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찬의 인프라] 전국 소기업 중대법 비상 “뿌리산업 폐업 잇따를 것”

김기찬 2023. 8. 31.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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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소규모 기업은 오너가 대부분 대표를 맡고 있다. 대기업과 달리 오너가 영업과 생산 등 세세한 것까지 처리한다. 이런 상황에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대법)이 적용돼 대표가 구속되면 기업 운영이 중단되고, 폐업으로 이어질 것이다.”(서울 소재 금속 금형·가공 회사 대표)

“영세 소기업은 사업주가 모든 것을 끌고 간다. 예측하지 못한 사고로 사업주가 처벌받으면 사실상 기업이 생존할 수 없는 처지에 몰린다. 직원들도 실직한다. 중대법의 소규모 사업장 확대 적용은 기업 내 모든 구성원의 생계와 직결되는 문제다.”(경기도 광주 소재 석재 회사 대표)

「 5~50인 미만 영세한 사업장도
내년 1월부터 중대재해법 적용
전국 82만개…정부 지원 역부족
“유예기간 늘려 준비토록 해야”

종업원 50인 미만 영세 사업장이 떨고 있다. 산업 생태계의 토대를 지탱하고 있는 뿌리기업이 대부분이다. 이들이 외국의 무역 공격에 맞서 꿋꿋하게 버텨줬기에 산업 생태계가 견고할 수 있었다. 한데 이 업체들이 중대법에 갈팡질팡하고 있다. 중대법은 제정(2021년 1월 27일) 당시 50인 미만 기업에 대해 공포 후 3년이 경과한 날(2024년 1월 27일)부터 시행하기로 유예했다. 앞으로 5개월 뒤에 적용된다는 얘기다.

경기도 화성 소재 유압기기 제조업체(직원 28명) 대표는 “산업안전법으로 중대재해 발생 사업장의 경영책임자를 규율할 수 있지 않은가. 중대법까지 적용해 처벌하려는 것은 실형 가능성만 증가시키는 이중규제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올해 들어 6월 말 현재 산업안전법 위반으로 기소된 20명 중 19명이 중소업체 경영책임자다. 이러다 보니 “중대법 시행에 대비하며 준비해야 했지만, 사람도 돈도 빠듯한 소기업이 이중 규제에 대비하기엔 너무 벅찬 상황”(반월표면처리협동조합 관계자)이라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한 번만 지원해도 2년 이상 걸려”

정부가 지원에 나섰지만 역부족이다. 5인 이상 50인 미만 사업장은 전국에 약 82만여 개다. 중대법이 공포된 뒤 정부가 산업안전보건체계 구축을 위한 컨설팅이나 기술지도, 교육 등 지원에 나섰지만, “올해까지 한 차례라도 이런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업체는 40만 개소에 그칠 것”이라는 게 고용부 추산이다. 고용부 관계자는 “모든 영세업체에 최소한 한 번이라도 지원을 해주려면 2년 이상의 시간은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중대법이 50인 미만에 적용되기 시작하면 오너 범법자가 양산되고, 뿌리산업에서 폐업이 줄을 이을 수 있다”(중소기업중앙회 관계자)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고용노동부가 한국안전학회에 연구를 의뢰한 결과 중대법상 필요한 사항을 갖추지 못한 기업이 78%에 달했다. 이대로면 뿌리기업 10곳 중 8곳은 오너 부재에 따른 소멸 위기에 직면한다는 뜻이다.

신재민 기자

정부도 비상이다. 중대법은 기업의 안전보건관리체계 전반에 대한 광범위한 수사가 필요하고, 그만큼 수사 난이도가 높다. 지난해 송치 사건의 참고인·피의자 조사는 평균 18회, 최대 44회에 달했다. 수사기록물도 평균 2833쪽(최대 1만4000여쪽)이다. 이런 형편에 50인 미만 업체로 법 적용이 확대되면 수사물량은 2.4배가량 증가할 것으로 예측됐다. 고용부 인원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영세업체들은 “몇 년만이라도 유예기간을 더 달라”고 호소한다. 중기중앙회 조사 결과 최소 1년에서 4년 유예(67.7%)를 바랐다. 경기도 파주 소재(근로자 19명) 플라스틱 제조업체 사장은 “당장 몇 개월 뒤면 법이 적용되는데, 우리 같은 소기업은 산업안전법은 알아도 중대법에 대해선 뭘 해야 하는지 내용 자체를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한국안전학회 연구 결과 영세기업은 인력부족(36%), 의무항목 과다(27%), 요구수준 과도(25%) 등의 이유로 중대법의 의무를 준수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유예 뒤 원하청 상생으로 풀어야

신재민 기자

영세한 뿌리기업에 처벌 위주의 중대법을 들이대 제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 경영계는 물론 주류 학계의 진단이다. 설비에 막대한 돈을 투자할 여력이 없는 데다 안전 인력을 새로 뽑아 배치할 형편도 안 된다. 그렇다고 정부 지원으로 풀어가는 방식도 세금 사용의 형평성 논란이 일 수 있고, 무한정 돈을 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 경제 생태계 차원에서 풀 수밖에 없다. 영세기업이 중대법에 따른 의무를 이행할 요건을 갖출 때까지 법 적용을 추가로 유예해 기다려주되 민간 차원에서 대처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원청과 하청의 상생 안전 프로젝트를 도입해 추진하는 방안이 첫 손에 꼽힌다. 뿌리기업이 무너져 생산품을 납품받지 못하게 되면 대기업도 악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따라서 정부 지원이 아니라 원청에서 영세기업의 산업안전 체계 구축에 도움을 줘야 자율 해결이 가능하다. 복잡한 다단계 원·하청 구조 때문에 대기업의 도움을 직접 받지 못하는 뿌리기업에 대해서는 지역 대·중견기업과 뿌리기업 간의 안전협의회를 구성해 수시로 자율 규제에 나서고 부족한 것을 채워가는 방식도 효과적이다.

정부는 이런 방식을 염두에 두고 중대재해 예방 체계를 자율규제로 개선했다. 한국보다 앞서 중대법을 시행한 영국(공장법)이 산업안전법을 개정해 자율 규제로 방향을 튼 뒤 안전사고가 줄어든 사례를 벤치마킹했다. 과도한 법령과 복잡성 등이 산업안전을 더 악화시킨다는 진단은 한국이나 영국이나 마찬가지다.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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