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하는 한국 영화계, '영리한 신인감독'이라는 단비 [ D:영화 뷰]
'신체모음집', 여섯 명의 신인 감독 의기투합
더 이상 '스타 감독'의 이름 값이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됐다. 티켓값 인상과 OTT와도 경쟁해야 하는 환경에서 좋은 이야기가 없이는 '천만 관객'이란 구력을 가진 감독도 흥행에 쓴 맛을 보게 된다. '신과 함께' 시리즈로 '쌍천만'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김용화 감독과 '끝까지 간다' '터널'에 이어 넷플릭스 시리즈 '킹덤'으로 글로벌 시청자까지 사로잡은 김성훈 감독은 신작 '더문'과 '비공식작전'으로 여름 성수기 관객몰이에 나섰지만, 각각 105만, 51만 관객밖에 동원하지 못했다.
팬데믹 이후 한국 영화계가 좀처럼 회복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두 작품 제작비 200억 원이 넘는 텐트폴의 실패가 한국 영화계 제작 순환에 경색되지 않을까 우려가 이어진 상황 속에 신인 감독들의 작품이 기대 이상의 결과물을 선보이며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됐다.
9월 6일 개봉하는 정유미 이선균 주연의 '잠'은 유재선 감독의 데뷔작이다. '잠'은 행복한 신혼부부 현수(이선균 분)와 수진(정유미 분)을 악몽처럼 덮친 남편 현수의 수면 중 이상행동, 잠드는 순간 시작되는 끔찍한 공포의 비밀을 풀기 위해 애쓰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로, 유재선 감독은 데뷔작으로 제76회 칸 국제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초청됐다.
칸 영화제 비평가 주간은 감독의 첫 번째나 두 번째 작품을 소개하는 섹션으로, 유재선 감독은 그해 가장 촉망받는 신인 감독에게 수여하는 황금 카메라상 후보에도 올랐다.
해외 관객들에게 먼저 선보인 후, 뜨거운 박수 갈채를 받았으며 해외 매체의 호평을 받았다. 스크린 인터내셔널은 "단순한 몽유병에 대한 풍부한 상상력과 교묘한 변화가 가미된 영화"라고 평했고, 레터박스드는 "관객의 관심을 끌고 놀라게 하는 방법을 안다"면서 '잠'을 올해 칸 국제영화제 베스트 영화 중 한 편으로 선정했다. 대부분 장르를 혼합하면서 극도로 섬세하게 유머와 공포의 코드를 결합시킨다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
봉준호 감독 역시 '잠'을 본 후 "최근 10년간 봐온 작품들 중 가장 유니크한 공포"라는 찬사를 쏟아내기도 했다. 이처럼 기대가 높아진 상황 속에서 지난 18일 '잠'의 언론배급시사회가 진행됐고, 국내에서도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아내가 남편의 몽유병이라는 미지의 행동으로 일상을 위협받고, 공포 속에서 무너지는 이야기를, 치밀하고 촘촘하게 그려냈다. 유 감독은 장르를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정확하게 밀고 나간다. 대담하면서 섬세한 연출력은 한국 영화를 끌고 나갈 신예의 탄생을 알리기 충분했다.
'잠'보다 앞서 개봉하는 '신체모음.zip'(이하 '신체모음집') 역시 신인 감독들의 역량이 한 껏 빛나 반가운 작품이다. 제26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코리안 판타스틱 작품상을 수상한 '신체모음집'은 사이비 종교 단체를 취재하는 막내 기자 시경이 특별한 의식에 초대받고, 그곳에서 제물로 바쳐지는 신체 조각과 관련된 이야기를 담아낸 공포 영화다.
'신체모음.zip'은 '토막'(최원경 감독), '악취'(전병덕 감독), '귀신 보는 아이'(이광진 감독), '엑소시즘. 넷'(지삼 감독), '전에 살던 사람'(김장미 감독), '끈'(서형우 감독)의 여섯 편으로 이뤄진 옴니버스 구성을 취했지만, 다섯 개의 에피소드가 '토막'이라는 하나의 에피소드로 완결된다. 독특한 구성과 뛰어난 연출력이 어떤 장편영화와 비교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
특히 배우 안미나가 에피소드 '엑소시즘.넷'을 지삼이란 이름으로 메가폰을 잡았다. 첫 연출시도였지만 다른 감독들과의 비교해 완성도가 떨어지지 않으며 향후 활약을 궁금하게 만들었다.
이야기마다 시의성도 내포하고 있다. 사이비 종교의 활개, 청년 실업문제, 이웃과의 단절, 집단 내 괴롭힘, 폭력과 혐오 등 현실에서 문제 되고 있는 사회문제를 에피소드에 녹여냈다.
'잠'과 '신체모음집'은 많지 않은 예산으로 접근할 수 있는 신인 감독의 등용문이라 불리는 공포 장르라는 공통점을 취하고 있다. 다양한 표현을 극대화할 수 있는 공포 영화라는 장르를 영리하게 활용했다. 공포 영화의 각종 장치들이 첨가돼 있지만, 참신한 아이디어와 명확한 메시지가 바탕이 되어야만 관객들의 박수를 받을 수 있다. 두 작품은 독특한 시각으로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며, 다양성과 창의성을 통해 한국 영화의 미래를 기대하게 했다.
스타 감독들은 뛰어난 작품과 감독성으로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지만, 이에 따른 높은 기대와 압박도 함께 따라오기 마련이다.'잠'과 '신체모음집'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발상과 실험적인 작품을 통해 한쪽으로 쏠린 관심을 환기, 무게감을 덜어주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반가운 등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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