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제자' '박찬욱 키드'…해외 영화제서도 주목 받는 감독들

권근영 2023. 8. 30.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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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유토피아' 엄태화 감독, '잠' 유재선 감독
제76회 칸 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에서 처음 공개된 영화 '잠'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유재선 감독은 봉준호 감독의 조수이기도 했죠."
지난 5월 제76회 칸 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에서 '잠'이 상영될 때 사회자는 유 감독을 이렇게 소개했다. "전 세계에서 영화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이 영화를 처음 보여주게 됐다. ‘이날이 나의 심판의 날이구나’ 두려움이 컸는데 다행히 기대 이상의 호응을 받았다"고 유 감독은 돌아봤다.

이선균 배우, 유재선 감독(가운데), 봉준호 감독과 함께 한 영화 '잠' 특별상영회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봉준호의 제자= 유 감독은 '옥자'(2017) 연출부 출신이다. 프리 프로덕션부터 촬영, 후반 작업, 그리고 통역으로 프로모션까지 함께 하며 당시 연출부에서 가장 오래 일했다. 이런 인연으로 봉 감독은 "아끼는 후배가 있는데 재능이 있다"며 유 감독을 이선균ㆍ정유미 배우에게 소개하며 캐스팅부터 힘을 실어줬다. 지난 26일에는 서울 롯데시네마 월드타워에서 열린 특별상영회에서는 직접 사회를 보며 유재선 감독, 이선균 배우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날 관객과의 만남은 부산ㆍ대전ㆍ대구ㆍ김포로도 동시 중계됐다. 이 자리에서 봉 감독은 "앨프레드 히치콕 감독이 봐도 칭찬했을 것 같다. 자기 영화가 상영될 동안 관객들의 멱살을 잡고 끌고 가다시피 하는 것, 요즘으로 치면 휴대폰이 어디 있는지 잊을 만큼의 몰입을 추구하는 게 그의 영화 인생의 목표였다”고 상찬을 아끼지 않았다.

영화 '잠'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34세에 장편 데뷔작을 칸에서 선보였지만, 유재선 감독은 영화에 늦게 입문한 편이다. 대학 때 문예 창작 수업을 들으면서 비로소 감독을 꿈꿨고, 졸업 후 ‘옥자’ 연출부에 들어갔다.
"'옥자' 통해 어깨너머 봉 감독님의 연출을 본 게 가장 큰 도움이었다. ‘잠’ 제작 중 조언도 많이 받았는데 특히 '할 수 있다' '이 시나리오로 감독해라' '잘하고 있다' 고비마다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셨다”고 유 감독은 말했다. 가장 큰 것은 ‘봉테일’이라는 별명처럼 정확한 콘티로 작업하는 봉준호 감독을 닮은 효율적인 촬영 방식이었다. 유 감독은 “쓰지 않은 장면은 딱 하나 뿐, 촬영분의 95%를 영화에 활용했다”고 말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잠'은 다음달 토론토 국제영화제에 나란히 초대됐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엄태화 감독(오른쪽)은 박찬욱 감독의 대담 자리에 18년 전 '친절한 금자씨' 연출부 시절 쓰던 슬레이트를 가져왔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포스트 박찬욱= "박찬욱 감독님은 제 나이보다 두 살 어릴 때 '올드보이', 제 나이 때는 '친절한 금자씨'를 찍으셨죠. 저희끼리 만나면 '봉준호 감독님은 서른넷에 '살인의 추억'을 찍었는데 우린 뭐 하나' 합니다."
지난 4일 서울 잠실 롯데시네마 월드타워에서 열린 '콘크리트 유토피아' 상영 후 관객과의 만남에서 엄태화(42) 감독이 한 말이다. 박찬욱 감독과의 대담이 있던 이 날 엄 감독은 18년 전 '친절한 금자씨'(2005) 연출부에서 일할 때 쓰던 슬레이트를 들고 나왔다. 엄 감독은 '쓰리, 몬스터'(2004) 연출부 막내로 시작, '친절한 금자씨'를 거쳐 단편 '파란만장'(2011)의 조감독으로 일한 대표적 '박찬욱 키드'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후배 감독을 응원하러 나온 박 감독은 "각본도 읽었고 가편집본도 봐서 아는 내용인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잠시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며 제작 과정에서 많은 조언을 했음을 밝혔다.
'박찬욱 키드'라지만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는 봉준호의 그림자도 많이 보인다. ‘설국열차’의 머리 칸과꼬리 칸, ‘기생충’의 저택과 반지하를 떠올리게 한다. 가진 것 없고 억울한 것 같은 주인공 영탁(이병헌)이 재난 이후의 황궁아파트에서 지배하고 통제하는 모습 또한 '기생충'의 변화무쌍한 주인공 기택(송강호)과 겹쳐진다.
‘밀수’부터 ‘오펜하이머’까지 경쟁이 치열한 여름 극장가에서 영화는 337만 관객을 넘겼고, 내년 초 제96회 미국 아카데미 영화상 국제 장편영화 부문 한국 출품작으로 선정됐다. 심사위원들은 “‘아파트’라는 한국적인 소재에 아카데미를 감동시킨 영화 ‘기생충’에서 발견되는 계급‘이라는 화두를 다루고 있다”며 만장일치 선정의 이유를 밝혔다.

