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부리코’ 논란 된 번스타인, 그의 삶 모든 장면이 영화

김호정 2023. 8. 29.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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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진행형의 스타 음악가, 레너드 번스타인의 삶
넷플릭스 영화 '마에스트로' 제작 계기로 관심 커져
따라올 이 없는 영화로운 삶, 이면의 그늘도 부각
넷플릭스 영화 '마에스트로'에서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으로 분한 배우 브래들리 쿠퍼. 넷플릭스 공개 시점은 올해 말이다. [AP=연합뉴스]

“아버지가 멋지고 큰 코를 가졌던 건 사실이다. 브래들리는 그와 닮은 점을 강조하기 위해 분장을 선택했고, 우리는 문제라고 보지 않는다. 우리 아버지도 괜찮아했을 거라고 확신한다.”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1918~90)의 자녀들이 16일 소셜 미디어 X(트위터)에 올린 글이다. 번스타인의 세 자녀인 제이미, 알렉산더, 니나 번스타인은 공동명의로 글을 올렸다. 논란의 시작은 배우 브래들리 쿠퍼의 ‘번스타인 매부리코’였다. 쿠퍼는 넷플릭스가 제작하는 영화 ‘마에스트로(Maestro)’의 예고편에 길고 커다란 가짜 코를 붙이고 번스타인으로 나왔다. 번스타인은 유대인이고, 긴 매부리코는 유대인을 비하하는 이미지로 쓰이곤 한다. 뉴욕타임스는 "유대인을 불쾌하게 묘사한 분장"이라는 지적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자녀들의 성명으로 논란은 일단락됐다. 하지만 이런 세세한 논쟁은 번스타인에 대한 현재진행형 관심을 보여준다. 탄생 105년, 세상을 떠나고도 33년이 된 번스타인은 여전히 핵심 스타다.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음악감독으로 12년 머물며 1000회 가까이 연주해 미국의 인기 있는 음악인이 됐고, 유럽에 진출해 콧대 높은 빈 필하모닉과 주로 호흡을 맞추며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89)과 경쟁하는 지휘자로 선풍을 일으켰다.

많은 면에서 영화로운 삶이었다. 지휘자이자 스타 해설자였으며 교향곡과 뮤지컬의 작곡가였다. 피아니스트·저술가·시인이기도 했다. 미국의 평론가 해롤드 숀버그는 『위대한 지휘자들』에서 “사람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은 만능의 사람”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그의 생애 거의 모든 장면에는 어둠 또한 짙다. 넷플릭스의 영화를 비롯해 번스타인 삶의 빛과 그림자에 대한 재조명 움직임이 일고 있다. 지난달 서울에서는 ‘고잉홈 프로젝트’ 오케스트라와 롯데콘서트홀의 여름 음악축제인 ‘클래식 레볼루션’에서 번스타인에 주목했다. 유대인이자 동성애자였으며 감시받는 좌파였던 그 삶의 예사롭지 않은 스토리가 부각되고 있다.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한 러브 스토리


영화 '마에스트로'의 한 장면. 왼쪽부터 펠리시아 몬테알레그레 번스타인 역의 캐리 멀리건, 레너드 번스타인 역의 브래들리 쿠퍼. [AP=연합뉴스]
우선 러브 스토리. 영화 ‘마에스트로’가 초점을 맞춘 부분이다. 아내 펠리시아 몬테알레그레 번스타인은 코스타리카에서 태어나 23세에 미국에 이민을 온 배우였다. 브로드웨이에 데뷔한 1946년 한 파티에서 피아니스트 클라우디오 아라우의 소개로 번스타인을 만났다. 둘의 연애와 결혼은 꽤 드라마틱했다. 약혼 발표 후 파혼했고 펠리시아는 배우 리처드 하트와 연인 관계가 됐다. 하트가 1951년 사망하고 7개월 후 레너드와 펠리시아는 다시 약혼을 발표했고 한 달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번스타인의 동성애 성향은 공공연했다. 번스타인은 1976년 아내를 떠나 동성 파트너와 생활했지만 펠리시아의 투병 소식을 듣고 1년 만에 돌아왔다. 78년 그는 아내의 임종을 지켰다. 영화는 코네티컷에 있는 번스타인가의 실제 별장을 세트로 삼아 이 둘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지적이고 친화적인 천재


