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군법회의, 사형 선고할 근거가 없는 불법이었다
[제주다크투어]
2023년 8월 29일 오후 2시 30분, 제주지방법원 제201호 법정에서는 제37차 군사재판 직권재심 재판(사건번호 2023재고합30)이 열렸다. 이날 재판은 군법회의 수형인 4·3 피해자 중에 '사형' 또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제주비행장에서 사형이 집행되거나, 한국전쟁 등으로 행방불명이 되었던 분들이 대상이었다.
1948년과 1949년에 진행했던 군법회의의 처벌 수위가 사형부터 징역1년까지 다양하게 있었다. 전부 실형선고를 받았고 무죄선고는 없었다. 2000년에 「4·3특별법」이 제정되고 희생자 신고를 받았고, 2002년에 최초의 희생자 인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군법회의 희생자는 희생자 인정이 미뤄졌다. 단순 행방불명 희생자만 희생자로 인정하다가 2005년에 처음으로 국무총리 산하 4·3중앙위원회(이하, '중앙위'로 표기)에서 심사하게 된다. 중앙위에는 국무총리, 각 관련 부처 장관들, 여러 민간위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2005년에도 군법회의 수형인 명부에 기재된 희생자가 논란이 되었다. 당시 법무부, 국방부 장관은 수형인의 희생자 인정에 반대했었다. 그러나 격론 끝에 군법회의 자체가 잘 못되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고문 수사, 불법 구속영장, 불법 구금, 등 수사 절차와 기소 절차 모두 잘못되었다. 범죄 사실을 피고인이 알아야 하는데, 기소장에 송달하지도 않았다. 공소사실이 특정되지 않았고, 판결문도 없다. 공소장도 확인되지 않는다.
판결 절차도 잘못되었다. 재판을 하면 이렇게 재판을 열고 판사 또는 판사 역할의 군인이 있어야 하고, 변론을 거쳐야 하고, 재판정에서 몇 년이 구형이 되었는지 알려줘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수형인 피해자는 형무소로 가서야 형량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재판, 수사, 기소 전 과정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4·3진상조사보고서」에도 군법회의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밝혀져 있다. 이런 점이 있기 때문에 2005년에 중앙위에서도 군법회의 수형인을 희생자로 선정되는 것이 맞다고 결정되었다. 하지만 2005년에도 '사형',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수형인의 희생자 인정은 미뤄왔다. 이 사람들은 정말로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니냐 논리에 의해서 연기되었다. 그러나 2007년 다시 중앙위 회의에 안건으로 오른다. 그때도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그때도 군사재판 자체가 잘 못되었다는 평가가 나왔고, 희생자 결정이 다시 이루어졌다. 형량은 다르지만 법률적으로는 차이가 없다. 죄의 크기로 정한 것이 거의 없다. 군법회의가 진행되었던 15일 상간에 무자기로 불러 재판이 이루어졌다. 죄질에 따라 피고인을 선별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불가능한 상태였다. 사형을 선고받았다고 해서 죄가 더 무겁다 할 근거가 없다.
▲ 군법회의 수형인 명부 |
ⓒ 제주4·3평화재단 |
"형량이 다르지만 법률적으로는 차이가 없다. 죄의 크기로 정한 것이 거의 없다. (중략) 죄질에 따라 피고인을 선별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불가능한 상태였다. 사형을 선고받았다고 해서 죄가 더 무겁다 할 근거가 없다."
위 대목은 1948년 말과 1949년 초에 진행된 군사재판이 얼마나 엉터리였고, 불법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이 발언이 끝난 뒤 법정엔 어느 때보다 깊은 침묵이 흘렀다. 이번 재판을 변호한 반희성 변호사도 이날 최종 변론을 통해 소감을 남겼다. 육지 출신인 그는 4·3을 폭력사태로만 기억하고 있다가 성인이 된 후에는 잊고 살았다고 했다. 그러다 이날 피해자 유족으로 참석한 강병삼 변호사를 통해 4·3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알게되었고, 이번 재판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망인이 된 피고인 30인이 어떻게 끌려가 억울하게 범법자가 되어야 했는지 밝혔다.
망 이사만은 애월읍 하가리 출신의 22세 청년으로 가을 추수 후 타작을 하던 중에 군인에게 연행된 후 가족과 소식이 끊겼다. 그는 1948년 내란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1948년 12월 27일 화북리 부근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후 유족들이 유해를 수습하여 묘에 안장되었다.
그의 손자 이00은 무죄 선고를 앞두고 "재작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생전에 아버지께서는 할아버지가 군인에게 잡혀갈 때 옆에 있었다고 저에게 몇 번이나 얘기를 해주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한 평생 가졌던 한과 억울하게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한이 풀렸으면 좋겠다. 오늘 무죄선고로 기쁨의 날이 될 수 있도록 해달라"라고 증언했다.
