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하이엔드] ‘파워포인트’ 미디어 아트...이정민 작가의 아날로그적 선긋기
작가 이정민, 사물의 시간을 수집하다
" “조각을 전공했는데, 어느 순간 밤새도록 파워포인트로 선을 긋고 있는 저를 발견했어요. (웃음)” "
미디어 아트 작가 이정민은 독특하다. 전기 신호인 비트를 붓 삼아 화면을 수놓는 현란한 미디어아트는 현대미술 중에서도 기술 집약적 장르로 손꼽힌다. 그런데 이정민의 작품은 오히려 노동 집약적이다. 컴퓨터 화면을 화폭 삼아 연필로 선을 긋듯 화면 위를 클릭해 선을 긋는다. 주로 사용하는 프로그램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파워포인트.’ 흔히 발표 자료를 만들 때 쓰는 회사원들의 친구, 그 파워포인트가 맞다. 고난도 기술 대신, 화면 위를 수없이클릭해서 한 땀 한 땀 자기만의 세계를 조각하고 있는 이정민 작가를 지난 21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중앙일보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프로그램으로 애매한 인간의 속도를 구현하다
흰 평면 위에 몇 가닥의 선이 내린다. 선 몇 개가 모여 면이 되고, 면은 다시 가구가 되어 방을 이룬다. 그러다가 침대 위에 청바지와 스웨터가 떨어진다. 파워포인트의 애니메이션 기능으로 만들어진 이정민 작가의 ‘my room(2005)’이다.
2분 20초의 영상 안에서 사물들은 제각각 상대적이고, 주관적 속도로 나타났다 사라진다. 파워포인트 애니메이션 기능에 있는 시간 표현을 활용했다. ‘매우 빠르게’ ‘빠르게’ ‘중간’ ‘느리게’ ‘매우 느리게’라고 규정된 다소 애매한 설정이다. 그래서 방안 책상에 놓인 컴퓨터의 마우스는 조금 빠르게 움직이고, 부엌의 작은 창문은 느리게 열린다.
이정민 작가는 상대적 ‘시간성’을 작업의 주요 주제로 삼는다. 1분 혹은 2분처럼 숫자로 표현되는 정확한 시간이 아니라, 빠르거나 느릴 수 있는 사물의 시간을 수집해 한 화면에 병치·중첩한다.
Q : 왜 파워포인트였나?
A : 처음에는 사진을 활용한 애니메이션 작업을 주로 했는데, 대학 4학년 때 졸업 시기다 보니 발표할 일이 많았다. 그때 우연히 파워포인트의 애니메이션 기능을 발견했다. 글자 대신 그림을 그려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등장하면 움직임이 생기고 공간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Q : 상대적 시간성이 화두다
A : 서울에 혼자 올라와서 대학 생활을 했는데, 당시 살던 방안에 고요하게 혼자 있다 보면 시간이 확 느려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직도 생각나는 장면이 부엌에 있었던 작은 창문이다. 아주 오랫동안 창문을 보다보면 약간 느리게 열리는 것 같은 착각이 인다. 사람마다 다르게 구현되는 시간을 포착한 계기다.
Q : 정확성이 생명인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애매한 인간의 속도를 구현한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A : 사람의 머릿속에서 시간은 프레임 단위로 움직이지 않는다. 지금 5프레임 지나갔네, 이렇게 하지 않으니까.(웃음) 그보다 ‘오늘 시간 되게 느리게 가네’라는 생각이 드는 날이 있지 않나. 이렇게 문장으로 시간의 흐름이 규정된다. 그래서 우연히 발견한 파워포인트의 그 애매모호한 시간 표현이 참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Q : 전공은 조각이었다고.
A : 그래서 미디어 아트도 이렇게 아날로그식으로 한다(웃음) 파워포인트 작업은 주로 한 레이어(면)에 선을 계속해서 중첩시키면서 그리는 식으로 이뤄진다. 영상이지만 한 공간에 선이나 도형을 하나하나 쌓아간다는 면에서는 조각 작업과 닮았다.
방에서 작업실로, 한강으로….“난 상상력 부족한 작가”
작가의 작업은 방에서, 작업실로, 작업실 인근의 지하철역에서 대형마트로, 그리고 마침내 한강과 도시로 확대된다. 도심의 빼곡한 빌딩 숲이나 잠실야구장, 한강 변의 교각과 복잡한 도시 시설물이 선과 선으로, 선과 면으로 아름답게 건설된다. 물론 ‘선의 중첩으로 이뤄진 공간에서 상대적 시간을 구현한다’는 테마는 한결같다. 한강 교각을 달리는 기차는 쏜살같이 지나가면서도, 물 위에 뜬 오리 배는 천천히 유영하듯이.
Q : 시간으로 변주를 주는 대신, 소재는 일상적이다.
A :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걸 힘들어한다. 미술 대학을 다닐 때도 예를 들어 ‘반복’ ‘축적’에 대해 표현하라는 식의 과제가 너무 괴로웠다.(웃음) 상상력이 부족하다. 그래서 어떤 것을 봤을 때 기억에 남는 장면을 메모해 둔다. 길거리를 지나가는데 물탱크에서 물이 쏟아지는 장면, 당시의 주관적 시간의 흐름까지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작가의 최근 작업은 파워포인트로 구현했다기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장대하며 또한 아름답다. 마치 벽에 걸어둔 그림이 조금씩 움직이는 것처럼 그 자체로 완결적이다. 물론 이런 밀도는 밑도 끝도 없는 ‘노동’에서 나온다. 파워포인트 한장에 선을 700개까지 긋고, 시간의 상대적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타임라인을 3000개까지 만들어본 적도 있다고 한다. 문서작업용 프로그램으로 애니메이션을 구동하다 보니 ‘다운’되는 일도 부지기수. 그래서일까 작가의 작품은 화면으로, 영상으로 구현됐지만, 조각과 닮아있다. 흙을 깎아내듯이 오랫동안 일일이 손으로 매만진 티가 난다.
