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내림차순 디톡스
벗어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기쁨의 시간 누리길
순위에 연연하지 않고 싶지만 그것이 주는 편리와 안심에 내 선택을 위탁해버리고 만다. 아마도 내가 하루 종일 가장 많이 하는 선택은 ‘내림차순 정렬’일 것이다. 쿠팡에서 무엇을 검색하든 랭킹순을, 호박이나 선크림을 구매할 때조차 리뷰 많은 순으로 정렬한다. 심지어 그런 나 자신을 사뭇 합리적 소비자라 여긴다. 소비자가 아닐 때도 이 선택은 계속된다. 넷플릭스 톱10이 무엇인지, 관심 있는 분야의 베스트셀러는 무엇인지 수시로 확인한다. 심지어 댓글마저 ‘좋아요 순’으로 정렬해 본다. 다수의 선택과 추천으로 합의된 정보의 유용이 주는 유혹이 크기 때문이다. 업무상으로도 수시로 엑셀의 ‘내림차순 정렬’을 선택하지만, 업무 외 생활의 많은 선택에서도 수시로 그 정렬에 의지한다. 순위로 표현되는 정보의 단면성과 잔인성에도 불구하고 랭킹 밖의 것들을 탐색하고 숙고할 용기와 수고가 부족해 결국 ‘순위’가 주는 편리를 취해왔다.
모두가 저마다의 데이터를 집계하고 결산하기 쉬워진 요즘은 더욱이 집단의 선택과 빅데이터가 만든 새로운 위계가 진리인 듯 전시된다. 빅데이터의 시대는 진리가 대세가 되기보다 대세가 진리의 모습을 띠기 쉽다. 순위는 쉽게 급을 만들고 급은 빠른 판단을 돕는다. 순위에 ‘톱’을 붙이면 ‘더 잘난’의 동의어가 된다. 톱10, 톱100은 새로운 궤도에 진입할 수 있는 훈장이 돼 유명해서 유명한, 잘난 것처럼 보여 잘난 착시를 만든다. 어디가 특별한지보다 1위임이 더 중요해진다. 급은 각각이 지닌 디테일한 장점들과 다채로운 이야기보다 순위 자체에 집중하게 한다. 서사보다 대세가 중요해진다.
내림차순의 편리성은 그것이 선택의 기준이 아닌 삶의 기준이 될 때 가혹함으로 바뀐다.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기준 역시 위계의 굴레에 매여 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내림차순의 상위권에 들고자 종종거리고, 또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려 발버둥 치며 보내왔는지 모른다. 시험 석차나 업무 고과처럼 생계에 영향을 주는 부분부터, 사소하게는 출퇴근길에 하는 모바일 게임 랭킹까지, 나를 옭아매는 순위들에 연연했다. 그러나 끼고 싶었던 날도, 도망치고 싶었던 날도 그보다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엔 의심이 없었다. 누군가가 정해 놓은 급을 따르지 않는 이들의 진가를 보고 싶다는 바람이 내림차순에 무력하게 휘둘릴 때마다 짙어졌다.
모든 것이 범람하는 요즘, 디톡스가 인기다. 디지털, 밀가루 등 삶에서 무언가를 제거하면서 충만함을 수확한다. 순위로 분투하는 삶에 필요한 최적의 디톡스는 어쩌면 내림차순 디톡스일지도 모른다. 점점 더 많은 데이터가 저마다의 순위를 전시하는 시대일수록 그로부터 훌쩍 벗어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무심한 정렬이 만든 상처를 치유하고, 가산되지 않는 세계에서만 발견되는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다. 순위에 신경 쓰는 대신 순위가 없는 것에 마음을 쓰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내림차순 디톡스’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숫자가 빼곡한 세상과 건강하게 공존하기 위한 우리의 무기가 아닐까? 편의점 가장 아래 칸에 놓인 과자를 먹어보고, 알려지지 않은 노래를 찾아 듣고, 아무도 보지 않는 영화를 보는 것이 사소한 시작일지 모른다. 때때로 실망하고 후회하더라도 그 경험이 나만의 견고한 기준을 만들고 판단력을 길러줄 거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대세에 편승하지 않고 스스로 발굴한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사회가 정해 놓은 굴레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내공도 생긴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확실한 기쁨은 순위를 매길 수 없는 성질로 존재한다. 세탁 후 처음으로 덮는 이불에서 나는 향, 계절의 시작을 알리는 상쾌한 아침 공기, 출근 후 마시는 커피 첫 모금의 완벽함 같은 것들은 순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직 음미와 탐미만 허용된 기쁨의 시간, 스스로 개척한 미지의 부분에서만 만날 수 있는 매혹과 신비를 삶으로 들이기를 꿈꿔본다.
정유라 신한카드 빅데이터 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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