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욱 칼럼] 건국절의 늪에 다시 빠지려는가

고승욱 2023. 8. 30. 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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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논란에 다시 시작된 진영 간 이념 대결
역사 바로세우기 내세웠지만 결국 친일·주사파 낙인찍기
정치적 이유로 역사 재단하는 과오 되풀이하지 않기를

건국절 논란이 또 시작됐다. 학계에서 학문적 의미를 찾을 수 없다고 손사래 치는 정치색 짙은 논란이다. 내용은 간단하다. 광복절인 8월 15일을 대한민국 건국절로 바꿔 기념하자는 주장에 대한 찬반 논쟁이 전부다. 그런데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이명박정부에서 시작돼 박근혜정부의 국정교과서 논쟁으로 이어졌고, 문재인정부에서는 김원봉 서훈 논란 속에 반복됐다. 윤석열정부도 예외는 아니다.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로 다투면서 건국절이 다시 소환됐다.

대한민국이 건립된 날을 정하는 게 무슨 의미를 갖기에 이렇게 다투는가. 2006년 광복절을 2주일 앞두고 이영훈 서울대 교수는 ‘우리도 건국절을 만들자’는 칼럼을 동아일보에 기고했다. 모든 나라에 있는 건국기념일을 우리도 제정하자는 취지였다. 언뜻 보면 평범한 주장이었지만 이 글의 의미는 남달랐다. 시민운동에 머물던 뉴라이트가 1년6개월 남은 대선에 전면적으로 뛰어들겠다는 신호탄으로 읽히기에 충분했다. 이 교수는 한국경제사를 평생 연구한 학자다. 인정하기 싫어도 일제에 의한 근대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학문적 신념을 갖고 있다.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근대국가의 싹조차 없었으니 진정한 광복은 정부 수립을 통해 이뤄졌다는 것이다. 이는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쳤어도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했다면 용납할 수 없다는 뉴라이트 논리의 핵심이었다. 독립운동사에서 사회주의 계열을 부인하고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인사를 배제하는 이유였다.

이후 건국절은 진영을 가르는 키워드가 됐다. 뉴라이트의 전폭적 지지 속에 대선에서 승리한 이명박 대통령은 건국이라는 말에서 정통성을 확인했다. 취임 1주일 만에 열린 3·1절 기념식에서 “건국 이후 60년, 우리는 세계가 기적이라고 부르는 성공의 역사를 만들었다”고 단언했다. ‘균형 잡힌 역사교육’을 강조한 박근혜 대통령은 2016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오늘은 71주년 광복절이자 건국 68주년을 맞이하는 역사적인 날”이라고 이어받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를 확실히 뒤집었다. 취임 첫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2년 후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라고 선언했다. 대통령이 그럴 때마다 정치권은 요동쳤다. 1948년파와 1919년파로 확실히 갈라서 한마디씩 얹었다. 역사를 바로 세운다고 했지만 상대를 친일파와 주사파로 낙인찍기에 바빴다.

정치인들이 보수·진보의 이념을 토대로 비전을 제시하는 건 지극히 정상이다. 이념은 과거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한다. 부끄러운 친일의 흔적을 되씹고, 6·25전쟁의 원인을 직시해야 미래의 길을 찾을 수 있다. 더구나 지금은 가치외교(value-oriented diplomacy)의 시대다. 정부가 자유, 민주주의, 인권, 시장경제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전략적 모호성 뒤에 안주해서는 국가의 생존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역사 해석을 정파적으로 이용하는 건 다른 문제다. 건국절 제정 움직임이 생산성 없는 말의 잔치 속에 흐지부지 종결된 것은 이 때문이다. 3·1절, 제헌절, 광복절 모두 대한민국 건국을 기리는 날이라는 건 이제 상식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광복절 경축사에서 독립운동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한 건국운동이라고 정의했다. 야당을 중심으로 대통령이 건국절 논란에 또 뛰어드느냐는 말이 쏟아지자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이 “윤 대통령의 인식은 건국이 과정이라는 것”이라며 “건국절 논란은 매우 소모적”이라고 정리했다. 개인적으로 박 장관의 발언을 한물간 논란이 되살아나는 것을 경계한 윤석열정부의 건국절에 대한 공식 입장이라고 이해한다. 건국을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 현대사를 관통하는 역사적 과정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친일파 척결이나 매카시즘에 매몰된 기존의 진영 논리를 뛰어넘는 포용성을 전제하기에 긍정적이다. 하지만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말은 무의미하다. 국방부가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있는 홍범도 장군 흉상을 독립기념관으로 옮기고, 해군의 주력 잠수함인 홍범도함의 이름을 바꾸겠다고 나선 것은 박 장관의 말과 전혀 다른 행동이다. 과거 건국절 논란의 연장이라는 비난이 나오는 건 당연하다. 윤석열정부를 포함해 앞으로 어떤 정권도 정치적 이유로 역사를 재단하는 ‘건국절의 늪’에 빠지지 않기를 기대한다. 대통령이 역사와의 대화를 시작하면 국민들은 고통스럽다.

고승욱 논설위원 swk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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