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겨우 100년 전 일인데 어떻게 부정할 수 있나”

이영희 2023. 8. 31. 00:0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모리 다쓰야 감독

100년 전인 1923년 9월 1일, 일본 간토(関東) 지방을 뒤흔든 규모 7.9의 대지진은 10만5000명이 넘는 희생자를 냈다. 동시에 당시 일본에서 가장 약자였던 조선인들이 학살당한 ‘제노사이드(genocide)’의 현장이기도 했다. 지진 후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 ‘우물에 독을 탔다’ 등의 유언비어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고 도쿄(東京)·가나가와(神奈川)·사이타마(埼玉)·지바(千葉) 등지에 살고 있던 조선인 6000여 명이 단지 조선 사람이라는 이유로 목숨을 잃었다.

지바현에 있는 후쿠다무라(福田村)에서도 조선인 여러 명이 자경단에 의해 살해됐다. 9월 6일 가가와(香川)현에서 후쿠다무라를 찾아온 약품 보따리상 9명이 조선인으로 오인돼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마을 사람들은 사투리가 심해 말이 잘 통하지 않았던 이들을 막대기 끝에 쇠붙이를 단 죽창과 엽총으로 공격했다. 학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매일 밭을 일구고 가족들과 평범한 생활을 꾸리던 이들이었다. 무엇이 이들을 살인귀로 돌변하게 했는가. 이런 물음에서 시작한 영화가 다음 달 1일 일본에서 개봉하는 영화 ‘후쿠다무라 사건(福田村事件)’이다.

간토대지진 당시 학살을 다룬 다큐멘터리는 몇 차례 제작됐지만, 극 영화로 만들어진 건 이번이 처음이다. 30일 도쿄에서 만난 모리 다쓰야(森達也·67·사진) 감독은 20년 전 우연히 당시 학살에 대한 신문 기사를 보고 영화화를 결심했다. “일본 땅에서 일본인들이 저지른 일인데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데 충격을 받았습니다. 보면서도 보이지 않는 척해온 것이죠. 그 길로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일본 사회에 껄끄러운 주제이다 보니 제작비를 마련하기 어려웠다.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제작비를 모았고, 뜻을 같이하는 영화인들이 동참했다. 취지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면서 이우라 아라타(井浦新), 다나카 레나(田中麗奈), 나가야마 에이타(永山瑛太) 등 이름 있는 배우들도 출연을 결정했다.

영화는 학살이 일어나던 당시 일본 사회를 휩쓸던 광기를 생생히 보여준다. “당시 일본에 있던 조선인들은 차별의 대상이었습니다. 일본인들은 이들을 2등 시민, 3등 시민으로 부르며 업신여겼죠. 자신이 괴롭혔기 때문에 한편으론 언제 공격해올지 모른다 불안해했습니다.” 혼란 속에서 정부에 대한 불만이 폭발할 것을 우려한 일본 내각부가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으니 주의하라”는 공문을 내려보내며 학살에 불을 붙였다.

그동안 옴진리교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A’, 언론 문제를 다룬 ‘나는 신문기자다’ 등의 사회성 강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왔던 모리 감독은 이번 영화를 위해서도 철저한 자료 조사를 했다. 학살에 일본 정부가 직접 관여했다는 사실도 각종 자료를 통해 확인했지만, 일본 정부는 현재까지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모리 감독은 “겨우 100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다. 아직도 증인들이 있고 증거가 여러 곳에 널려 있다. 어떻게 부정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부끄러운 역사라고 해서 눈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기억하지 않으면 비극은 언제든 또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30일 일본 정부 대변인 마쓰노 히로카즈(松野博一) 관방장관은 조선인 학살에 대해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반성’ ‘사죄’와 같은 단어는 언급되지 않았다.

도쿄=이영희 특파원 misquick@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