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품고 미래를 열어가는, 베를린 속으로
장남주 지음
푸른역사, 1권 368·2권 364쪽, 각권 2만2000원
“베를린이라는 도시의 매력은 비단 문화의 다양성과 독일 수도로서의 면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난 세기가 걸어온 그 격동의 발자취를 길의 곳곳에 수많은 흔적으로, 때론 공공역사로 드러내고 있는 데 있다.”
독일에서 20년 넘게 살면서 저술 작업을 하고 있는 장남주는 베를린을 ‘기억하는 도시’로 정의한다. 베를린에는 1만200여개의 기념물이 등록되어 있다고 한다. 통독 이후 만들어진 것이 많다. 독일은 이미 2000년대 초반에 과거사 정리의 ‘세계 챔피언’이라고 불렸다. 독일의 반성과 노력이 유럽 통합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그래도 베를린에선 오늘도 누군가를 기억하고 누군가를 기리는 기념물이 들어서고 있다.
“어떤 기념비든 기억과 역사를 담고 있고, 논쟁의 가치를 갖고 있다. 때론 그 논쟁 자체가 또 다른 기념비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기념비의 도시 베를린은 곧 기억문화를 둘러싼 논쟁의 도시다. 흔히 얘기하듯 ‘역사적 진실을 위한 투쟁’의 현장인 셈이다.”
장남주가 쓴 ‘베를린이 역사를 기억하는 법’은 베를린 시내의 주요 기념물과 공간들을 돌아보며 독일의 ‘기억문화’를 조명하는 책이다.
베를린 시내 중심부에 설치된 조형물 ‘버려진 방’은 탁자와 의자 두 개로 구성돼 있다. 의자 하나는 넘어져 있어 뭔가 파국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이 조형물은 강제수용소나 아우슈비츠로 끌려갈 때의 급박하고 불안했던 유대인들의 삶을 은유한 것이다. ‘버려진 방’ 옆 건물에는 “망각은 추방이지만 기억은 대속이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동판이 설치돼 있다. 기억함을 통해 대신 속죄한다는 의미로 독일의 기억문화에서 자주 인용되는 문구다.
1991년 동베를린의 레닌 광장에 세워진 19m 높이의 석상에서 레닌 두상이 철거되는 모습은 동독의 마지막을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이 때 철거된 레닌 두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레닌 석상 조각들은 동베를린 외곽 숲 자갈밭에 매장됐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2015년 9월 레닌 두상은 슈판다우 치타델레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레닌 두상이 박물관 앞에 도착하자 베를린시 관계자는 “웰컴 레닌”이라고 외쳤다. 저자는 이 이야기를 전하며 “레닌 두상의 ‘귀환’과 함께 최소한 독일에서는 기념물을 파괴해 없애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선언되었다”라고 썼다.
베를린이 기억하는 도시가 된 과정, 독일에서 기억문화가 만들어진 과정은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전쟁”이었다. 동독 건축의 대표작인 동베를린의 공화국궁전을 완전히 철거한다는 2003년 연방하원의 결정은 독일 사상 최대의 논란이라고 할 정도로 격렬한 논란을 불렀다. 무엇보다 동독 출신들에겐 슬픔과 충격이었다. 전체 독일 국민의 3분의 2가 보존을 원했지만 철거는 강행됐다.
이 자리에는 공화궁궁전 이전에 있었던 프로이센의 왕궁인 베를린성이 복원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반대와 논란을 거치며 정면에서 보면 복원한 게 맞는데 측면에서 보면 아닌, 외형은 비슷해 보이는데 내부는 아닌, 절충적인 건축물이 들어섰다. 이것이 현재의 훔볼트포럼 박물관이다. 훔볼트포럼은 논쟁 속에서 과거 프로이센의 영광을 재현하는 곳이 아니라 독일의 식민주의 과거를 성찰하는 장소로 변모했다.
“지우고 싶고 잊고 싶은 과거, 그걸 굳이 들추어내 기억하게 하는 현재의 갈등은 이제 베를린에선 미래를 위한 기억으로, 민주주의를 위한 망각의 거부로 어렵사리 매듭지어졌다.” 그렇게 베를린은 과거를 기억하면서 미래로 가는 길을 찾아냈다.
책은 두 권으로 구성됐다. 1권은 나치 과거사에 대한 반성의 자리를 위주로 둘러본다. 아우슈비츠행 기차에 태워졌던 유대인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그루네발트역에서 시작해 희생된 작가들과 여성들을 위한 기념물들을 살펴본다. 또 좌파 여성 사상가이자 혁명가인 로자 룩셈부르크, 나치 시대에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외친 여성 미술가 케터 콜비츠 등이 사후에 복권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2권은 동서 분단과 냉전의 과거를 성찰하고 통합을 모색하는 장소들을 소개한다. 통독 이후 동독의 유산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베를린장벽의 기억을 어떻게 보존하는지, 서독의 68운동과 동독의 89평화혁명 등 학생운동을 탄압했던 과거를 어떻게 반성하는지 등을 보여준다. 2권에서 다루는 냉전 시대에 대한 독일의 반성 노력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독일의 과거사 정리를 소개하는 책들은 있지만 이렇게 생생하면서도 넓게 깊게 정리한 책은 찾기 어렵다.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한국은 어떤가 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여전히 역사가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어 과거를 외면하거나 망각하지 않으면서 미래로 가는 방향을 모르고 있다.
최근 불거진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논란을 보면서 저자가 소개한 ‘억압적 망각’에 대해서도 주목하게 된다. 기억문화 이론의 대가 알라이다 아스만이 망각을 7가지 형태로 분류한 것에 따르면, 권력투쟁이나 정치권력의 급격한 변동과정에서 나타나는 ‘징벌적, 억업적 망각’이 있다. 권력 장악과 정당화를 위해 전략적으로 이전의 집단기억과 문화적 기억을 삭제하고 파괴하는 행위를 말한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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