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진 남자, 640명의 경쟁자
[양형석 기자]
지난 1993년 만 23세의 젊은 나이에 마약 과다복용으로 요절한 리버 피닉스의 동생으로 알려졌던 배우 호아킨 피닉스는 <글래디에이터>에서 악역 콤모두스 역을 맡아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르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5년 리즈 위더스푼과 함께 제임스 맨골드 감독의 <앙코르>에 출연해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리버 피닉스의 동생'이 아닌 '배우 호아킨 피닉스'로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2012년 <마스터>로 베니스영화제 남우주연상, 2017년 <너는 여기에 없었다>로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연기파 배우로 명성을 날리던 호아킨 피닉스는 2019년 또 하나의 인생캐릭터를 만났다. 바로 세계적으로 10억 7400만 달러의 흥행성적을 기록했던 영화 <조커>였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조커>에서 소름 끼치는 연기로 관객들을 놀라게 한 호아킨 피닉스는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휩쓸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 독특한 감성의 멜로영화 <그녀>는 관객들의 재상영 요청 쇄도에 국내에서 개봉 5년 만에 재개봉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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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과의 러브스토리를 담은 영화들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인공지능(A.I.)은 어느덧 우리 생활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각 대기업과 이동통신 회사에서 개발한 음성인식 비서시스템을 통해 생활정보를 얻거나 집안의 전기제품을 작동하는 모습은 이제 광고나 드라마가 아닌 일상에서도 제법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한 발 더 가까이 접근해 근미래에 실제로 다가올지 모를 인공지능과 인간의 사랑을 다룬 작품들이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다.
지난 1999년 <나 홀로 집에>1, 2편과 <미세스 다웃파이어>를 만들었던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은 고 로빈 윌리엄스와 함께 <바이센티니얼 맨>이라는 독특한 소재의 휴먼 멜로영화를 선보였다. 물론 1억 달러의 제작비가 투입된 <바이센티니얼 맨>은 세계적으로 8700만 달러의 성적에 그치며 흥행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휴머니티와 멜로라는 주제가 적절히 결합된 <바이센티니얼 맨>은 흥행성적과 별개로 국내외 관객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스타워즈> 시리즈의 오비완 캐노비로 유명한 이완 맥그리거와 < 007 스펙터 > < 007노 타임 투 다이 >에서 본드걸을 연기했던 레아 세두가 주연을 맡은 2018년작 <조>도 인공지능 로봇과 인간의 사랑을 다룬 영화다. 커플들의 연애 성공률을 측정해주는 연구소의 직원인 조는 호감을 갖게 된 남자 콜과의 커플 성공률이 0%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조는 콜에 의해 곧 자신이 인간이 아닌 기계임을 알게 된다.
만약 현실에서 인간의 감정을 느끼는 기계가 나온다면 그 기계는 곧바로 '연구대상'이 될 것이다. 하지만 <조>는 영화, 그것도 멜로 장르의 영화이기 때문에 영화 속 조는 점점 인간의 감정을 느끼도록 진화하고 급기야 눈물까지 흘리면서 인간인 콜의 마음을 뒤흔든다. 영화 <조>는 인간의 감정을 느끼는 인공지능 휴머노이드 로봇을 통해 세상살이에 지친 이들을 위로해주는 작품이다.
마렌 에거트에게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 주연상을 안겼던 독일영화 <아임 유어 맨>은 완벽한 배우자를 대체할 휴머노이드 로봇을 테스트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여성과 로봇의 동거를 그린 멜로 영화다. 오직 자신만을 위해 설계된 로봇에게서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여성의 심리를 흥미롭게 묘사한 <아임 유어 맨>은 마렌 에거트의 섬세한 연기와 <미녀와 야수> 실사판에서 야수를 연기했던 댄 스티븐스의 변신을 보는 재미가 쏠쏠한 작품이다.
