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광인 성인가요]김성호의 애절한 순애보 ‘내 사랑 매화’와 ‘재회’

김은구 2023. 8. 30. 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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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매화’ 부르며 떠난 연인 찾아다녀
6년 만에 만난 기쁨 그린 신곡 ‘재회’ 발표
김성호(사진=차트코리아 제공)

60세가 넘은 연인들도 지고지순한 사랑을 한다는 사실을 노래로 몸소 증명한 트롯 가수가 나타났다. 1957년생인 가수 김성호는 지난 2018년부터 “그리운 사랑 보고픈 사랑 내 사랑 매화야. 영원히 시들지 않는 내 사랑 매화야”라고 ‘내 사랑 매화’(김성호 작사·오영산 작곡)를 애절하게 부르면서 매화를 찾고 다녔다.

아무 설명도 없이 갑자기 자신을 떠나버린 여인을 매화라고 칭하는가 싶었다. 그런데 이게 웬 걸. 이 가수가 ‘재회’(김성호 작사·오영산 작곡)라는 신곡을 들고 필자를 찾아왔는데 함께 온 고운 여인을 가리키며 “이 사람이 바로 그 매화입니다”라고 소개하는 것이었다.

그 여인이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이며 “안녕하십니까? 고매화입니다”라고 자신의 이름을 직접 말하고 난 다음에야 필자는 매화가 실제 인물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사랑하는 여인을 꽃에 빗대어 노래한 게 아니고 실제 이름이 매화였다. 김성호는 6년 전 고매화 씨가 갑자기 아무 얘기도 없이 자신의 곁을 떠나 애타게 찾아다니다가 ‘내 사랑 매화’의 노랫말을 써서 노래하면서 계속 찾아다녔다고 설명했다.

6년 동안 ‘내 사랑 매화’를 부르며 찾아다녔지만 소식이 없다가 고매화 씨가 어느 날 유튜브에 오른 김성호의 ‘내 사랑 매화’ 동영상에 댓글을 달면서 연락이 닿았다. 어렵사리 재회한 두 사람은 다시는 헤어지지 않기로 다짐을 하고 경기 김포시에 꾸며놓은 보금자리에서 알콩달콩 삶을 꾸려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김성호는 고매화 씨를 찾은 사실이 감격스러워 ‘재회’와 ‘자기야’의 가사를 써서 레코딩을 하기에 이르렀다.

고매화 씨는 함경북도 청진 출신으로 지난 2009년 탈북을 했다. 서울에서 모란봉실버예술단을 조직해 단장으로 활동을 하던 중 김성호와 사랑에 빠져 함께 살다가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가출해 천보산민족기도원에서 1년간 지내는 등 연락을 끊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피치 못할 사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신들림 증상이 심해졌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밥을 먹지 못하고 잠을 자지 못하며 환청에 시달리는 지독한 신병을 앓았다고 한다. 내림굿을 받고 무당이 되어야만 낫는다고 하는데 무당은 죽어도 될 수 없다면서 아무도 모르게 기도원으로 들어가 1년 간 기도만 드렸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폐를 끼치기가 싫었다.

김성호(사진=차트코리아 제공)

간절한 기도 덕택인지 신병의 증상이 사라져 기도원에서 나왔다. 그러나 김성호에겐 연락을 않고 취직해 5년 간 홀로 살다가 운명처럼 연락이 닿아 다시 만나기에 이르렀다. 

김성호는 신곡을 만드는 김에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곡 ‘우리는 한 민족’(김성호 작사·오영산 작곡)과 ‘우리 어머니’(김성호 작사·정원수 작곡)라는 곡도 새로 만들어 모두 네 개의 신곡을 발표했다.

‘우리는 한 민족’은 ‘재회’처럼 고매화 씨를 다시 만난 기쁨에서 만들게 된 곡이다. ‘우리 어머니’는 지난 4월 부모님의 산소를 32년 만에 새로 모시면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가사를 썼다고 한다.

여러 개인 사업으로 성공을 거둔 김성호는 지난 2017년 가수로 데뷔한 이후 지금까지 27곡을 발표했다. 모두 고집스레 자신이 직접 작사한 곡들뿐이다.

전북 순창군 산골마을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김성호는 어려서부터 노래를 좋아했다. 글쓰기도 잘하고 좋아하는 편이어서 친구들의 연애편지를 대필해주곤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맨몸으로 상경했다. 서부역 뒤에 있던 대산자동차라는 정비공장에 취직해 정비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학교 다닐 때 줄곧 1등만 해서 초등하교 2학년짜리 사장 아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 역할도 했다.

10년간 기술을 배워 2급 자동차 정비기능사 자격증을 따고 독립해 홍은동에서 자동차부품 대리점을 운영했다. 10년 뒤에는 역촌동에서 자동차 정비공장을 차려 운영해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1997년 큰 교통사고를 당해 장기간 투병생활을 했다. 요추를 크게 다쳐 수술을 받았지만 완쾌되질 않아 20년간 병마와 싸워야 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 부동산 중개사무소와 주유소를 운영하기도 했다.

평소 노래를 좋아해 2000년 지인의 소개로 작곡가 차태일을 만나 자신이 쓴 가사들을 내놓으며 슬프고 애절한 노래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작곡가는 “빠른 트롯이 대세”라면서 의견충돌이 일어나 2017년에야 ‘천년 배필’ 등 11곡의 취입을 끝내고 데뷔 앨범을 발표했다.

석광인 대기자
전 스포츠조선 연예부장
전 예당미디어 대표
현 차트코리아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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