망 황도길은 당시 32세로 이동일동에서 상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방화범이라는 거짓신고로 1948년 사형선고를 받고 1949년 2월 27일 화북리에서 총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조카 황00은 "망인이 억울하게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얘기만 들었었다. 그러나 당시에 나는 한두살이어서 잘 몰랐다. 희생자로 신고할 때도 많이 망설였다. 혹여 빨갱이 자식이라고 손가락질 받을 것이 두려웠다. 오늘까지 망인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번 재심과정에서 망인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게 되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망 고문종은 제주읍 이호리 출신으로 26세 청년이었다. 그는 1949년 4월 경 경찰에 체포되어 가족과 소식이 두절되었다. 이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로 보내졌다가 광주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그러나 1950년 7월 경 사형집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아들 고00은 "아버님이 어떻게 해서 돌아가셨는지 전혀 몰랐다. 단지 어렸을 때 숨어 지내다가 당했다는 말만 들었고, 이렇게 돌아가신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오늘 자세히 알게 되었다. 밝혀져야 할 것들은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증언을 마쳤다.
망 김주현은 제주읍 노형리 태생으로 당시 20세였다. 그는 1948년 4월 경까지 일본에 거주하다 할머니 장례로 제주로 입도하여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잡혀들어가 마포형무소로 이감되었다가 수감 중에 행방불명되었다. 그의 조카 김00은 "아버님이 이 자리에 참석해야 했는데, 건강문제도 그렇고, 4·3을 돌아보는 자체를 거부하는 마음이 많지 않았나 싶다. 망인의 막냇동생으로서 지금까지 사회적으로 억압 받았던 그런 불편한 마음이 지금도 있는 것 같다. 이 시간 이후로 아버님께 가서 재판 과정을 상세히 설명을 드리고, 지금까지 가슴 속 깊이 억압된 아니면 무서웠던 심정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잘 설명드리겠다"라고 밝혔다.
망 강재현은 애월면 상귀리에 살던 21세 청년으로 소개령 이후 산에 숨었다가 지서로 가면 사면해준다는 얘기를 듣고 지서로 간 후 연락이 두절되었다. 이후 그는 1949년 7월경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한국전쟁 중에 행방불명되었다. 그의 조카 강00은 지난해 직권재심 재판의 변호인이기도 했었다. 그는 "아버지가 10년 전에 돌아가셨다.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을때 아버지께서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소송을 해야한다고 하셨다. 과거 국선 변호사 시절 제주4·3 직권 재심 변론을 맡았다. 당시 법리적인 어려움보다는 사연과 기록을 읽는 것이 제일 힘들었다. 그래서 검사님들이 기록을 읽을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플지 잘 안다. 힘든 일 해주신 것에 감사드린다. 올해는 제사 때 무죄판결문을 올리도록 하겠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망 이일진은 대정읍 하모리 출신의 24세 청년이었다. 1948년 11월 21일 경찰과 군인이 마을을 급습하여 포박된 이후 소식이 두절되었다. 그는 이후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마포형무소에 수감 되었다가 한국전쟁 와중에 풀려나 행방불명되었다. 그의 동생 이00은 "4·3이라는 비극이 다시는 오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힘을 써야 한다. 4·3이 제주도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많이 알려지고 있다. 나는 부산에 살고 있는데, 얼마 전에 '순이삼촌' 창작 오페라를 관람했다. 이렇게 4·3은 알려지고 있고, 각 지역마다 4·3을 추모하고 있다. 4·3이 영원히 잊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을 밝혔다.
망 오옥춘은 성산면 가시리 출신의 20세 청년으로 산으로 피신했다가 주정공장에 간 이후로 소식이 두절되었다. 그는 이후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실제 사형이 집행되었는지는 자료가 불충분한 상태이다. 그의 조카 오00은 "4·3 당시 나는 어렸다. 들은 바로는 주정공장에 가면 살려준다고 해서 망인이 가셨고 몇 일 있으면 나갈 것이라고 했는데, 나오지 않았다. 몇 개월 지나고 아버지는 마포형무소로 갔고, 망인은 관덕정 경찰서로 갔다고 했는데 모두 정뜨르비행장에 가서 희생되었다. 4·3에 대해서는 억울한 마음이 한도 끝도 없다. 4·3때 큰아버지, 셋아버지, 아버지, 할머니까지 모두 희생되었다. 이후 공부도 못하고, 뭐든 할 수도 없었다. 왜 부모의 잘못으로 부모만 죽여불면 되지, 자식마저 고생시켰는지 억울한 마음이 크다"라며 증언을 마쳤다.
▲ 제37차 직권재심 재판 공판안내 (1) |
ⓒ 제주다크투어 |
▲ 제37차 직권재심 재판 공판안내 (2) |
ⓒ 제주다크투어 |
강 부장판사는 피고인 30인에 대해 무죄선고를 하였다. 이어서 "피고인뿐 아니라 피고인에 대해 희생자 신고를 하신분들도 거의 돌아가셨다"며, "그분들이 살아계셨을 때 무죄선고를 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지 생각한다"라며 안타까운 심정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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