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남대의 은퇴일기㉝] 소쇄원의 대나무

데스크 2023. 8. 29.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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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붓듯 쏟아지던 장맛비가 잠깐 길을 내주자 햇살이 싱그럽다. 계곡을 끼고 오르자 대숲이 하늘을 가린다. 작은 다리를 건너 완만하게 굽은 길이지만 앞이 보이지 않아 무엇이 펼쳐질지 궁금해진다.

소쇄원 입구 계곡물ⓒ

대나무 숲을 벗어나자 시야가 확 트이면서 거목과 흙돌담과 건축물들이 조화를 이룬 소쇄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양산보는 과거에 급제했지만, 스승인 조광조가 사약을 받고 세상을 뜨자 그 충격으로 산속 깊숙한 곳에 은거하기 위해 이곳에 별서정원을 지었다. 자연미와 구도 면에서 조선 시대 정원 중 최고로 손꼽힌다. 며칠 동안 내린 비로 정원 가운데로 물줄기가 우렁찬 소리를 내며 시원하게 흘러내린다. 무릉도원에 들어선 기분이다.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서정이 듬뿍 묻어난다. 해박하고 유머러스한 해설사의 설명을 듣기 위해 귀를 쫑긋한 채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다.

소쇄원 입구의 안내소ⓒ

축대 위 조그만 초가 정자에는 대봉대(待鳳臺)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봉황을 기다리는 곳, 손님을 봉황처럼 귀하게 맞이하는 곳이다. 얼마나 지극한 마음인가. 찾아오는 손님이 송순, 정철, 송시열, 기대승 같은 당대의 내로라하는 문인들이니 그러고도 남을만해 보인다. 대봉대 아래쪽으로는 계곡물을 상지와 하지라는 작은 연못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나무를 깎아 만든 통나무홈통이 보인다. 낭만과 운치가 넘치지 않는가?. ‘지천에 널린 굵은 대나무로 홈통을 만들었다면 훨씬 쉬웠을 텐데’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기발한 착상에 한동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7년 전에 왔을 때도 인상 깊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다시 보아도 그때의 감흥이 되살아난다.

소쇄원 입구 양쪽에 울창한 대나무숲ⓒ

계곡 건너편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광풍각(光風閣)에서 손님과 주안상을 앞에 놓고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려진다. 대숲에서 들려오는 새의 지저귐과 미끄럽게 흘러내리는 맑은 물소리를 들으며 시 한 수 읊으면 무슨 바람이 더 있을까?. 돌담 사이에 난 조그마한 문을 밀고 올라가면 제월당霽月堂이다. 광풍각이 손님과 담소하며 잔을 기울이는 사랑방이라면 이곳은 주인의 독서 공간이다. 동산에 달이 올라 마당에 달빛이 가득하고 소쩍새가 차분히 우는 마루에 앉아 있으면 문장이 절로 떠오르지 않을까. 하지만 황홀한 정취에 홀려 글은 들어오지 않고 임 생각만 날 것 같기도 하다.

손님을 기다리는 대봉대ⓒ

담양은 어디를 가나 대나무가 흔하다. 소쇄원 입구에 들어서면 울창한 대나무숲이 눈앞에 확 다가온다. 좌·우측에는 높이가 수십 미터나 되고 굵기가 두 뼘도 넘어 보이는 싱싱한 대나무가 바늘 하나 들어갈 자리가 없을 정도로 빼곡하다. 녹음을 한껏 들이켰는지 짙은 녹색으로 물들어진 숲은 하늘 높은 줄 모른다. 황금 들녘의 벼처럼 누런 색깔의 대나무도 드문드문하지만, 젊은이의 짙푸른 핏줄이 보이는 듯 푸른색의 굵고 튼튼한 대나무가 대부분이다.

올해 새싹을 틔운 어린나무는 의욕이 넘쳐 하루에 1미터 이상 자라 한 달이면 엄마 아빠 못지않게 자란다. 하지만 가늘고 힘이 없어 바람이 세차게 불면 넘어질까 위험해 보이기도 한다. 성장 속도가 이 정도라 옆에 앉아 지켜보고 있으면 쑥쑥 자라는 모습이 보일 것 같기도 하다. 그런 뒤 여러 해를 두고 점차 두껍고 단단해져 어떤 외풍에도 견딜 체질을 갖춘다.

손님을 맞는 사랑방 역할을 하는 광풍각

늦게 눈을 뜬 죽순은 제대로 자랄지 우려스럽기도 하다. 주변의 높은 대나무로 인해 햇볕을 받지 못하면 죽기도 한다, 쓰러져 있는 나무도 이따금 보인다. 대나무는 변치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계절의 흐름에 따라 다양하다. 봄에는 새싹을 틔워 생명력을 뽐내고, 여름에는 무성하게 자라 굵고 튼튼한 줄기를 만든다. 가을에는 차분한 황토색으로 바뀌며, 겨울에는 매서운 바람에도 굴하지 않는 탄탄함을 보여준다.

왕대는 뿌리에서 새로운 싹을 통해 번식하는 경향이 있다. 강수량이 풍부하고 햇빛이 충분한 환경이 조성되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번지기도 한다. 그 성장력 때문에 재배할 때는 이런 점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크고 강도가 좋아 가구나 공예품 제작에 많이 이용된다. 유명한 관광지인 죽녹원을 비롯하여 대나무박물관과 죽세공예진흥단지, 대나무공예전수관이 있다는 것은 담양이 대나무의 메카로 군림하고 있다는 증거일 거다.

주인의 공부방 역할을 하는 제월당ⓒ

양산보는 담양 창평에서 태어났지만, 소쇄원이 있는 곳은 남면 지곡리다. 고향을 두고 왜 이곳에 소쇄원을 만들었을까?. 아마 대나무의 중요성을 알고 이를 중심으로 설계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벼슬에 환멸을 느낀 후 소쇄원의 대나무를 통해 사람들에게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동진 시대 도연명이 현령으로 재직할 때 상급기관의 관리들에게 굽신거려야 하는 현실을 깨닫고 ‘내 어찌 다섯 말의 봉급을 위해 허리를 굽힐 소냐’ 하며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왔다는 귀거래사가 갑자기 떠오른다. 당파싸움에 야합하지 않고는 목숨 부지하기도 어려운 시기였으니 얼마나 현명한 선택인가?.

계곡물을 작은 연못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나무를 깍아 만든 홈통ⓒ

삶이 어려움과 시련에 부딪히더라도 자신의 길을 걷고, 끊임없이 성장하려는 용기를 가지라는 것이 소쇄원의 대나무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아닐까?. 바람에 흔들리더라도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듯, 소쇄원도 세상의 혼란스러움 속에서 한결같이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 왔다. 소쇄원의 풍경을 바라보면,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들고 모든 것이 고요하고 평온하다. 또한, 대나무는 공동체의 중요성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단독으로 서 있는 대나무보다 한데 어울려 숲을 이룬 대나무는 강한 외풍에도 견딜 수 있다. 이는 공동체의 힘, ‘함께’라는 가치를 일깨워주는 교훈이다.

담양 소쇄원의 대나무 풍경을 보고 느끼는 평온함은 마음을 치유하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힘차게 흘러내리는 작은 폭포의 우렁찬 소리에서 자신감과 활력을 얻었다. 혼자가 아닌 소쇄원의 대나무 숲처럼 함께 어울려 언제 닥칠지 모르는 태풍이나 폭우에도 거뜬히 견디며 살아가리라.

조남대 작가ndcho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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