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어머니에게 편지 쓰듯 꾹꾹 써 내려간 시"

최미향 2023. 8. 30.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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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간월도 효부 김유정 시인의 인생 풀스토리

[최미향 기자]

▲ 시집 '간월도 아낙네'를 출간한 김유정 시인 .
ⓒ 최미향
 
90대 홀시어머니를 모시면서도 글램핑장을 운영하는 나이 60의 억척시인 김유정씨는 한때 한비야씨를 참 좋아했단다. 자기가 하고픈 것 하면서 넓은 세상 구경하는 모습이 너무 좋아서 말이다. '나도 꼭 저렇게 살아야지' 생각했지만 그녀는 꿈을 뒤로하고 여행 대신 간월도로 여행 온 관광객들을 맞이한다. 그들이 편안하고 행복한 여정이 되도록 글램핑장을 운영하고 있다.

"한때는 경기도 안산에서 7년 동안 카페아델을 경영했고, 여성복 라젤로를 5년 동안 운영했지만 결국 올 상반기 충남 관광객 최다 방문지 간월도에서 평온한 황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시인으로 등단까지 하여 책 출간도 했고요. 사람 사는 거 별거 없는 것 같아요.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삶이 최고인 거 같아요."

지난 26일, 10여 년 전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로 내려와 남편과 함께 펜션 글램핑장을 운영하는 김유정 시인을 만나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아버지와 함께 했던 초등학교 졸업식 사진 .
ⓒ 최미향
 
-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했습니다. 당시 얘기를 해주세요.
"아버지가 경찰 공무원이셨고 어머니는 사업가셨어요. 부유한 집안에서 저는 1남 5녀 중 다섯째였죠.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부모님께서는 평택에 사시면서 저희 남매를 일찌감치 서울로 유학을 보내셨어요.

초등학교 재학시절에는 수영과 핸드볼 등 구기종목에 유난히 재능이 많았고, 이대부중에 다닐 때는 연극과 시 낭송에 특히 관심이 많았죠. 집으로 돌아와 라디오 앞에서 목마와 숙녀를 읊조리며 가슴 두근거렸던 단발머리 여학생 시절, 제 안의 감성은 지금의 남편을 만나면서부터 삶의 언저리로 서서히 멀어져 갔답니다.

직장생활을 하다 중매로 남편을 만났어요. 젊어서는 피부도 좋고 귀엽게 생긴 게 착해 보여서 좋았어요. 거기다 장사하면서 돈도 꽤 벌어놨더라고요. 흥청망청 쓸 만도 한데 알뜰하기까지 해서 아주 맘에 들었죠. 눈에 콩깍지가 제대로 씐 거죠(웃음)."
 
▲ 시어머니와 김유정 시인 부부 .
ⓒ 최미향
 
- 사업가 남편은 어떤 분이셨나요?
"남편은 홀어머니에 1남 3녀 외아들이었어요. 시어머님은 둘째인 아들을 남편 삼아, 친구삼아 살아가고 계시더라고요. 오로지 아들밖에 모르시는, 딱 살아보니 그렇더라구요. 살면 살수록 홀어머니와 아들에 관한 여러 가지 설들이 다 맞았어요(웃음).
진짜 슬펐죠. 남편은 아니라고 그러지만 저는 남편이 진짜 남의 편인 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착한 남편과의 사이에 아이들도 있고 하니 끝까지 가야죠. 중간중간 엄청 힘든 부분을 어찌 다 말로 설명할 수 있겠어요. 다시 살아라 그러면 저 못살아요(웃음). 착한 남편이 저더러 그러대요. '내가 살림할 테니 너는 나가라'고요. 그래서 견딘 거예요. 날마다 어머님과 부대끼면 어떻게 살겠어요."
 
▲ 김유정 시인이 찍은 사진 가을이면 유난히 돌아가신 친정엄마가 그리워 훌쩍 간월도를 돌며 휴대폰으로 사진을 남긴다고
ⓒ 최미향
 
- 친정엄마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애지중지했던 딸이었는데.
"저희 어머니는 옛날사람이라 그런지 출가외인이라고 저만 참으라고 했어요. 너무 힘들어서 하소연하러 가면 "혼자 된 어머니 잘 모셔라"라며 매몰차게 돌려보낸 어머니셨죠. 그때는 어린 마음에 어찌나 서운하던지요. 하룻저녁 어찌어찌 보내고 이튿날 어머니가 바리바리 챙겨주신 것들 들고 다시 돌아오곤 했죠.

그러고 보니 우리 엄마 돌아가신 지도 어느덧 10여 년이 다 됐네요.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흘렀나 봐요. 8년을 병환으로 힘들어하셨는데도 시어머니 모시랴, 가게 하랴, 변변히 찾아뵙지도 못했어요. 그때는 생각만 해도 어머니의 빈자리가 너무 컸는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 그 틈도 다 메워져 있네요.

자식은 그런가 봐요. 이제 얼마 있으면 가을인데 우리 엄마 기일이네요. 하늘나라에서 지금 저 시인되어 사는 모습을 보고 계신다면 아마도 기특하다고 할 거예요. 친정어머니에게 편지를 쓰듯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을 시로 꾹꾹 써 내려갔거든요."
 
