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일본 ‘다람쥐 도로’, 한국 ‘고추 공항’
일본에는 ‘다람쥐 도로’가 있다. 친환경 취지에서 다람쥐가 뛰놀 수 있도록 만든 전용 도로일까. 아니다. 일본 정부는 1990년대 국토 곳곳에서 도로·공항·철도 같은 사회간접자본(SOC) 건설을 추진했다. 경기를 띄운다며 사업의 타당성조차 꼼꼼히 따지지 않았다. 인적이 없는 깊은 숲속까지 도로를 깔아 예산을 낭비했다. 자동차 대신 다람쥐만 다니는 도로가 탄생한 배경이다.
한국에는 다람쥐 도로 못지않은 ‘고추 공항’이 있다. 마침 교통의 요지에 있던 고추밭을 개발해 효율성을 높인 공항일까. 역시 아니다. 탁 트인 활주로를 고추 말리는 용도로나 써야 할 정도로 공항 이용객이 적다는 의미다. 전국에 공항이 15곳이지만, 인천·김포·김해·제주공항을 제외한 11곳은 만년 적자 신세다. 그런데도 공항을 더 지어야 한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는다.
정부가 29일 발표한 ‘2024년 예산안’에 따르면 내년 SOC 예산은 26조1000억원이다. 올해 SOC 예산(24조9000억원)보다 4.6% 늘렸다. 지난해 출범한 정부가 처음 ‘긴축 재정’을 추진할 때 SOC 예산을 1년 전보다 10.2% 줄인 것과 대비된다.일자리·연구개발(R&D) 같은 핵심 예산조차 줄줄이 깎였지만, SOC 예산은 예외였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지역구 현안이 달린 국회, 지지율에 민감한 정부가 합심해 ‘묻지마’ 증액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구체적으로 수도권에선 인천발(發) KTX 건설과 광역급행철도(GTX)-A 노선 조기 개통 사업이 SOC 예산에 포함됐다. 부산 가덕도 신공항, 광주 아시아물역사테마체험관, 전북 새만금 신공항, 충북 충청 내륙 고속화도로 1~4공구, 충남 서산공항 건설 등도 이름을 올렸다.
누구나 경제 행위를 할 때 ‘비용 편익 분석(B/C)’을 한다. 선택이 가져올 물리적·시간적 비용(cost)과 여기서 얻는 직간접적 편익(benefit)을 금전 가치로 바꾼 뒤, 편익이 비용보다 크다는 판단이 서야 일을 추진한다. 우리는 이런 선택을 “타당하다”고 평가한다. 그런 문제의식에서 1999년 도입한 제도가 ‘예비 타당성 조사(예타)’다. 예타에서 B/C가 1.0 이상이어야 사업에 경제성이 있다고 본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예타 결과에 따르면 부산 가덕도 신공항의 B/C는 0.58이다. 100원을 투자해 얻는 편익이 58원에 그친다는 얘기다. 최근 세계 스카우트잼버리 대회 파행으로 도마 위에 오른 전북 새만금 신공항은 B/C가 0.47이다. 낙제점 수준이지만 문재인 정부 시절 예타를 면제받았다. 충남 서산공항은 예타에서 탈락했는데도 살아남았다. 여기 ‘고추 공항’의 운명이 보인다.
김기환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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