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율성 둘러싼 느닷없는 '빨갱이 논쟁'... 참담하다

서부원 2023. 8. 30.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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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박근혜 정권 때 시작된 기념공원 조성...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단 건가

[서부원 기자]

 정부와 여당의 광주광역시 '정율성 역사공원' 건립 사업 비판 수위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29일 오전 남구 양림동 정율성 거리전시관에 설치된 정율성 부조 조형물.
ⓒ 안현주
 
광주는 나의 50여 년의 인생 중에 꼭 절반을 산 제2의 고향이다. 사고무친이었던 이곳이 처음엔 무척 낯설고 데면데면했지만, 시나브로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특유의 잔정과 인간미에 감화됐다. 요즘 누군가 내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부지불식간에 광주라고 대답할 때도 있다.

어색한 타향살이에 적응하기 위해 주말이면 동네 마실 다니듯 시내를 걸어 돌아다녔다. 광주의 진산이라는 무등산도 여러 차례 올랐고, 금남로와 국립 5.18 민주 묘지를 비롯한 5.18 사적지는 제집 드나들 듯했다. 지금도 시내 한복판 광주공원과 사직공원, 비엔날레의 주 전시장으로 쓰이는 중외공원은 손바닥 보듯 환하다.

그중에도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이 남구 양림동이다. 지금은 '펭귄 마을'로 불리며 전국에서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는 광주의 대표적인 '핫플'이 됐다. 한 세기 전 개신교 선교사들이 터를 잡은 곳으로, 지역 최초의 교회당과 근대 병원, 학교, 서양식 주택 등이 밀집해있다.

근대 문물이 가장 먼저 전파된 곳이니만큼, 광주를 대표하는 현대사 인물들이 나고 자란 곳이기도 하다. 태어난 곳은 아니라 해도, 이곳에서 배우고, 가르치고, 일가를 이룬 이들이 셀 수 없이 많다. 지금의 광주가 시작된 곳이 양림동이라는 말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지금의 광주가 시작된 곳, 양림동

이곳엔 개신교 선교사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인 배유지(유진 벨)와 오기원(오웬) 목사, '버림받은 여성들과 나환자의 어머니'로 추앙받은 서서평(엘리자베스 셰핑) 선교사를 비롯해 걸출한 독립운동가이자 '걸인들의 아버지' 최흥종 목사, 3.1 운동 당시 경찰의 칼날에 한쪽 팔을 잘린 '남도의 유관순' 윤형숙 열사의 자취가 선연하다.

또, 광주학생독립운동부터 5.18 민주화운동까지 파란만장했던 현대사를 온몸으로 받아 안은 대한민국 여성운동의 대모로 일컬어지는 조아라 선생이 오랜 세월 활동한 터전이고, '가을의 기도'로 잘 알려진 김현승 시인도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다. 양림동의 골목길을 걷노라면 누구라도 따뜻한 위로를 받고 정의감을 고양하게 되는 이유다.

최근 느닷없는 '빨갱이 논쟁'에 휘말린 정율성 선생도 빼놓을 수 없다. 대로변 마을 어귀에 어린 시절 그가 살았던 옛집이 남아있다. 안내 팻말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을 뿐, 안으로 들어갈 순 없다. 오랫동안 잊힌 인물이었던 까닭에 명확하진 않지만, 그의 생가는 동구 불로동으로 알려져 있다. 그곳에 지금 논란이 가열되고 있는 '정율성 기념공원'이 완공을 앞두고 있다.

역사 교사로서 참으로 민망한 고백이지만, 광주에 내려오기 전까지 정율성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 더 솔직해지자면, 양림동 골목길을 걷다가 우연히 만난 인물이다. 소 뒷걸음질 치다가 개구리 잡은 격이라고나 할까. 그가 14억 중국인 모두가 존경하는 중국의 3대 음악가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

파란만장했던 정율성의 삶
 
 정부와 여당의 광주광역시 '정율성 역사공원' 건립 사업 비판 수위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29일 오전 남구 양림동 정율성 거리전시관 앞을 시민들이 걷고 있다.
ⓒ 안현주
 
그의 옛집에 안내판이 처음 세워진 건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2004년에 와서다. 성장세가 가파르던 중국과의 우호 증진을 위해 묻혀있던 그의 이름이 호출된 것이다. 중국으로 귀화한 공산주의자였기에 우리에겐 적잖이 부담스러웠을지라도 중국에선 영웅으로 추앙되는 인물이었기에 한중 관계의 봄날을 위해선 안성맞춤이었다.

우리나라를 찾은 중국인 관광객들이 서울에서 천릿길 마다하지 않고 이곳 광주를 부러 찾는 이유도 그를 만나기 위해서다. 그래선지 그의 옛집과 거리에 설치된 전시물, 흉상 등에 세워진 안내판엔 우리글과 중국어 설명뿐이다. 여느 관광지라면, 영어와 일본어가 우선이었을 테다.

이후 옛집 옆으로 난 길 이름도 '정율성로'로 공식 명명되었고, 시내의 도로 표지판에도 정율성이라는 이름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모든 걸 중국인 관광객들을 유치하기 위한 '마케팅 전략'일 뿐이라고 폄훼할 순 없다. 그에겐 공산주의자라는 이념적 규정만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파란만장했던 이력이 있다.

그는 형들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에 가입했다. 그는 4남 1녀 중 막내로, 형제들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의열단의 의백 김원봉이 난징에 세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2기생으로 입학해 독립을 위한 열의를 다졌다. 온 국민의 애송시 <절정>, <청포도> 등을 쓴 시인 이육사가 1기 입학생이었다.