▲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 무기력한 대필작가 테오도르는 인공지능 운영체제 사만다와의 연애로 활기를 되찾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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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편지에 익숙하지 않은 세상에서 다른 사람의 편지를 대신 써주는 대필작가로 활동하는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 분)는 서정적인 글 솜씨로 많은 이들의 감성을 촉촉히 적셔준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아내(루니 마라 분)와의 별거 후 의욕을 잃고 무기력한 삶을 살고 있다. 그렇게 살아가는 의욕을 잃어가던 테오도르는 우연한 기회에 언제나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인공지능 운영체제 사만다(스칼렛 요한슨 분)를 만나게 된다.
처음 사만다를 사용할 때만 해도 조금 진화한 음성인식 비서서비스라고 생각했던 테오도르는 그저 명령을 수행하는 단계를 넘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만다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그렇게 사만다와 보내는 시간이 점점 늘어난 테오도르는 실체가 없는 인공지능 사만다를 사랑해 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사만다는 테오도르 외에도 동시에 8000명이 넘는 사람과 대화하고 그중 640명과 사랑을 나누는 희대의 바람둥이(?)였다.
<그녀>는 미국의 영화평론 사이트 로튼 로마토에서 신선도 94%, 미국의 영화정보사이트 IMDb에서도 8.2점의 높은 평점을 기록했다. 이는 '거장'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와 아카데미 작품상에 빛나는 <노예 12년>에 버금가는 호평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수상했고 국내에서도 2014년 5월에 개봉했다가 불과 5년이 지난 2019년에 재개봉할 정도로 꾸준히 사랑 받았다.
아내와 별거 중이고 인공지능 운영체제와 사랑에 빠졌지만 그나마 멀쩡한 직업을 가진 대필작가 테오도르를 연기한 호아킨 피닉스는 <그녀>에서도 엄청난 연기내공을 발휘하며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특히 사만다가 잠시 접속이 되지 않자 크게 당황한 테오도르가 마치 길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이성을 잃고 거리를 헤매며 방황하는 연기는 단연 압권이었다(사만다가 접속이 되지 않았던 이유는 허무하게도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 때문이었다).
<그녀>를 연출한 스파이크 존즈 감독은 1990년대 중반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이름을 날리다가 1999년 존 쿠삭과 캐머런 디아즈 주연의 코믹 판타지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를 연출하며 독특한 발상을 인정 받았다. 존즈 감독은 뛰어난 영상미와 독창적인 소재로 만드는 영화마다 높은 평가를 받지만 흥행성적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편이다. <그녀> 이후에는 장편영화 연출보다는 단편영화와 광고제작에 집중하고 있다.
▲ 실체가 없는 인공지능 운영체제 사만다를 연기한 스칼렛 요한슨은 영화 내내 한 번도 얼굴이 나오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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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기준 역대 누적 흥행수익 1위 배우로 등극한 스칼렛 요한슨은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샬롯과 <어벤저스>의 블랙 위도우로 대표되는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미녀배우다. 그런 요한슨이 <그녀>에서는 실체가 없는 인공지능 운영체제 사만다를 연기하며 오직 목소리로만 출연했다. 결과적으로 테오도르와 사만다는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지만 사만다는 테오도르에게 잊고 살았던 사랑의 감정을 되찾게 해줬다.
DC 확장 유니버스에서 슈퍼맨의 여자친구 로렌스 레인을 연기했던 에이미 애덤스는 <그녀>에서 테오도르의 '여자사람친구' 에이미를 연기했다. 테오도르와 대학 때 잠시 사귀었지만 이별 후 친구로 지내고 있고 테오도르가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크게 당황하지 않고 그 사실을 받아 들인다. 테오도르 역시 사만다와 헤어진 후에도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가장 먼저 '여사친' 에이미를 찾았다.
<그녀>에는 영화 중반 테오도르와 함께 소풍을 가는 친구가 등장하는데 이 배우가 바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와 <쥬라기 월드> 시리즈로 유명한 크리스 프랫이다. <그녀>는 크리스 프랫이 지금처럼 유명세를 타기 전에 출연했던 영화인데 그가 2011년부터 2013년까지 출연했던 <머니볼>과 <제로 다크 서티> <그녀>는 모두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 그만큼 프랫은 작품을 고르는 '선구안'이 뛰어난 배우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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