치맥’한 이준석 “오늘은 이념보다 치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