- 시는 어떤 계기로 쓰게 되셨어요?
"애들 막내 고모부가 총각 때부터 남편과 친구 사이였어요. 시인이기도 하고요. 갑자기 제게 시인대학을 권유하시며 회비까지 다 내주신 거예요. 그것이 계기가 되어 시를 공부하게 됐어요. 고모부 얼굴을 봐서라도 진짜 책임감 있게 열심히 했죠.

교통편도 엄청 불편했어요. 왔다 갔다 하다 보면 하루는 그냥 지나가 버리고 마는 거예요. 그래도 저는 긴 시간을 거리에 낭비하는 것이었지만 시를 배운다는 자체가 단조로운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물꼬 역할이었기에 빠지지 않고 다녔어요. 고모부님 덕분에 대지문학 시인 박종규 교수님도 만났고요.

시를 쓰다 보니 문득 '시 쓰기는 어쩌면 운명이 아닐까'라고 생각했어요. 저 개근상을 탈 만큼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갔잖아요. 교수님은 항상 숙제를 내주셨죠. 그것을 풀기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들을 마음으로 보는 연습도 무진했고요."
 
▲ 운전하다 바라보게 된 무지개를 만나면서 꿈을 상기시켰다는 김유정 시인? .
ⓒ 최미향
 
- 마음으로 보는 연습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만약에 매미가 나무에 붙어있다고 해요. 우리는 늘 그런 식으로 매미를 보게 되잖아요. 교수님은 학생이 12명이라고 하면 12개의 박제 매미를 가지고 오셨어요. 제 눈앞에서 몸체를 본 건 처음이었죠. 매미가 성충이 되기 전까지의 단계로 처음 봤어요. 정말 감동이었죠.
또 있어요. 만약에 오늘 숙제가 완두콩이라면 그걸 똑같은 숫자대로 삶아서 학생들 전원에게 나눠주셨어요. 그만큼 열정적인 교수님이셨어요. 당신은 20년 전에 간암 판정을 받아 이식하셨지만, 그런데도 열정 하나만큼은 젊은이 못지않았어요. 제자만도 대략 100명 정도 배출하셨으니까요."
 
▲ 김유정 시인의 시집 출판기념회 .
ⓒ 최미향
 
- 시인으로 등단하고 나면 마음이 좀 남다를 것 같아요.
"그럼요. 정말 제 이름 걸고 책을 펴내니 감회가 남달라요. 그리고 시어머님과의 모든 일이 소재가 되니 일상 또한 즐겁고요. 하나하나가 의미가 있는 셈이죠. 삶이 달라졌다고 해야 할까요.
그런데 부담도 되는 게 사실이에요. 이제 좀 더 잘 쓰고 싶다는 욕심도 생기고요. 그런데 이상하죠. 멋모르고 쓸 때는 막 써지던 것이 이제는 더 안 써져요(웃음). 그러고 보면 한 고비 고비를 넘겨야 하는 것은 시인에겐 숙명인 것 같아요. 이제는 성숙한 글을 쓰고 싶어요."
 
▲ 김유정 시인의 시집 '간월도 아낙네' .
ⓒ 최미향
 
- 사업적인 부분도 그렇지만 본인의 꿈을 찾아가는 어머니의 모습은 자녀들에겐 또 다른 희망일 것 같아요.
"슬하에 1남 1녀를 뒀는데 다들 잘 컸어요. 늘 감사해요. 특히 우리 딸에게는 더 그런 마음이 커요. 미안한 마음도 있고요. 10년 전 안산에서 인척도 없는 서산 간월도로 내려오면서 사업적으로 엄청나게 힘든 시간을 보냈어요. 고향도 아니고 그냥 막 가버리고 싶은 마음이 엄청 컸었죠. 
그래도 남편은 이 장사 저 장사 다 경험이 많아서 그런지 뭘 해도 겁을 내지 않더라구요. 그냥 우직하게 나아가는 남편을 보면서 어느 순간 저도 기류에 흔들리지 않고 되든 안 되든 초월하게 되더라고요. 이런 모습을 아이들이 봐서인지 맡은바 자기 일들은 잘 해내고 있어요. 고맙죠."
 
▲ 김유정 시인이 휴대폰으로 찍은 간월도 물바진 갯벌 .
ⓒ 최미향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1남 5녀라고 했잖아요. 1월에 갑자기 남동생이 하늘나라에 갔어요. 시술하러 들어갔는데 못 깨어났죠. 이번 일로 인해 가까운 가족들은 본인이 살아온 삶을 다시 뒤돌아보게 됐어요. 그 바람에 평상시에 하고 싶은 거 더 열심히 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고요. 제게는 그게 글이고 노래였어요. 그중에서도 특히 글은 치유의 능력도 있더라고요.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노래 부르기를 좋아해서 무대에 서려고 해요. 무대에 입고 갈 의상도 미리 사다 놨어요. '이걸 입고 분명 언젠가는 무대에 설 것이다'라고 다짐하는 의미로요. 아무튼 꿈이 있다면 노력하십시오. 어느 순간 저도 정체성은 없어지고 주변과 타협하며 가족만을 위해 살아온 지난한 인생을 돌아보니 가슴이 공허할 때가 많더라구요. 

그 세월의 고통 속에서도 자신을 꽃피우게 해준 일등공신은 역시 꿈, 그중에서도 글이었죠. 하다 보면 꽃을 피우게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힘든 과정에 계신 분들이 있다면 절대 꿈을 놓지는 말았으면 좋겠어요. 포기하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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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서산시대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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