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더레코드]고현정 "복귀前 이민도 고민…연기 소중해졌다"
넷플릭스 '마스크걸' 김모미役
죄수복에 쇼트커트 변신
데뷔 34년차, 불안 이겨낸 열정
“제가 어렵다고요? 널려있는 가십에 눈과 귀를 맡기고 계신 건 아닌지…(웃음) 그 가십에 제가 공범임을 인정해요. 무에서 유를 창조한 가십은 없었으니까요. 하하. 배우로서 온전히 작품을 제안받기를, 무념무상으로 연기할 수 있길 바랄 뿐이에요.”
배우 고현정(52)은 담백했다. 묻는 말에 솔직했고, 군더더기 없이 자신을 그대로 드러냈다. 1989년 33회 미스코리아로 데뷔해 34년간 '톱스타'로 살았다. 왕관의 무게도 견뎌야 했다. 혹자는 그를 향해 예민하거나, 어렵지는 않을까 우려하기도 한다. 최근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고현정을 만났다. 그는 자신을 향한 일각의 시선을 알고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자신을 꺼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담담하고 거침없이 지난 시간을 돌이켰다.
고현정은 지난 18일 공개된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넷플릭스 시리즈 '마스크걸'(감독 김용훈)에서 3번째 김모미로 분했다. 죄수번호 1047로 불리는 것에 익숙해진 중년의 김모미는 교도소의 왕으로 군림한 안은숙의 눈 밖에 나 힘든 수감생활에도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 평온한 나날을 보내지만, 교도소 밖에서 온 편지 한 통에 탈옥을 결심한다.
숱한 작품을 해온 고현정이지만 '마스크걸'은 달랐다고 했다. 고현정은 "출연을 제안받고 '나한테도 이런 제의가 들어오는구나' 싶어 기뻤다. 그간 출연하던 전형적인 작품·배역이 아니라 장르물의 일원으로 참여한다는 의미가 컸다. 순수하게 저를 떠올려줘서 기분이 좋았다"고 떠올렸다.
"작품에 하나의 퍼즐로 녹아들고 싶었어요. 저 혼자 책임감을 느끼면서 이고지고 끌고 가서 온갖 질타를 다 받고, 잘 돼도 본전이고. 그런 작품을 하다가 구조적으로 협력하면서 의논하며 가는 작품을 만나서 좋았어요. 늦은 감도 있지만, 하고 싶었고 꼭 해야겠다 싶었죠."
세상은 변했다. 지상파 TV 드라마 시청률이 50%에 육박하고 거리가 차가 없던 시절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극장에서 조폭·신파 영화는 처절하게 외면당하고, 관객은 똑똑해졌다. OTT 플랫폼이 급속도로 커지면서 콘텐츠가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다. 1인 1채널 시대가 오면서 미디어 환경도 급변했다. 고현정은 "시대가 달라졌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촬영장도 달라졌다. 고현정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시대를 건너와 있다는 걸 느낀다"고 했다.
이어 "예전에는 선배들 앞에서 일부러 더 긴장한 척하기도 했다. 부르면 어깨를 반 접고 달려가고, 대본 리딩 때는 늘 집중하는 것처럼 굴기도 했다. 요즘은 다르다. 자기 출연분이 아니면 편하게 휴대전화도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고인 물은 되지 말자고 다짐한다"고 덧붙였다.
나이 든 신예를 이르는 '중고 신인'이라는 말도 사라진 지 오래다. 청춘 배우가 혜성처럼 등장해 풋풋한 매력으로 스타덤에 오르는 일은 옛말이 됐다. 단편영화, 대학로 무대, 온라인 콘텐츠 등 다양하게 활동하던 배우들이 엄청난 내공을 터트리며 단숨에 주목받기도 한다. 좋은 얼굴을 지닌 후배 연기자의 등장은 천하의 고현정에게도 꽤 위협적이라고 털어놨다.
"좋은 후배들이 많이 나오는 건 위협적이죠. 나의 취약점인 불안을 건드려요.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렇지만 어디로 도망가거나 환상에 빠지고 싶지 않아요. 어떤 세상에 사는지 정확히 알고 싶죠. 세상이 변해도 내가 할 일은 있고, 어떻게 해야 발탁될 수 있을까 구체적인 고민을 하게 돼요."
고현정은 자신의 이미지나 고정관념에 얽매지 않고 배우로서 온전히 서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변했다지만, 톱스타 고현정에게 1번이 아닌 배역을 건네기란 쉽지 않을 터다.
그는 "앙상블 배역을 연기하고 싶어서 오래 기다려왔다"며 "한 작품에서, 많은 배우의 연기를 보는 게 관객의 만족도가 높을 거라고 늘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제 가십에 눈과 귀를 맡기지 마시라"며 웃었다. 이어 "어떤 식으로든 마르고 닳도록. 배우로서 잘, 빨리 쓰이고 싶다"고 덧붙였다.
"드라마 '선덕여왕'(2009) 때도 저는 25회에 죽는 역할이었고, '모래시계'(1995)도 주인공이 아니었어요. '디어 마이 프렌드'(2016) '대물'(2010)이나 영화 '여배우들'(2009)도 그렇고요. 사실 저는 단독 주연을 해본 적이 많지 않아요."
고현정은 감옥에 수감 중인 배역을 연기하기 위해 쇼트커트로 머리카락을 잘랐다. 그는 "바짝 자르고 촬영장에 갔다. 저도 많이 변하고 싶었는데 감독님도 만족해하시는 거 같아서 좋았다"고 떠올렸다. 그러면서 "촬영 끝나고 머리카락을 기르는 과정은 힘들다"며 웃었다.
"돈을 받고 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죠. 저는 늘 그렇게 연기해왔어요. 한 번도 촬영장에 패딩을 안 돌린 적 없고, 늘 하던 대로 했죠. 그런데 제 액션 연기가 좋았다고, 고맙다고 말해주신 분이 김용훈 감독님이 유일해요. 또 연기하고 있으면 감독님이 조용하게 제게 와서 '더 힘든 목소리는 어떨까요?' 물어요. 그럼 제가 알겠다고 하고 연기했고요. 결과까지 좋으니 감사하죠."
배우로 순탄한 삶만 살지는 않았다. 일련의 개인적인 일들로 잠시 쉼표를 찍고, 촬영장을 떠나기도 했다. 고현정은 1995년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과 결혼과 동시에 은퇴했다. 2003년 이혼 후 드라마 '봄날'(2005)로 복귀하던 때를 떠올렸다.
"다시는 죽어도 연기를 못할 거 같았어요. 부끄럽고. 다른 나라에 가서 살까도 생각했는데. 컴백하고서 '그래, 잘 왔다' 느꼈죠. 친정 같은 느낌이랄까요. 따뜻하게 받아주셨다고 혼자 느낀 거 같아요. 기분이 좋아서 하고 싶은대로 한 거 같아요. 그런데 세상은 그런 곳이 아니더라고요. 그걸 늦게 알아서 후회돼요. 일로 평가받으면서 세상을 만나고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연기가 소중해졌어요."
이이슬 기자 ssmoly6@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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