Q : 작업 방식이 굉장히 ‘아날로그적’이라고.
A : 파워포인트 상단에 보면 도형 아이콘이 있다. 선, 삼각형, 사각형. 이걸 활용해서 이런 그림을 그리는 거다. (웃음) 전공이 조각이라서 그런지 주변에 미디어 아트를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당시에는 미디어 아트에 대한 인식도 얕아서 미디어 아트가 몸을 쓰지 않고 기술로 ‘쉽게 간다’는 편견도 있었다. 그래서 일일이 선을 긋고 이미지를 만들어서 이걸로 영상을 만드는 식으로 ‘수작업’을 고집했는지도 모르겠다.
Q : 작업 시간이 어느 정도나 걸리나.
A : 큰 작업의 경우 1년 가까이 걸린 적도 있다. 5~6개 정도 되는 장면을 만들었는데, 나중에 보니 타임라인 준 것만 한 화면에 3000개가 넘더라. 파워포인트 한장에 이 많은 선을 다 넣고 선마다 시간을 설정하다 보니 수정을 하거나 뭔가를 추가할 때마다 계속해서 처음부터 영상을 재생해야 한다는 애로점도 있다.
“순수미술로 남아있고 싶다”
오는 9월 6일부터 열리는 키아프 아트 페어 출품작을 위해 인터뷰 당일까지도 작업실에서 밤새도록 작업을 하다 왔다는 작가는 “기술로는 절대 이길 수가 없으니까 더 집요하게 하려한다”며 수줍게 웃었다. 작품에 등장하는 어떤 사물이 1초 느려지는 게 관람자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할 만큼의 작은 차이지만, 그 차이를 위해 지난한 시간을 견딘다. 그리고 이렇게 쌓인 시간의 조각은 어느새 이정민 작가의 시그니처(상징)가 됐다.
다행히 최근에는 미디어 아트를 찾는 곳이 많아졌다. 얼마 전에는 한 아파트가 커뮤니티 센터를 지으면서 영구 소장할 미디어 아트 작품을 의뢰받았다. SKT 사옥 로비에 미디어 파사드 작업을 하고, 러시아 소치 동계 올림픽 평창홍보관의 벽에 작품을 쏘기도 했다. 개인 소장용으로 작품을 판 적도 있다. 모니터와 작품을 세트로 만들어 한 번에 판매하는 식이다.
Q : 이번 키아프 출품작은 ‘렌티큘러’ 형식인데.
A : 예전의 책받침을 떠올리면 쉽다. 이 각도에서 보면 이런 장면인데, 시선을 달리해서 저 각도에서 보면 다른 장면이 되는. 미디어 아트지만 소장하기 쉽고, 설치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다. 관객들이 이동하면서 작품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Q :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하고 싶나.
A : 가장 경계하는 것은 스스로가 테크닉에 빠지는 것이다. 작업을 하다 보면보이는것에 몰입해서 더 움직임을 넣고 현란하게 해서 보는 사람의 흥미를 끌어보자는 유혹에 빠진다. 그럴 때마다 정신을 차리고, 느낀 대로 담백하게, 우직하게 표현하려 한다. 무엇보다 순수 미술로, 작품으로 남고 싶다.
■ 작가 이정민은...
「 1981년생. 홍익대학교 조소과와 동대학원 졸업. 지갤러리(2020), 금호미술관(2008)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우민아트센터·창원시립미술관 등에서 열린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으며, 2018년 소치 동계올림픽 평창 홍보관, 2012년 셀트리온 미디어월, 2013년 SKT 타워의 미디어 파사드 작업을 진행했다. 2007년 제6회 금호영아티스트에 선정됐다.
📌 전시 '다이알로그, 더 마인드 맵(Dialogue, The mind map)= 8월 25일~9월 9일, 예비전속작가제도 우수 작가 그룹전(13인), 성수 플랜트란스
」
■
「 다시 한번 한국이 예술로 들썩이고 있습니다. 오는 9월 6~9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리는 키아프 서울·프리즈 서울이라는 걸출한 두 아트페어 덕분입니다. 두 페어의 개최 기간에 맞춰 전국 곳곳에서 열리는 아트 이벤트도 참 많습니다. 예술에 대한 관심이 폭증한 이때, 한국의 작가들에 대해 한 걸음 더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 중앙일보가 출품 준비에 한창인 작가들을 만났습니다. 키아프가 올해 처음으로 선정 발표한 '키아프 하이라이트 작가' 중 시간적·지리적으로 인터뷰가 가능했던 한국 국적의 작가들입니다. 직접 작가들을 만나보니 왜 이들이 스스로를 "노동집약형"이라고 말하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창의성을 오랜 시간을 들여 묵묵히 작업해 나가는 작가 10인을 매일 1명씩 '나는 한국의 아티스트다' 인터뷰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
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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