엄태화 감독(왼쪽)과 박보영 배우

◇’한국 영화의 끓는점‘ 이후= 엄 감독의 말처럼 ‘올드보이’가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던 때가 20년 전. 그 해 ‘살인의 추억’ ‘지구를 지켜라!’ ‘스캔들-조선 남녀상열지사’ ‘황산벌’ ‘장화, 홍련’ 같은 개성 있는 영화들이 동시에 쏟아져 나오며 한국 영화의 끓는점을 형성했다. 약 1700억원의 영화진흥기금이 조성되고 수십 개의 투자조합이 생기면서 영화산업이 규모를 키워가던 때다. 2020년 밖에서는 ‘기생충’이 칸 황금종려상, 아카데미 작품상ㆍ감독상 등 4개 부문을 휩쓸고, 안에서는 한 해에도 천만 관객몰이를 하는 영화가 여럿 나올 정도로 한국 영화는 르네상스를 맞았지만 ‘포스트 박찬욱ㆍ봉준호가 없다’는 위기의 목소리도 꾸준히 나왔다.
강유정 영화평론가는 “세상의 종말 이후를 다룬 어두운 분위기 때문에 여름 성수기 시장에 맞지 않을 거라 했던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꾸준한 반향을 일으키며 전통적 관객이 건재함을 입증했다. OTT의 '무빙'을 포함해 세대교체의 감각을 갖춘 감독들이 대중적 성공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더 문’‘비공식작전’ 같은 여름 개봉 대작들이 기대 이하의 흥행 성적을 거두면서 돌파구가 필요한 한국 영화계에 신진 감독들이 새로운 이야기를 들고나오고 있다. ‘친절한 금자씨’ 스크립터였던 이경미 감독은 ‘미쓰 홍당무’에 이어 넷플릭스 시리즈 ‘보건교사 안은영’에서 자기만의 개성을 한껏 보여줬다. 또 ‘기생충’과 ‘헤어질 결심’ 조감독 출신 김성식의 장편 상업영화 데뷔작인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주연 강동원)이 추석 극장가에 개봉 예정이다.

영화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 [사진 CJ ENM]

오동진 영화평론가는 “‘밀수’의 류승완 감독, ‘범죄도시 1’과 디즈니+의 ‘카지노’를 만든 강윤성 감독, ‘킹덤 2’ ‘무빙’의 박인제 감독도 신세대 감독들을 잇는 허리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중저예산의 영화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감독ㆍ프로듀서 등 미드필더들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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