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잉보호'라는 알을 깨고 홀로 밖으로 나가기까지
[김형욱 기자]
▲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37초> 포스터. |
ⓒ 넷플릭스 |
태어났을 당시 37초 동안 숨을 쉬지 않아 뇌성마비 장애를 가진 채 휠체어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23세 여성 유마, 유명 만화가 사야카의 보조로 일하고 있다. 하지만 실상은 유마 없이 만화가 만들어지기 어렵다. 편집부에선 그 사실을 공개하자고 하지만 사야카는 꺼린다. 장애인 착취가 들통날까 봐일까? 유마는 고민 끝에 성인만화 잡지 '주간 붐'의 문을 두드린다. 자신의 이름으로 된 자신만의 만화를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주간 붐 편집장이 말하길, 다 좋은데 진정성이 부족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섹스를 해 본 적 없는 만화가가 어떻게 성인만화를 그릴 수 있느냐는 논리였다. 유마는 인터넷 채팅으로 남자를 만나본다. 참으로 다양한 남자들, 좋은 느낌이 오간 이도 있었지만 진지한 만남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결국 유마는 섹스를 하기 위해 남자 성노동자를 찾아간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실패하고 만다. 그러던 중 우연히 마이와 도시를 만난다. 술집 사장과 간병인이라고 했다. 둘 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전혀 없었다. 심경에 큰 변화가 생긴 유마는 집에서 엄마와 다투고 병원에서 몰래 탈출해 마이와 도시를 찾아간다. 그러곤 오래전에 헤어져 소식을 알 길 없는 아빠를 찾아 나서는데… 유마는 자신의 이름으로 만화를 그릴 수 있을까? 그리고 아빠를 찾을 수 있을까?
크게 호평 받은 장편 연출 데뷔작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 37초 >는 자그마치 2020년 초에 공개되었다. 우리나라엔 3년이 훌쩍 지나 공개되었는데, 일찌감치 전 세계 유수의 영화제들에 초청되며 호평을 받았다. 2019년 제69회 베를린 영화제에서 파노라마 부문 관객상과 CICAE 아트시네마상을 수상한 게 대표적이겠다. 히카리 감독의 장편 연출 데뷔작인 바 훌륭한 연출력을 자랑한다.
아울러 담백한 연기도 좋았는데, 특히 유마 역의 카야마 메이가 출중했다. 알고 보니 실제로 뇌성마비 장애를 가진 일반인이었다. 그래서인지 다큐멘터리 느낌이 물씬 풍기기도 하는데, 정제되지 않은 날 것의 연기톤이 오히려 알맞았던 것 같다. 세상에서 나만 다른 것 같은 느낌을 정제된 연기의 배우들 속에서 혼자 정제되지 않은 연기로 잘 표현했다.
한편 히카리 감독은 < 37초 > 이후 드라마 쪽으로 선회해 참여했는데 HBO MAX의 <도쿄 바이스>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성난 사람들>이 그 작품들이다. 꽤 굵직한 작품들인 바 이후에도 히카리라는 이름을 여기저기서 자주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작품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니 날것의 민낯을 보여주는 데 일가견이 있는 것 같다.
▲ 넷플릭스 < 37초 > 스틸 이미지 |
ⓒ 넷플릭스 |
< 37초 >는 37초 때문에 인생이 바뀐 어느 23세 뇌성마비 여성 유마의 자립과 성장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독립이 아닌 자립인 이유는 스스로 홀로 서는 게 우선이자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유마는 평생 엄마의 보살핌으로 살았다. 집에선 그 무엇도 혼자 하지 못하게 했다. 그런가 하면 밖에 나갈 때는 세상 무서운 줄 알라며 치마도 입지 못하게 했다. 유마는 자신이 뭘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성인만화 잡지 '주간 붐'의 편집장이 무심코 건넨 한마디가 그녀의 인생을 다시 한번 바꿨다. 태어날 때는 그녀로서 어쩔 수 없었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남자와 섹스할 수 있다는, 즉 그녀도 남들과 다름없이 또 남들처럼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걸 보여주려 했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여자는 채팅방에 공짜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해서 이런저런 남자를 만났음에도 말이다.
돌이켜보니 과정이 중요했다. 홀로 서고 싶다는 마음가짐과 홀로 서야 한다는 당위성을 지닌 것 자체가 성장이었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자 홀로 밖으로 나선 것 자체도 성장이었다. 꼭 하고자 했던 바를 이루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뭔가를 시작하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게 전부일 때도 있는 것이다. 유마의 경우가 그렇고 우리도 다르지 않다.
혼자 할 수 있는 유마를 돕는 무해한 이들
유마는 얼떨결에 아빠를 찾아 나선다. 그녀가 어릴 때 아빠와 헤어진 엄마는 고군분투하며 그녀를 홀로 키웠는데, 그래서 엄마의 과잉보호가 극심해졌던 것이리라. 혼자였던 엄마, 그래서 너무나도 힘들게 살아온 엄마는 몸이 성치 않은 유마가 혼자서 뭘 하게 두지 않았다. 그게 유마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엄마 자신을 위한 일이었는데 말이다. 유마는 누구보다 혼자 잘 해내야만 했고 또 잘할 수 있었다.
유마가 아빠를 찾는, 즉 뿌리를 찾는 과정에서 무해한 이들의 대가 없이 순수한 도움을 받는다. 그들이 뭘 하는 사람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유마에게 세상의 긍정적인 부분을 인식시켜 줬다는 게 중요하다. 그들은 오히려 유마와 지근거리에서 함께했던 엄마나 사야카보다 나았다. 유마를 특별하게도 특이하게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말이다.
유마를 응원하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 타의로 홀로 서지 못하고 나아가지 못하는 이들을 응원한다. 누구든 유마의 경우까진 아니더라도 그런 부분이 있을 텐데, 어떤 계기로든 깨치고 날아 끝내 뜻하는 바를 이루길 바란다. 중요한 건 결과보다 시작과 과정이 우선이라는 걸 인지하는 것이다. 모두 서로를 보며 활짝 웃을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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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김형욱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singenv.tistory.com과 contents.premium.naver.com/singenv/themovie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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