그런데, 그는 총칼 대신 악기를 들고, 유격 훈련 대신 음악 공부를 하는 소임을 받게 된다. 총칼과 함께 음악도 혁명의 도구로 쓰일 수 있다는 김원봉의 혜안이 내린 결정으로 알려져 있다. 본명인 정부은에서 정율성으로 개명한 것도 그즈음이다. '음률 률(律)'에 '이룰 성(成)'이니, 음악으로 독립에 이바지하겠다는 다짐을 담았다.

정율성 기념공원이 조성 소식에 조금 놀랐던 이유

중국과 연대하여 항일 투쟁에 나서던 시절, 그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권력 투쟁을 벌이던 중국 내부의 모순을 절감했다. 부정부패로 피폐해진 농촌의 현실과 항일 투쟁보다 공산당 축출에 혈안이었던 국민당 정부에 환멸을 느끼고 기꺼이 중국 공산당의 일원이 된다. 항일 투쟁의 최전선에서 그들과 동고동락하며 작곡한 노래가 바로 중국인 모두가 즐겨 부르는 <옌안송>이다.

대장정과 이른바 '신중국'의 건국을 지켜본 그에게 해방 후 북쪽을 선택한 죄를 묻는 건 가혹하다. 6.25 전쟁이 터진 뒤 음악가로서 북한 공산군에 협력한 건 당연한 귀결이다. 바로 이 행적이 윤석열 대통령까지 나서서 '정율성 기념공원 절대 불가'를 외치는 이유다. 누구든 '악당'으로 만드는 데는 여전히 공산주의자라는 낙인 하나면 충분하다.

그가 문화대혁명 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민족주의자로 내몰려 숙청당한 사실도 논외다. 일제강점기 불세출의 독립운동가인 김원봉조차 '빨갱이'로 내몰려 치도곤당하는 참담한 현실에서, 의열단 활동 정도로는 해방 후 북한으로 간 공산주의자라는 굴레를 벗기란 힘들다. 더욱이 6.25 전쟁을 도발한 주력이었던 조선의용군의 행진곡까지 작곡한 인물 아닌가.

박근혜 전 대통령 재임 시절로 기억한다. 처음 그의 생가터에 기념공원이 조성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솔직히 조금은 놀랐다.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던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때도 섣불리 손대지 못한 일을 자타공인 보수 정권에서 시작할 줄이야.

이는 진보 정권이냐 보수 정권이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중국과의 관계에 따라 널 뛰듯 냉탕과 온탕을 오간 것이다. 2014년 시진핑 주석이 방한했을 때, 서울대학교 강연에서 양국의 우의를 상징하는 인물로 정율성을 언급했다. 이듬해 박근혜 전 대통령이 참석한 중국 전승절 70주년 열병식 행사에서 그가 작곡한 노래를 연주하며 우의를 재확인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렸다는 걸까.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이 직을 걸고 기념공원 조성을 막겠다는 건, 정율성이 공산주의자여서도, 6.25 전쟁 때 북한 공산군의 일원이어서도 아니다. 이는 윤석열 정부가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관심이 없을뿐더러 그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정부와 여당의 광주광역시 '정율성 역사공원' 건립 사업 비판 수위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29일 오전 남구 양림동 정율성 거리전시관 앞에 '정율성'과 '공산당'을 비판하는 현수막이 나붙어 있다.
ⓒ 안현주
 
이는 해묵은 이념 논쟁을 끌어와 세대와 지역의 갈등을 부추기는 전형적인 국내 정치용 갈라치기다. 어차피 미국, 일본과 한배를 탄 마당에 중국의 눈치를 보며 좌고우면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이다. 더욱이 정율성의 고향이 광주여서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리고 정부와 여당을 중심으로 온갖 거친 말을 쏟아내는 형국이다.

급기야 5.18 관련 단체들마저도 주눅이 든 채 납작 엎드렸다. 기념공원 조성에 반대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지난 2009년 정율성의 흉상 제막식을 주관했던 황일봉 전 남구청장(현 5.18 부상자회 회장)이 "그땐 잘 몰랐다"며 반대에 앞장서는 모습은 적이 당황스럽다(관련기사 : [단독] 5.18단체 "보훈부 간부, 정율성 공원 반대 요청"... 사흘 뒤 '조선' 광고 게재 https://omn.kr/25eg4).

심지어 일부에선 5.18 당시 북한군 개입설에 빌미를 차단하기 위해서라는 어처구니없는 주장까지 나왔다. 이는 역사적 평가는 물론, 법적 판단까지도 끝난 사안이다. 민주, 인권, 평화라는 5.18의 정신은 이념의 잣대로 재단할 수 없는 가치라는 점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는 셈이어서 참담할 따름이다.

양림동에서 정율성을 처음 만났을 때의 느낌을 새삼 떠올려본다.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통해 굴곡진 우리 현대사를 보았고, 핏빛 독립운동사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몫이 적지 않음을 알게 됐다. 분단에서 비롯된 이념 갈등의 질곡에서 벗어나 상대를 포용하고 기억하려는 관대함을 이곳 광주에서 배웠다.

정율성이 공산주의자인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식민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중국이라는 갑옷을 둘렀고, 공산당이라는 무기를 든 것일 뿐이다. 공산주의자라는 빨간 색안경을 벗고 보면, 그는 조국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을 빛낸 중국의 위대한 음악가다. 이 정도의 관용 없이 과연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할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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