1970년 보스턴 탱글우드 페스티벌에서 말러의 교향곡 2번을 지휘한 번스타인. 말러의 교향곡 2번은 넷플릭스 '마에스트로'에도 등장할 예정이다. [사진 보스턴심포니오케스트라 아카이브]
영화가 음악가로서의 번스타인을 얼마나 담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만큼 다시 없을 거대한 음악가다. 영국의 음악 비평가 노먼 레브레히트의 문장이 정확하다. 그는 한국 월간지 ‘객석’에 올 4월 이렇게 기고했다. “뉴욕 필하모닉이 마지막으로 제대로 된 지휘자를 임명한 지 6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번스타인은 65년 전인 1958년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으로 취임했다. 그의 뒤를 이은 지휘자들은 모두 번스타인의 그림자를 걷어내거나 혹은 그만큼 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음악가라는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휘대 위에서 폴짝폴짝 뛰는 포즈 대신, 번스타인이 구성한 공연 프로그램을 봐야 한다. 그는 뉴욕필에 취임하고 첫 공연에서 이런 곡들을 연주했다. 베토벤 교향곡 7번, 찰스 아이브스 교향곡 2번, 윌리엄 슈먼의 ‘아메리카 축제 서곡’. 전통적인 베토벤과 함께 미국의 동시대 작곡가들에 과감하게 초점을 맞췄다. 음악이 그 시대의 지적인 청중과 함께 가야 한다는 신념은 굳건했고 실제로 통했다. 취임한 그해에 연주한 작곡가가 존 베터, 조지 채드위크, 아서 푸트, 헨리 길버트, 에드워드 멕도웰 등이었다. 기존의 작품들을 잘 지휘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음악을 들고 나왔던 지휘자였다.

엄청난 다독가였고 지식에 한계가 없었다. 풍월당의 박종호 대표는 간행물 ‘풍월한담’에서 연주 여행마다 트렁크 서너개에 책만 채워 다니던 번스타인을 소개했다. 번스타인은 8개 국어를 했고 빈의 오케스트라에 독일어로, 밀라노의 단원들에게 이탈리아어로 괴테, 실러와 그리스 고전을 이야기했다. 박종호 대표는 “그는 잘생기고 말 잘하고 친화적이다. 그러나 그 바탕은 지성이었다”고 했다.

번스타인이 남긴 음악 해설은 그가 음악에 어떻게 접근했는지 보여준다. 베토벤 교향곡 5번에서 작곡가가 쓰고서 폐기한 스케치들을 분석한다. 베토벤의 음악이 우연히 이어지지 않고, 논리적 오류 없는 전개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작곡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이 20세기의 음악을 구원했음을 설명하기 위해 언어의 음운론, 통사론, 의미론을 끌어온다. 음악평론가인 고(故) 안동림은 『불멸의 지휘자』에서 번스타인의 연주에 대해 “큰 설득력이 있어 누구나 알 수 있고 아울러 큰 감동을 준다”며 “음악을 철저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전향서 쓰고 무대에 선 좌파 음악인


1955년의 레너드 번스타인. [사진 미의회도서관/번스타인 오피스]
하지만 그에겐 공포와 두려움이 있었다. 미국의 정치학자인 배리 셀즈는 2009년 쓴 논쟁적인 책 『레너드 번스타인』에서 번스타인이 “어두운 시대를 살다간 사람”이며 “자신의 음악과 정치 활동을 분리했던 일이 거의 없었다”라고 썼다. 번스타인에 관한 FBI의 보고서를 입수해 분석하고 내린 결론이다. 그는 하버드 대학 시절부터 감시 대상이었다. ‘반파시즘 난민 합동구호위원회’ 후원 모임에 참석하고, ‘전국 흑인의회’ 창설에 힘을 보태려 했으며, 나치의 공격을 받는 소련을 위해 ‘승리기원 청년궐기대회’에서 연주했다. 그는 1950년 우파 성향의 잡지에서 꼽은 ‘라디오와 TV의 공산당 인사’ 중 하나로 꼽혔다. 블랙리스트였다. 여권을 갱신할 수 없었고 공연이 취소됐다.
배리 셀즈는 번스타인이 치욕적인 전향서를 쓰고 무대에 다시 설 수 있었다는 사실을 찾아냈다. 또 정치 상황이 바뀌어도 늘 존재했던 위협 때문에 번스타인이 작곡가로서 재능을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봤다. 그는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지만 스스로 최종 목표로 생각했던 작품,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고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 음악을 쓰지 못하고 72세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넷플릭스의 ‘마에스트로’는 다음 달 2ㆍ3일 베니스 영화제에서 첫 공개 되며 북미에서는 10월 뉴욕 영화제에서 선을 보인다. 넷플릭스에는 연말쯤 공개될 예정이다. 한국어 제목은 미정이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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